'개의 취향/KAI BOTTOM'에 해당하는 글 7건

찬카가 터짐 . . . . .
찬뇨가 돌아온 걸까 아니면 밀당일까 . . .
돌아온거면 좋겠다 ㅠ


WRITTEN BY
.ㅅ.
카이 종인 팬 블로그 프리뷰 저장 호모 좋아합니다

,
슈카 부부 / 찬종 찬뭉이와 종인주인님 / 세종 연애 / 경종 불륜 / 준종 원나잇 / 첸카 첸냥이와 종인주인님 / 레카 멘토와 멘티의 불륜 or 의사선생님과 환자 / 백종 캠퍼스 커플 140728

슈종 팀장과 사원 / 찬종 찬뭉이와 종인주인님 / 세종 연애 / 경종 불륜 / 준종 원나잇 / 첸카 스폰서 / 백종 부부 151023

WRITTEN BY
.ㅅ.
카이 종인 팬 블로그 프리뷰 저장 호모 좋아합니다

,
[슈종] 형 친구





그러니까 김민석은 종종 김종대가 데려오는 친구였다. 뭐라더라. 초등학교 때 다니던 수학 학원에서 만났다던가. 같은 학교였지만, 서로 다른 반이라서 잘 몰랐다가 학원에서 친해졌다고 했다. 김종대는 두 달 정도 다니다가 수학 학원을 그만 뒀고, 김민석은 그 후로도 계속 다닌다고 했다. 어차피 이 동네 초등학생들 학원이란 게 다 고만고만해서 학원 다니는 틈틈이 서로 만나 몰려다니고 노는 건 한 번 친해진 다음엔 쉬웠다.


그 인연이라는 게 또 묘한 게, 분명히 김종대랑 김민석이 마땅히 둘이 세상 제일 가는 단짝이 될 만한 이유도 없었고, 실제로 그렇지도 않았단 말이다. 그런데 김종대랑 제일 꾸준히 오래오래 만나는 친구는 김민석이었다. 둘이 중학교도 다른 데로 갔고, 고등학교는 같은 데로 가봤자 문이과로 금방 갈렸고, 이젠 대학도 서울 북쪽에 있다는 것 외엔 공통된 바운더리가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김종대의 가장 오래된 소꿉친구는 김민석이었다. 한 번도 김종대랑 가장 친한 친구로 곁에 있었던 적이 없으면서, 참 인연이 가늘고도 길었다.


오래된 사이는 친구인 당사자와는 상관 없이 가족인 우리에게는 김민석이 가장 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종대는 거리낌 없이 친구를 집에 들이는 타입이었고, 초등학교 때는 김민석도 뻔질나게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직장 때문에 늘 바빠 밤까지 집에 없던 우리 부모님과도 안면을 튼 사이가 참 드물었는데 그 중에 김민석이 있었다. 특히 우리 아버지가 이름과 얼굴, 특징을 매치시키는 사람은 김민석이 유일했다. 그리고 일하던 부모님과 달리 늘 김종대보다 나이가 어려 좀 더 오래 집에 붙어 있던 나는 김민석을 정말 많이도 봤다.







그래서 오늘처럼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실 소파에 늘어진 김민석을 봐도 그리 놀랍진 않다.


"안녕."
"...안녕."


김종대 친구 중에 내가 반말을 하는 사람은 손에 꼽는데, 김민석을 빼고 다른 형들은 다 성격이 워낙 서글서글하고 친근하기 때문이다. 김민석은 딱히 나한테 친해지자며 군 적도 없었다. 서로 어색하게 공기처럼 있었는데, 그냥 어릴 적부터 봐서 말을 편하게 한다.


"우리 형은?"
"화장실에서 샤워."
"아."


그러고 보니 멀리서 물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편해도 그렇지 손님 데려와놓고 혼자 샤워를 하냐.


"너 밥은."
"아직 안 먹었지."
"그럼 종대 나오면 같이 치맥하러 나갈래?"
"그래."


그리고 대화가 끊겼다. 서로 살갑게 구는 타입이 아니라서 십 년을 넘게 보고도 이 모양이다. 냉장고에 가서 문을 여니 사이다가 새로 하나 있다. 김민석이 어느 순간부터 우리 집에 놀러올 때마다 사오는 거다. 웃긴 게, 사와놓고 자긴 안 마신다. 김종대나 내가 손님맞이라고 한 컵 따라줄라 치면 자기는 됐다고 맹물이나 찾는다. 그럴 거면 왜 사왔지. 김민석은 아마 평생 이렇게 우리 집 놀러올 때 손님처럼 굴 거다. 손님이 맞긴 하지만.

뭐, 나야 사이다나 콜라 좋아하니까. 김민석이 사온 미지근한 사이다를 컵에 따르고 냉동실에서 얼음을 두 개 꺼내 동동 띄웠다. 그리고 할 거 없는지 김민석은 부엌을 왔다갔다 하는 나만 본다.


"형."
"응."
"뭐 마실래?"
"난 그냥 물."
"알았어."


김민석이 심심해 보여서 김종대 얼른 씻고 나와라 고사를 지내는데, 나한테서 물컵을 받은 김민석이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저거 뭐야?"
"뭐가?"
"저거."


김민석이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요즘 내가 빠진 나노블럭이다. 좀 유치하긴 한데 좋아하는 영화나 애니 캐릭터들도 나오고, 친구꺼 같이 만들다가 내가 빠진 거다.


"요즘 하는 거. 나노블럭이라고, 저거 유행이야."
"일회용이잖아."
"그래서 안 비싸잖아."
"비싸구만..."
"형이 맨날 마시는 커피 값이나 이거나."
"...너 내가 맨날 커피 마시는지는 어떻게 아냐."
"맨날 봤으니까 알지."


그리고 김민석은 지금 내 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김민석은 공대, 나는 예대. 그리고 공대랑 예대는 별관 건물 하나 끼고 서로 인접해 있다.


"너 공학관쪽은 얼씬도 안 하잖아?"
"형이 공학관만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보지. 맨날 보이던데."
"그래?"


내 말에 김민석은 물컵을 바로 들이켰다. 빈 컵을 돌리면서 물로 가득찬 입을 우물거리는 게 딱 무언가 생각하는 모양새다. 나도 뜨문뜨문 김민석을 오래도 봤으니, 이제 김민석의 습관은 몇 개 안다. 눈썹을 찌푸리는 걸 보니 뭐가 맘에 안 드는 거다.


"...근데 난 너 왜 못 봤지."
"어?"
"허얼, 김쪼닌 왔냐? 언제 옴?"


김민석의 혼잣말이 뭔가 싶은 순간, 문이 열리고 김종대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형은 왜 손님 데려오고 혼자 샤워하고 난리냐?"
"아씨, 아까 김민석이랑 카페 갔다가 스무디 쏟아가지고오! 티셔츠도 젖었는데 완전 배랑 팔이랑 여기, 여기도 다 끈적거리는 거야 진짜!!"
"형이 바보네."
"내 스무디 아니거든! 괜히 남 주려고 사다가 망한 거지!!"
"그럼 누구 껀데?"
"그야..."
"야, 너 나왔으면 나가자."


김민석이 곧장 일어섰다. 김종대가 자주 재잘거리니까 김민석은 이렇게 종종 말을 적당히 끊는다. 김종대도 좋다고 지갑을 챙겨들었다.


"종인이 저녁 안 먹었대."
"허얼. 그럼 나 오늘 쟤한테 대체 얼마나 쓰는 거임?"
"아까 니 돈도 아니었잖아."
"그래도!"
"그래서 쟤 보고 돈 내라고 하게?"


둘이 티격태격하는 걸 들으면서 가스 밸브나 베란다 문 같은 걸 확인했다.







"맞다. 종인아."
"나?"


김종대는 현관문을 열고 벌써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고, 김민석 혼자 문을 열고 서 있다.


"내가 치킨 살 테니까."
"응."
"나 저거 하나만 주라."
"저거?"


김민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내가 조립한 나노블럭들이 있었다.


"응. 저거. 노란색."
"저건 왜?"
"그냥. 너도 일회용이라며. ...싫으면 말고."
"아니, 안 싫어. 그래."


내가 만든 길쭉한 미니언을 김민석에게 주니까, 김민석이 웃는다. 아까는 별 거 아니란 듯이 굴어놓고 귀여웠나 보지.


"설명서도 줄까? 뽀개서 가져갈래?"
"아니. 니가 만든 거 그대로 가져갈래."


대체 그러면 무슨 재미지. 그냥 미니언을 좋아하나. 김종대가 엘리베이터 내려간다고 소릴 질러서, 물어보진 않고 그대로 나갔다.













맥주도 한 잔씩 하고, 김민석은 집으로 돌아갔다. 사실 셋이 자주 이렇게 식사를 하곤 한다. 계획한 건 아니고, 김종대가 김민석이랑 같이 밥이라도 먹으려고 데려왔다가 내가 밥을 안 먹으면 깍두기로 동생 하나 껴주는 그런 거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땐 대개 김종대랑 김민석이 나는 모르는 이야길 하고, 난 돈 안 내는 대신 조용하게 밥만 우걱우걱 먹고 마는 거다. 그래서 둘이 대화하는 모양새를 보게 되는데, 진짜 서로 꼭 맞는 소울메이트도 아니고, 극과 극이라 끌리는 사이들도 아니다. 어떤 건 맞고, 어떤 건 안 맞고. 다행히 서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 잘 맞는 그런 사이다. 김종대는 편한 사이 앞에선 말을 와구와구 떠들다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조용하다가 또 와구와구 떠드는데, 김민석은 김종대가 떠들 땐 적당히 맞장구만 치며 들어주고 김종대가 조용해지면 그제서야 아까 김종대가 폭주한 대화 화제 중 한두 개를 꺼내서 두런두런 이야길 한다. 그리고 다시 김종대가 신이 나면 김민석은 가만히 들어주고. 근데 이게 김민석이 맞춰준다기보단 그냥 김민석은 내내 조금씩 꾸준히 이야길 하고, 김종대는 말하는 양이 널을 뛰는데 우연히 합이 맞는 거다. 저래서 오래 가나보다 싶어서 혼자 치킨을 뜯으면 내가 제일 잘 먹게 된다. 그리고 그걸 보고 김종대가 자긴 뭘 먹었냐고 찡찡대면 식사가 끝난다. 늘 그렇게 흘러간다.


오늘도 그렇게 치맥을 하고, 맥주를 마신 김종대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술이 약하진 않아서 저게 취한 꼬라지는 아닌데, 술이 한 모금만 들어가도 김종대는 늘 기분이 한 톤 올라갔다.


"야, 김쪼닌."
"왜."
"나 스무디 좀 사줘라."
"아까 못 먹어서 그러냐?"
"그건 내가 먹을 게 아니었다니까? 치킨도 사줬잖아. 그러니까 얼르은!"


김종대의 투정에 마침 아직 불이 켜진 24시간 카페로 들어섰다. 지갑 안 가져왔다고 했더니 결국 김종대가 지갑을 꺼냈다. 이러려고 늦게 태어났다 싶다.


"근데 형은 스무디 잘 안 먹잖아. 맨날 커피만 마셔놓고."
"아, 그게에- 아까 쏟으니까 너무 아까워서, 갑자기 스무디가 먹고 싶은 거야."
"아까 그럼 스무디는 왜 샀는데?"
"너 먹으라고."
"나?"
"엉. 너 아마 집에 있을 시간이라구, 김민석이 너 사다주자고 걔가 아까 산 거야. 내가 들다가 쏟은 거지."
"그래?"


그러고 보니, 김민석은 종종 날 이렇게 챙기곤 했다. 사람 성격이 섬세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스무디를 쪽쪽 빨던 김종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야."
"왜."
"그러고 보니까 넌 걔한테 좀 고마워해야 돼. 맨날 그렇게 데면데면 굴지 말고. 알았냐?"
"뭔 소리야..."
"김민석이 너 얼마나 아끼고 챙기는지 아냐? 엉?"
"갑자기 왜 그러는데?"
"야. 김민석이 맨날 올 때마다 너 사이다 좋아한다고 사이다 사오고, 너 뭐 좋아하냐고 묻고, 지나가다가 너 좋아하는 거 있으면 니 얘기 꺼내고. 어? 표현이 없어서 그러지 너 얼마나 아끼는데, 새끼가 맨날 김민석한테 그렇게 무뚝뚝하게 굴고. 엉?"


생각보다 김민석이 나 많이 챙겨주는구나. 놀랐다. 사람이 원체 알게 모르게 챙겨주는 건 알았지만. 김종대가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툴툴거렸다. 근데 그렇게 세세하게 신경써주는 줄은 몰랐는데.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나도 빨대를 잘근잘근 씹게 된다.


"근데, 그건 또 왜 갑자기 말하고 그러는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억울해서."
"억울한 건 또 뭐야."
"옛날부터 김민석이 얼마나 너 챙겼는데. 아직도 벽 치고 그러니까 답답하고 억울해서 그러지."


김종대 핀잔에 대꾸할 거리는 없는데, 사실 나만 벽 치나? 김민석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걔 조만간 한국 떠나거든."
"뭐?"
"조만간이라봤자 두 달 후긴 한데. 아무튼 거기 대학원 간다고. 여차하면 거기서 취직도 하면 좋고. 그래서 생각하니까 자꾸 챙겨주는 애새끼가 맨날..."


김종대가 궁시렁거리는데 하나도 안 들린다. 김민석이?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나 챙겨준다는 사람이 왜 그런 건 말 안 해? 그보다 둘이 왜 오늘 그런 얘기 한 번도 안 했어? 나는 왜 이제 알아? 갑자기 억울하고 열받는다. 답답해야 할 사람은 나다.


"형."
"왜 임마."
"나 민석이 형 번호 좀."
"엉?"
"아 쫌, 내놔 봐. 빨리."
"갑자기 왜 이래?"
"빨리이!"












김종대를 집에 들여보내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오래 얼굴을 봤으면서 번호도 서로 몰랐다. 김민석 번호를 저장하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뭐지. 나 왜 갑자기 김민석이 외국 간다니까 열이 받지? 화닥화닥 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했다. 그냥 오며가며 얼굴만 익힌 형 친구 아닌가. 왜 섭섭하지? 미쳤네.


전화를 거니, 얼마 안 가 곧장 김민석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니 낯선 번호를 잘도 받네.


-여보세요.
"형."
-응. 웬일이야?
"저 종인인데요."
-응. 알아.
"알아요?"


김민석이 잠깐 웃는다.


-응. 원래 알아.
"...그래요?"
-근데 무슨 일인데?


처음으로 수화기 너머로 듣는 김민석 목소리는 실제로 들을 때보다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았다. 꽤 톤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김종대가 속상하다고 칭얼거릴 때 나직하게 맞장구쳐주는, 딱 그럴 때 목소리 같았다.


"...그, 있잖아요."
-응.
"형."
-응.


정작 전화를 거니, 할 말이 없었다. 난 왜 아까 머리에 열이 올랐지. 왜 지금 전화를 걸고 있지? 머리가 정리가 안 되니까 입 밖으로 풀어나올 거리가 없다.


"...그, 미니언 좋아해요?"
-어?


이 얘기가 아닌데.


"어... 아까 가져간 거, 그거 레고 미니언."
-이게 미니언이야?
"몰라요?"
-몰라. 들어만 봤어.
"그럼 왜 가져갔어요?"


이번엔 김민석 쪽이 한참 말이 없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방금 내가 한 질문이 무언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실마리가 될 것 같았다. 김민석 대답을 기다리며 나도 숨을 죽였다.


-그냥. 기념으로.


그 말이 내가 들은 김민석의 마지막 목소리다.

















김종대는 김민석이 출국하는 날, 김민석을 배웅 가겠다며 아침 일찍 일어나겠다더니, 그냥 김민석이 떠나기 전날 만나서 밥 한 끼만 먹고 돌아왔다. 애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눈물바람 불 것도 아닌데 어정쩡하게 공항 따라가서 뭐하겠냐며 둘이 대충 합의를 봤다고 했다. 나중에 카톡으로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원래 둘 사이가 이 모양이었다. 아마 김민석과 김종대는 이렇게 가늘고 길게 인연을 쭉 이어갈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이번엔 그 인연이 끊길 지도 모르겠다. 물리적 거리의 힘은 생각보다 크니까. 굳이 생사를 꼬박꼬박 열심히 챙기는 사이가 아니었다. 김종대 어깨 너머로 김민석을 만나던 나는 더더군다나 이제 만날 일이 없게 되었다.



"야, 김쪼닌."
"뭐."
"어제 김민석이 너 선물 주고 갔다."
"나?"


김민석이 출국하는 날, 아침잠에 눈도 못 뜨는 날 보던 김종대가 혀를 찼다.


"이게 뭐가 이쁘다고, 별..."


내 이마 위로 가벼운 상자가 올려졌다가 곧이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종대는 곧장 문을 닫고 나가고, 나는 눈을 겨우 떴다. 바닥에 굴러떨어진 상자는 나노 블럭이었다.




[내가 가져간 거.]



짤막한 메모가 상자에 적혀있었다. 나노 블럭은 김민석한테 내가 준 딱 그 미니언 모양이었다.


"일회용이라니까... 뭘 또 맞춰..."


상자를 책상 위에 올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가늘고 길던 내 첫사랑이 끝났다.














=

To. 카이의개님~><


150901 9월의 첫날
웬공님(@when_0_top)께 받은 선물 슈종슈카♡
성공하지도 못한 티켓팅해드렸다고 ㅠㅠ 받았다 ㅠㅠ 천사아니실까

WRITTEN BY
.ㅅ.
카이 종인 팬 블로그 프리뷰 저장 호모 좋아합니다

,

쓸꺼야 쓸꺼야 쓸꺼야 데뷔작이 일일찬카라서 부끄럽지만 쓰면서 늘어야지!


월간 찬카 주제

단어 1위 : 첫경험

문장 1위 : 다정이 나를 죽일 것 같았다.

단어 공동 2위 : 첫사랑 / 여름

문장 공동 2위 : 섹스요, 섹스 /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일일 찬카 주제

chankai.egloos.com

메일 : monthlyck@gmail.com


Day-1. [깜찍한 상상] 깜찍한 상상들 지겨워요. 우린 그냥 하나의 소문일 뿐인데요, 뭘.

Day-2. [눈 내리는 밤]눈이 많이 내리는 저녁이었다. / 두 사람은 다 정하고, 두사람은 충분하다. /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Day-3. [잘 지내나요]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Day-4. [마음은 바람보다]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Day-5. [선배는] 나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선배는, 그림자도 참 잘생겼네요."

Day-6. [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 옛일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Day-7. [성인] 성인이 된 걸 축하해.

Day-8. [어느날] 어느 날 나는 나의 영혼을 견딜 수 없었다. / 그 아이가 너무 좋았다.

Day-9. [친구라도]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Day-10. [악의 평범성] / 너에게로 향하는 눈빛 자주 사람들에게도 들킨다.

Day-11. 전날 아침 30살 학원강사 찬열은 17살짜리 수강생 종인을 껴안고 학원 소파에 잠들어 있다가 학생들에게 발견돼 학원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그날 밤 친구와 술을 많이 마셨다.

Day-12. [너를 만난 날] 너를 만난 날부터 그리움이 생겼다.

'개의 취향 > KAI BOTTO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수 캐해석  (0) 2015.10.23
[슈종] 형 친구  (0) 2015.09.02
일일찬카 월간찬카 Day3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0) 2014.06.19
[세종백도열준] My Chemical Romance  (0) 2014.04.07
First  (0) 2014.04.06

WRITTEN BY
.ㅅ.
카이 종인 팬 블로그 프리뷰 저장 호모 좋아합니다

,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종인은 펜을 내려놓았다. 단순히 펜을 들고 마음을 적어 내려가기엔 종인의 마음이 너무 커서 였던 걸까. 펜을 내려놓은 뒤에도 한 동안 편지지만 바라보던 종인이었다.
한해 한해 지나갈때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는게 힘들어졌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로 인해 겪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했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죽도록 미워했다. 두 사람의 끝은 너무 명확하게 보였다.

찬열은 세상에서 온갖 다정함을 지니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곤 했다. 본질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과해보이기도 했다. 종인에게 그런 찬열은 신기하지만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물론 그런 둘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건 물흐르듯 당연한 결과였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지 못하는 종인과 갖고 있는 모든 호의를 줄 수 있는 찬열. 이러한 관계가 둘의 시작과 끝을 함께 가져다 준 것이 아닐까.

종인은 잘 지내지 못한다.

http://chankai.egloos.com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중에 존잘되면 봐야지 ㅎㅎ..... 내 두번째 글

'개의 취향 > KAI BOTTO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수 캐해석  (0) 2015.10.23
[슈종] 형 친구  (0) 2015.09.02
월간찬카 / 일일찬카 주제  (0) 2014.06.27
[세종백도열준] My Chemical Romance  (0) 2014.04.07
First  (0) 2014.04.06

WRITTEN BY
.ㅅ.
카이 종인 팬 블로그 프리뷰 저장 호모 좋아합니다

,



  Written by. R
  (http://exosehun.dothome.co.kr)








01.

그래. 너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My Chemical Romance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진한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한기가 느껴지는 서늘한 눈매에 눈동자가 검고 깊었다. 손에 들려있던 펜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순간이었다. 종인은 그제야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맞닿았던 시선이 저를 피해 바닥으로 떨어진 펜을 향하는 것도 순간이었다. 종인은 약간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펜은 종인의 발치에서 한참 떨어져 이미 저만치까지 굴러가있었다. 이따 주워야겠다. 속으로만 생각해본다. 고개를 돌리려는데 저쪽에서는 여상한 표정으로 빤히 종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궁하는 듯한 눈빛.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거 쓸래?

종인은 무안함을 숨기려 눈을 피하며 A4용지를 성의 없이 내밀었다. 입만 움직여 소리 없이 말했다. 종잇장이 힘없이 팔락였다. 내밀어진 것을 한참이고 내려 본다. 그만하고 받던지 돌려주던지 했으면 좋겠는데.. 싶을 때쯤 종이를 받아들었다. 종잇장이 제 손을 떠남과 동시에 종인은 흘긋 앞을 돌아보았다. 나이와 함께 여유만 붙었다는 노교수는 느릿느릿 판서를 하고 있었다. 하얗게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에 먼지가 잔뜩이었다. 다시 뒤를 보았다. 별 것 없는 공지를 다 읽고 있었는지 그제야 쓱쓱 빠르게 이름을 쓴다. 종인은 가만히 그 숙인 정수리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내밀어질 차례만 남은 종잇장의 끄트머리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낙서가 지저분한 책상. 다르게 말하자면 그 부근의 손. 그러나 곧, 멍한 시선을 깨우기라도 할 참인지 손이 책상을 떠났다. 저쪽은 이미 이름을 쓴 펜을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팔을 쭉 뻗고 있었다. 뭔가 했더니 주워드는 것은 종인이 떨어뜨린 펜이다. 종인이 민망해할 새도 없이 여상한 얼굴로 펜과 종이를 같이 내민다. 여전히, 서늘한 눈빛.

고마워. 

소리 없이 입만 우물거리자 고개만 한 번 대강 끄덕이고는 종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바로잡는다. 그리고는 이름을 썼던 펜을 다시 들고는 빠르게 손을 움직인다. 종인은 건네받은 종이를 다시 한 번 본다. 이공대학 발대식 참가인원 명단. 말이 좋아 발대식 참가지, 그냥 그걸 구실로 출석 인정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몇 줄 안 되는 전달사항과 아래로 학번과 이름을 쓴 표가 다음 장까지 넘어가 있었다. 다음 수업에 제출할 명단인데 태형이 과대씩이나 맡는 바람에 옆에 두게 된 것이었다. 종인은 제 이름 아래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 아무렇게나 날려 쓴 글씨로 오세훈이라고 적혀있었다. 오세훈. 종인은 한 번 속으로만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드리워진 블라인드 사이로 창밖을 보았다. 아직 날씨는 추웠지만 햇살이 선했다. 종인은 그제야 앞을 바로 본다. 어느새 칠판에 빼곡한 글씨가 반쯤 들어차있었다. 저걸 언제 다 받아써.. 종인이 옆을 흘긋 보지만 태형은 이미 턱을 괸 채 꾸벅꾸벅 졸고 있다. 별 방법이 없어 펜을 다잡고 손을 빨리 움직이기로 한다. 








학생회관 식당은 항상 사람이 들끓었다. 맛은 좀 떨어져도 빨리 먹고 치우자는 생각에 일부러 공학관 식당으로 온 건데, 이쪽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피크 타임에 딱 맞물려 있어서 그런가 싶지만 이건 좀 심했다. 한참이고 남는 자리가 있나 하고 둘러보고서야 빈자리를 발견했다. 다닥다닥 사람이 붙어 앉은 틈에 식판을 내려놓자 낯선 듯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오세훈. 
종인은 날려쓴 글자들을 떠올렸다. 모르는 이름도, 얼굴도 아닌데 새삼스러웠다. 종인은 약간 얼빠진 얼굴로 세훈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약간 긴 듯한 암갈색의 머리카락이 단정한 모양새로 가라앉아 있었다. 세훈의 앞에 앉은 사람까지 넘겨보았지만 모르는 얼굴이었다. 

“김종인.”
“어? 어…….”
“정신 차려. 우리 삼십분까지 R관까지 가야돼. 빨리 먹고 가게.”
“어. 몇 신데?”

태형은 고개를 들고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흘긋 보았다. 오 분, 하고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에 쫓기는 건 아무래도 싫었다. 종인은 원래 좀 느긋한 성격이었다. 묵묵히 숟가락을 들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밥을 입에 퍼넣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태형은 밥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숟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해도 너무 하다. 다음엔 그냥 학관 가자.”
“어.”

듣는 둥 마는 둥 반찬을 집는 종인의 목소리가 무심했다. 







공대임에도 상대적으로 여자가 적지는 않은 과였다. (물론 상대적이다) 이번 신입생 비율이 더 그렇다고 들은 것도 같았다. 성비가 제법 균등해져서 그런지, 끼리끼리 붙어노는 게 유난했다. 학기 초라 더 심한가. 어쨌거나 오티 차량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던 태형과 그럭저럭하게 가까워진 종인 역시 그 외에는 그렇다 할 만한 친구가 없긴 했다. 

그래도 다른 애들은 다 저희네들끼리 다니면서도 동기들과 사이가 나쁘거나 하진 않았고, 외려 몰려다니면 또 그 나름대로 신나는 게 있었다. 그런데 오세훈은 아니었다. 항상 혼자였다. 오티도 안 왔고, 신환회도 왔는 지 안 왔는 지 모르지만 아마 왔다고해도 대강 자리나 채우다가 가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기억에 안 남아있는 거겠지. 어느 집단에 제 이름을 올리고 소속되는 것을 꺼리는 부류같았다. 그렇다고 존재감이 흐린 것도 아닌데.. 세훈에게는 정체 모를 외로운 냄새가 있었다. 

그래서 아까, 제 이름 석 자를 쓴 것만으로도.. 세훈은 굉장히 의외의 존재가 되었다.  

세훈. 오세훈. 







교수가 28, 9분부터 들어와 있다가 30분이 되자마자 출석을 부르는 수업이었다. 교양 주제에 더럽게도 까탈스러운데다, 행사가 잦은 학기 초라서인지 더 유난했다. 태형은 출석을 부르기 전에 잽싸게 나가서 명단을 제출하고 무어라고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종인은 나가기 좋게 맨 뒷자리 구석에서 가방조차 내려놓지 않고 앉아있었다. 무료한 시선으로 강의실을 둘러보는데 이제는 좀 눈에 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또 오세훈이다. 한 번 보이면 자꾸 보인다더니. 그보다 쟨 왜 여기 있지.. 종인은 생각했다. 명단에 이름을 적어 넣은 사람들은 모르긴 몰라도 저들끼리 어디 가서 당구라도 치고 있었을 터였다. 듣기로 발대식은 다섯 시부터라고 했다. 애당초 그러자고 그럴싸한 이름까지 붙여 넣고 명단을 돌린 게 아니었나. 

태형은 그새 설명을 마쳤는지 인사를 꾸벅 하고는 앞문으로 나가버렸다. 이제 출석을 부를 것이다. 종인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뒷문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만일 것을, 자꾸 저 뒤통수가 남는다. 종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걸어가 세훈의 등을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꼿꼿한 등을 하고 앉아있던 세훈이 고개를 휙 돌려 종인을 올려본다. 

“안 나가?”

종인의 말에 세훈은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종인을 올려보기만 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건가. 종인은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가 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아까 명단 썼잖아.”

세훈은 종인의 말을 듣고도 잠시 저를 올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책상에 올려놓은 교재나 필기구 따위를 갈무리했다. 교수는 이미 가래 낀 침침한 목소리로 출석을 부르고 있었다. 종인은 세훈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고는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어깨를 두드렸던 손끝이 어색해 종인은 몇 번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등을 쭉 펴고 앉은 뒷모습이 단정했었다. 








구실이 생겨 수업을 제끼기는 했는데 당연하게도 붕 뜬 시간을 처리할 길은 없었다. 피씨방 가자. 뭐 하러. 뭐 일 있어야 가냐. 하긴.. 종인은 사실 피씨방을 좋아하지 않았다. 담배도 안 피우고 게임도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뭘 시켜도 곧잘 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태형은 그런 종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늘상 피씨방이었다. 벌써 몇 번 왔는지 셀 수도 없는 후문 쪽 피씨방은 담배연기가 매캐하고 화장실이 후졌으나 요금이 쌌다. 이미 옷에 밴 담배 냄새가 싫었으나 내색은 안했다. 종인은 가만히 입 안의 목캔디를 굴리며 마우스 컨트롤을 한다. 날도 덜 풀렸는데 황사가 기승이었다.  

“야. 나 가봐야겠다.”
“왜?”
“정유진이 부르네.”

게임하는 내내 핸드폰에서 눈을 뗄 줄 모르던 태형이 불쑥 말했다. 부과대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태형은 귀찮은 듯 인상을 찡그렸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내심 마음이 있다는 거, 당사자들 빼고는 다 안다. 종인은 귀찮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게임 화면을 종료했다.

“너도 가게?”
“어. 머리 아파.”
“발대식 올 거지? 그때까지 뭐 하게?”

종인은 흘긋 종료되기 직전의 모니터 하단을 보았다. 아직 다섯 시까지는 멀었다. 

“기숙사 가있던가 하지, 뭐.”
“너 이 새끼 그러다가 또 존나 자는 거 아니냐?”
“안 자..”

피곤한 듯 웃고 말았다. 언젠가 한 번 한밤중에 술 먹게 나오라는 메시지를 무시하고 잤더니 그 이후로는 무슨 일만 생기면 저랬다. 지하철 노선도로 치자면 집에서 정반대 방향에 학교가 있어 기숙사에 들어왔는데 그게 화근일 줄은 몰랐다. 학교 근처 사는 것이 만만해서 그런 건지, 과 선배, 동기들은 걸핏하면 나와라, 술 먹자를 주문처럼 외쳐댔다. 어쩐지 1학년엔 기숙사를 쓰겠다는 말에 종인의 형은 뭔가 알 듯 말 듯 하게 웃었더랬다. 







“종인아.”
“형.”

태형과 헤어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종인은 제 형을 만났다. 준면은 늘 그렇듯 해끔한 얼굴이었지만 저를 앞에 두고도 피곤을 감출 수 없는지 하품을 크게 했다. 입을 가린 손등이 희었다. 준면은 졸업반인 주제에 학회장씩이나 하느라 하루 집, 하루 학교 꼴로 외박을 자주 했다. 가족인데다 같은 학교까지 다니는데도 얼굴 보기가 영 힘든 것은 그 탓도 있었다. 종인은 하품을 하는 준면의 얼굴을 다소 안쓰럽게 보았다.

“집에는 들어가?”
“어. 근데 어제는 못 갔네. 어디 가?”
“기숙사.”
“지금이 몇 신데. 넌 뭐 친구도 없냐.”

준면이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생각없이 한 말이겠지만, 종인은 여기서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건지 같이 웃어야 하는 건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푹 웃었다.

“밥은 먹었고?”
“응. 형은?”
“나야 뭐…….”

말끝을 뭉개는 것은 준면의 나쁜 버릇이었지만 종인은 굳이 꼬집지는 않았다. 준면의 어깨 너머로 품이 큰 카키색 야상 점퍼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누군가가 보였다. 종인도 키가 꽤나 큰 편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크고, 내리깐 눈도 크고.. 뭐든 커보이는 외모가 드라마틱하기까지 했다. 좀 유치하지만 혼자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종인은 흘긋 그를 넘겨보다가 준면에게 눈짓을 했다.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어, 가야지.”
“얼른 가.”
“어어, 주말에 집 올 거지?”
“어.”
“그래. 먼저 간다.”

준면이 씩 웃고는 먼저 등을 보였다. 멀뚱히 서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팔을 가볍게 툭툭 친다. 형, 누구예요? 동생. 목소리가 작아질 만큼의 거리가 확보되었다. 키가 큰 그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내리깔고 있을 때도 느꼈지만 눈이 몹시 컸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바람을 맞아 흐트러졌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앞머리칼을 털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타인의 입을 통해 걸러지는 가족의 존재는 몹시 묘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종인은 느리게 걸으면서 파안하는 형의 옆얼굴을 보았다. 약간 외로운 것도 같았다. 







그대로 기숙사에 들어가기 꺼려진다고 생각한 것은 순간이었다. 진로를 틀었다. 귀에 대충 끼워놓은 이어폰에서는 무작위로 다운받은 팝이 재생되고 있었다. 봄이 오기는 하는 지, 해가 제법 따뜻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가급적이면 모르는 길로 가보자, 싶었는데 또 걷다보니 익숙한 길만 찾아가고 있었다. 중간에 매점이 보이기에 들어가 우유를 샀다. 단지 모양의 바나나우유를 쭉쭉 빨았다. 입안이 달고 시원했다. 뜨뜻한 햇살에 바람은 휙휙 부는 희한한 날씨였다. 이번 주 내내 그랬다. 다음 주는 좀 낫다고 지나가는 뉴스에서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오세훈을 만났다.

아.
오늘따라 자주 본다. 한 번 의식을 하고 나서 그런가. 피할 수도 없게 눈이 마주쳤다. 바로 닿는 시선이 약간 민망해 종인은 저도 모르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

말을 뱉어냄과 동시에 종인은 약간 후회했다. 안녕을 말하는 두 음절의 말이 몹시 멍청하게 들렸다. 이상하게 생각하려나.. 찰나의 고민을 깨고 세훈이 인사를 받았다.

“어, 안녕.”

억양도 없는 무미한 인사였다. 놀라거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한 여상한 표정. 인사를 하고는 손에 들린 아이스 커피를 한 번 쭉 빠는 세훈. 종인은 뭔가 더 말해야 하나를 고민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세훈이 먼저 말을 붙여왔다.

“어디가?”

한국말이라는 거 좀 아리송하구나. 어디에 가는지를 묻는지, 갈 곳이 있는 지를 묻는지 종인은 온전히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답을 얼버무렸다.

“그냥.”

세훈은 눈을 피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종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이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위압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에 든 바나나우유가 약간 민망해졌다. 종인은 부러 눈을 내리깔았다 뜨며 반쯤은 의무감으로 물었다.

“너는?”
“나도, 그냥.”







그냥에 그냥이 더해져 같이 걸었다. 할 일이 없어 걷는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였던지 루트가 비슷했다. 먼저 걸음을 맞춘 것은 종인 쪽이었다. 종인도 원래 타인에게 살가운 편은 못 되었는데, 세훈은 어쩐지 그런 부분은 저랑 비슷하면서도 저보다 심한 것 같았다. 낯을 가리나. 그런 것치고는 제법.. 종인이 끼고 있던 이어폰 한 쪽을 내밀자 한 번 쓱 쳐다보고는 말없이 받아 제 귀에 끼웠다. 말은 없는데 편했다. 걷다보니 시간이 그럭저럭 흘렀다. 물이 거의 녹색인 호수를 끼고 돌아 대운동장까지 와서야 계단에 주저앉았다.

“이따 발대식 갈 거지?”

그 말에 세훈은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종인을 본다. 내 말이 어렵나.. 빤히 맞부딪쳐오는 눈빛이 너무 차서 오히려 사람을 태울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종인은 생각해본다. 좀체 움직이지 않는 작은 입술. 종인은 내색은 안하지만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이름 썼잖아.”

그제야 세훈이 아, 한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 종인은 굳이 추궁하지 않는다. 

“점심은 먹었어?”
“어.”

뱉고 나서 또 후회했다. 아무리 소재가 없다지만 시간이 몇 신데 밥 타령.. 슬쩍 눈을 깔고 시간을 한 번 보았다. 네 시가 조금 덜 된 시간. 그런 종인에게 세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너 아까 봤는데.”

세훈이 앞을 바라본 채로 남은 커피를 쭉 빨았다. 다각거리며 얼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운동장에는 개발로 열심히 공을 차는 사람이 잔뜩이었다. 종인은 다소 얼빠진 얼굴로 세훈을 본다. 그러자 세훈 역시 고개를 돌려 종인을 보며 웃을 듯 말 듯 한 엷은 표정을 했다.

“공학관 식당에서 박태형이랑.”
“어…….”
“달다.”

세훈은 쭉쭉 빨던 커피를 다 마셨는지 빈 잔을 한 번 짤랑 흔들었다. 다 먹은 커피잔을 들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종인의 앞에 불쑥 손을 내밀었다. 종인은 잠시 그 가늘고 긴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단정하게 깎인 손톱 끝을 보다가 제 손에 빈 우유통이 들린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건네주자 세훈이 가볍게 받아들고는 저쪽에 있는 쓰레기통까지 가서 쓰레기를 버린다. 종인은 그 휘청하게 마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납작하니 말랐는데 어깨가 단단하다. 세훈이 돌아와서 다시금 풀썩 앉았다. 바람이 일었다. 누런 모래먼지. 새파란 소나무들이 저들끼리 스산한 소리를 냈다. 종인은 약간 인상을 쓰다가 가방 앞주머니를 뒤져 목캔디를 꺼냈다.

“자.”

다행히도 세훈이 빠르게 받아들고는 말없이 종이포장을 벗겨냈다. 입에 쑥 밀어 넣고는 혀를 굴리는 것까지 본 종인이 제 입에도 목캔디를 까 넣었다.  

“과실 갈까. 춥다.”

종인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세훈이 일어났다. 









02.




어쩌다 이렇게 됐지.

생각보다 술이 많이 들어갔다. 어떻게 된 게, 사람 배는 이만한데 술이 저렇게 술술 들어가.. 알콜 수치가 도를 넘었는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이 와중에 드는 생각은 이대로 기숙사 들어가 봐야 폐만 끼치겠다는 거였다. 막차를 타건 택시를 타건, 하다못해 형한테 연락을 하건. 여하간 기숙사는 안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쥐었다. 손에 힘이 빠져 핸드폰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ㅂㅎ까지 검색하자 변백현 이름 석 자가 떴다. 종인의 룸메이트 형 이름이었다.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다시 한 번 이름을 확인했다.

뚜르르 하는 신호대기음 대신 이름 모를 걸그룹 노래가 컬러링으로 울렸다. 종인은 도통 그런 데 관심이 없었으므로 컬러링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여보세요. 카랑카랑한 백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어, 왜.”

종인의 과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백현은 진짜 술판에 끼어 있다가 전화를 받은 건지 주변이 몹시 시끄러웠다. 고막을 터트릴 기세로 음악을 틀어주는 바의 스피커 옆자리에라도 앉은 것처럼. 종인은 인상을 약간 찡그렸다. 입에서 더운 숨이 퍼졌다.

“저 오늘 기숙사 못 들어가요. 외박일지 좀 써주세요.”
“야. 어차피 나도 못 들어가. 너 화공이었지? 발대식?”
“네.”
“층장한테 말해놨어. 발대식 있으니까 우리 방은 돌지 말라고. 근데 많이 마셨냐? 왜 자꾸 혀가 꼬부라져?”
“어.. 좀, 마셨어요.”

백현은 잠깐 쯧, 하고 혀를 찼다. 

“어차피 D관 아니냐? 잠깐 나와 봐.”
“왜요?”
“상태 좀 보게.”
“괜찮은데.”
“니 핑계로 나도 좀 자리 좀 뜨게 그런다. 한 잔만 더 들어가면 그대로 토할 거 같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현이 씨발, 하고 덧붙였다. 찰진 욕설에 종인의 입에서 비실비실한 웃음이 샜다. 종인은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제 룸메이트를 꽤나 좋아했다. 

“어디로 갈까요?”
“1층으로 와.”
“네.”

착하게 대답하자 전화가 곧장, 뚝 끊겼다.







“아씨발, 막걸리 쉰내 쩔어.”

과잠 차림의 백현은 계단 아래서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아예 풀썩 주저 앉아있었다. 종인을 보자마자 대뜸 욕을 뱉는 백현의 얼굴은 그래도 나름 해끔하니 맑았다. 

“형 많이 마신 거 맞아요?”
“몰라 씨발, 짬이 있지. 사람을 이렇게 먹여. 오줌까지 소주로 나오겠다.”

종인은 가만히 백현을 내려다보았다. 위층들의 소란과 달리 적막감마저 감도는 1층은 등마저 나간 데가 많아 약간 으스스했다. 푸르스름한 빛 속에서 보는 백현의 갸름한 얼굴이나 눈매가 약간 낯설었다. 종인은 백현의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우린 소주 안 주던데.”
“신입생 주제에 소주는 무슨.”

그러고 보니 한 구석에서 예비역들끼리 모여서 맥주 피쳐나 소주병 같은 걸 깠던 것도 같다. 종인은 관자놀이를 슬쩍 긁어내렸다. 

“그래도 형 보니까 정신 좀 드는 것 같은데.”
“꼬인 혀나 풀고 말해.”

백현은 어디서 났는지 먹다 만 500ml 짜리 생수를 내밀었다. 

“이거 먹고 그, 막걸리 처먹은거 다 싸버려. 냄새 개쩌니까.”

종인은 뭐라 대꾸해보려 입술만 달싹이다 결국 착하게 생수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꿀꺽꿀꺽 삼킨다. 안주랍시고 주워 먹은 허접한 편육 같은 게 좀 짰나. 물이 술술 넘어갔다.

“야, 김종인. 너 농땡이 부린다고 태형이한테 다 일러준다?”

저쪽에서 취기가 묻은 소프라노 음성이 울렸다. 복도의 벽에 부딪힌 목소리가 왕왕 울린다. 소리가 난 쪽으로 종인과 백현이 동시에 시선을 주자 뭐가 그렇게 웃긴지 저들끼리 킥킥대며 웃고는 엘리베이터에 쏙 올라탄다.

“너네 과 애들이냐?”
“네.”
“예쁘네.”
“그래요?”
“어. 담에 소개 좀 시켜줘 봐. 오른쪽 애로다가.”

백현이 눈을 찡긋거렸다. 선하게 처진 눈이 휘었다. 눈웃음이 답지 않게 귀엽기까지 했다.

“근데 쟤네도 어지간히 먹었나봐. 다리 풀린 거 봤냐. 저러다 팬티까지 다 보여주고 자빠지겠네.”

귀엽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비웃음을 담은 말이 이어졌다. 방금 예쁘네 어쩌네 하며 마음에 들어 한 것치고는 가차 없는 평가에 종인은 또 푹 웃었다.

“너 진짜 맛이 가긴 갔구나. 뭐가 그렇게 재밌냐.”
“그냥요.”
“실없네. 오늘 안 들어갈 거고?”
“네. 그럴 거 같은데.”
“어엉.”

종인이 반쯤 졸린 눈으로 그러자 백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핸드폰을 열심히 만지작거린다. 힘을 주어 한 일자로 만든 입술로 핸드폰을 좀 만지더니 곧 몸을 일으킨다. 

“어어, 지금 안 들어가면 존나 깨지겠는데. 형 간다.”

그리고는 인사도 안 듣고 뒤도 안돌아보고 계단을 두 칸씩 휙휙 뛰어올라간다. 종인은 그런 백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다시 술판으로 복귀하려다가 예비역 선배 하나를 에워싼 동기 여자애들 한 무리와 마주쳤다. 김종인, 선배가 아이스크림 사준대. 너도 가자. 뭐라 할 새도 없이 붙임성 좋게 팔짱을 낀 동기 여자애는 작은 체구에 안 어울리게 힘이 좋았다. 알콜 파워인가. 종인은 어영부영 끌려가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고 D관으로 돌아왔다. 같이 편의점까지 갔던 무리는 오는 길에 저희네들끼리 자리를 잡고 앉아 까륵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종인은 혼자였다. D관까지 오기는 했는데 어쩐지 다시 들어가기 싫어졌다. 종인은 5층 옥상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밤이라 그런지 약간 쌀쌀했다. 빈 손 하나가 주머니를 비집고 들어갔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옥상 유리문이 열렸다. 세훈이었다. 

과실도 잘 따라오더니 발대식까지 끌려왔다. 끌려왔다는 표현이 맞나.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401호로 오라는 태형의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세훈이 저는 집에 간다고 할 줄 알았다. 순순히 종인을 따라오는 그 차분한 걸음이 물론 싫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자주 본다.

담배라도 피울 참인가. 사실 4층에 흡연구역도 있었지만 그 쪽은 이미 복학생 선배들이 점령했을 터였다. 이래저래 짬이 딸리면 몸이 고생한다. 종인은 세훈을 빤히 쳐다보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달큼한 바닐라맛. 종인을 보고 놀란 것은 세훈도 마찬가지인지 잠깐 주춤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세훈은 문가에 서서 몇 초간 벤치에 앉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이 약간 풀려있는 것도 같았다. 종인은 일어나긴 싫고 괜히 무안해져서 물었다.

“먹을래?”

그러자 세훈이 느릿하게 걸어와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틀고는 종인을 빤히, 정말 빤히 쳐다보았다. 민망할 정도로. 

“왜?”
“준다며.”
“너 취했어?”

그러자 세훈이 아주 작게 웃는다.

“왜?”

종인은 제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한 번 흘긋 보고는 세훈을 보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저를 빤히 쳐다본다. 얜 누구든 이렇게 무안하게 볼까. 종인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세훈의 입가에 대주었다. 다물린 작은 입술이 꼭.. 여자애마냥 색이 선명했다. 어둠 속에서 봐도 섬세한 곡선이었다. 세훈이 픽 웃고는 내밀어진 아이스크림을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종인은 눈을 내리깐 채로 윗입술을 핥는 세훈의 얼굴과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보았다. 곧 끈적해질 텐데. 종인은 이걸 버려야하나 고민하다가 저도 한 입 더 먹었다.

“더 먹을래?”
“아니.”
“응.”

종인은 이미 손으로 타고 내려오는 녹은 아이스크림을 미련 없이 던졌다. 쓰레기통에 오차 없이 들어간다. 아. 그러고 보니 나온 지 한참 지난 것 같다. 종인은 핸드폰을 한 번 꺼내본다. 태형에게서만 카톡이 열 개는 와있었다. 야 어디야. 어디냐고. 기숙사냐? 행로를 묻는 비슷비슷한 내용에 마지막은 연락해라, 로 장식되어 있었다. 종인은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나 들어갈 건데. 넌?”
“먼저 들어가.”
“응.”

옥상 문을 열고 나갔다. 담백한 말에 약간은 모를 행동들. 어쩐지 세훈이 제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을까봐 돌아보지는 못했다. 종인은 401호로 돌아가자마자 태형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았다. 종인이 억하고 소리를 냈다. 간신히 정신이 좀 맑아졌다 했더니 옷자락을 잡힌 채로 끌어 앉혀졌다. 주는 대로 받아먹어. 태형은 속삭이듯 종인에게 말했다. 정신 나간 기집애들이 무더기로 없어졌다며, 선배들이 제대로 빡쳤다고, 태형은 종인의 귀에 대고 빠르게 읊어냈다. 과대인 태형이 이리저리 많이 치인 모양이었다. 결국 얼굴도 모르는 선배들뿐인 자리에 앉혀진 종인은 어설프게 웃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라고 하니 말대로 주는 대로 얌전히 받아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리셋.

정신을 잃었는지 잠이 들었는지는 모르는데 필름이 끊긴 것은 확실했다. 기억이 한 뭉텅 잘라낸 것처럼 깜깜하게 단절되었다. 마지막으로 잡혀간 자리가 지난 해 부학이었다는 괄괄한 여선배의 옆이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막걸리 질리지? 하고 소맥을 신나게 말아주던 것까지도 흐리게 떠올랐다. 종인은 원래 술이 별로 세지도 않았고, 이 술 저 술 종목 섞어가며 마시는 것에는 영 젬병이었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는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낯선 곳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집 침대도, 기숙사 침대도 이런 느낌이 아닌 건 분명했다. 눈을 몇 번 깜빡여보았다. 처음 보는 천장. 잠깐 모텔인가 싶었는데 모텔 특유의 어둡고 불그스름한 기운이 전혀 없는, 환하고 평범한 벽지가 발려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을 때, 천장이 매우 가깝게 와있다는 걸 알았다. 종인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알았다. 복층식 원룸. 생활 냄새가 도무지 안 나는 방. 저는 분명 누군가의 집에 와 있었다. 난간으로 머리를 쭉 빼고 아래를 보고 집 주인을 확인했을 때 종인은 머리가 멍해졌다.

“일찍 일어났네.”

멍하게 아래를 내려 보고 있는 종인을 향해, 세훈이 고개만 슬쩍 돌려서 말했다. 방금 막 세수라도 하고 나온 건지, 수건을 쥐고 있다. 세훈은 대답 없는 종인에게서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물에 약간 젖은 앞머리칼을 툭툭 털어내는 손짓이 건성이었다. 밀랍처럼 새하얀 얼굴은 어딘지 비현실적이었다. 종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천장에 머리를 박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나무로 된 계단은 삐걱삐걱하고 걸음 자국을 요란하게 남겼다. 종인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 지 몰라 고민하는 찰나, 세훈이 무심히 물었다.

“10시에 수업 있지 않아?”
“어? 어.”
“지금 9시 넘었는데.”

헐. 종인의 눈에 드러난 당황스러운 기색을 읽었는지 세훈이 덧붙였다.

“여기서 D관 10분이면 가.”

그리고는 팔을 쭉 뻗어 찬장을 열더니 뭔가를 뚝 끊어서 내민다. 뭔가 했는데 포장 안 뜯은 새 칫솔이었다. 종인이 약간의 텀을 두고 칫솔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어물거리다가 내뱉자 세훈이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종인이 화장실로 가며 받아든 칫솔 포장을 뜯었다. 종인의 등에 대고 세훈이 툭 내뱉었다.  

“걱정 마. 너 어제 실수 안 했어.”








말대로 세훈의 원룸은 D관까지 10분 안에 도착할 거리에 있었다. 어제 입은 옷 그대로 주워 입는 게 좀 찝찝했다. 수업 끝나자마자 기숙사로 가야겠다고 종인은 생각했다. 세훈은 딱 필요한 말만 했다. 다 했어? 가자. 그 언어에 낭비라는 것이 없었다. 종인도 별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므로 침묵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김종인! 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돌아보자 태형이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종인의 옆에 서 있던 세훈은 사람들에 휩쓸려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종인은 그대로 서서 태형이 뛰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은 인내 없이 닫혔다. 

“미친놈아. 어제 어디 갔었어?”

곧 태형이 다가와 종인의 등을 팡 쳤다. 종인은 뒤늦게야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태형은 종인의 옷이 어제 입은 것과 같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뭐야. 너 어제 집 안 갔냐?”
“어.”
“그럼 어디 갔었어.”
“몰라.”

모른다는 대답이 시위 비슷한 불퉁함으로 들렸는지 태형은 길게 묻지 않았다. 더 추궁했더라도 오세훈 집에 갔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을 거다. 태형이 모르는 것을 보면 뭔가 잘라먹은 기억 속에 이상한 덩어리가 엉겨 있을 것이었다. 생각하기 싫다. 느지막히 숙취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강의실에 들어가자 전날의 여파로 다들 피곤에 쩔어있었다. 뒷자리부터 빼곡히 채워진 강의실에서 태형은 용케 자리를 잘 잡았다. 그 와중에 정유진이 태형에게 따뜻한 기운이 남아있는 꿀물 음료수를 주고 갔다. 종인이 묻기도 전에 앞서 태형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쟤랑 사귀기로 했어. 그러냐. 예상했던 바였다. 종인은 팔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파묻었다. 

말도 안 되게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아침이라 그런지, 교수의 목소리는 가래 끓는 쇳소리가 섞여 고장 난 라디오처럼 들렸다. 종인은 필수 과목이 아니었다면 절대 듣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거의 엎드린 채로 펜을 굴렸다. 가느다란 펜대가 종인의 손가락을 스치듯 유영했다. 고작 그 정도였다, 종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기만이란. 고등학교 자습시간에나 할 법한 짓으로 시간을 때우는 머리통들이 한참 뒤에 앉은 종인의 딴 짓을 잘 가려주고 있었다. 

종인은 가만히 어제의 일을 생각했다. 좀처럼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공강으로 뜨는 한 시간에 종인은 기숙사에 들어갔다. 생각 없이 불을 켰는데 백현이 있었다. 이불을 둘둘 감고 등을 만 채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종인은 불을 끄고 커튼을 쳐주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밥을 먹었다. 백현을 깨울까도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푸석한 밥은 꼭 모래알 같았다. 대충 치우고 일어서서 시간을 보는데 진동이 덜덜 울렸다. 저 하고 싶은 말만 와르르 쏟아낸 태형의 메시지였다. 수업 못 들어가니까 혼자 가라는 내용이었다. 종인은 어제 사귀기로 했다는 부과대의 얼굴을 떠올렸다. 밍숭맹숭한 허연 얼굴은 잘 그려지지 않아, 기억을 더듬는 것도 그만두었다. 수업도 제낀다더니 과연 날이 따뜻했다. 

볕 잘 드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가 깨니 대뜸 조별과제를 시킨다. 십 분 줄 테니까 세 명씩 알아서 조를 짜라고 하고는 교수는 나가버렸다. 종인은 조금 난감해졌다. 이 수업은 애초에 같은 과도 별로 없고 태형마저 없으니 오지랖 부려줄 누군가도 없는 것이다. 종인은 잠시 곤란한 표정으로 제 앞에 앉은 머리통들을 둘러보다가 이내 무안한 고갯짓도 멈춰버렸다.

어차피 인원은 정해져있으니까 인원 비는 조 아무데나 들어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속은 좀 쓰려도 편해졌다. 교수 올 때까지 가만히 입이나 닫고 있을 요량이었다. 게임이라도 하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낸 순간, 뒤에서 등을 쿡쿡 찔러왔다. 휙 돌아보자 한 번쯤 본 적 있는 얼굴이 종인을 보고 있었다.

“준면이형 동생 맞죠?”

목소리가 무지 낮고, 떨어질 듯 크고 동그란 눈으로 저를 보는 이 사람은 아마 형 친구 내지는 후배. 종인은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네, 하고 공손하고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제 옆의 빈자리에 가방까지 끌어다가 자리를 옮겨 앉으며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준면이형 후배 박찬열이요. 이거 혼자 들어요?”
“친구가 같이 듣는데 안 왔어요.”
“조 아직 안 짰겠네. 괜찮으면 같이 해요. 안 온 친구 껴서 해도 괜찮고.”

사교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을 것 같은 매끈한 얼굴로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찬열을, 종인은 조금 낯설게 보았다. 찰나의 침묵에 찬열이 씩 웃으며 고개를 꺾었다. 잘 손질된 갈색 머리카락이 고개가 틀어지는 방향대로 흔들렸다. 휘어지는 눈매가 선했다. 

“싫으면 말구요.”
“아, 그런 거 아닌데요.”

종인이 어물거렸다.

“그럼 같이 해요. 안 온 친구 껴서 3인 1조?”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는 낯으로 동의를 구한다. 종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머뭇거림에는 가벼운 배신에 대한 부아가 섞여있었을 것이다. 종인은 그러다 문득 저 앞에 단정하게 앉은 꼿꼿한 등을 발견한다. 조교가 예제로 짠 시간표를 수정 없이 그대로 때려 박은 것이 자신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잠깐만요. 찬열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종인은 일어났다. 그리고는 세훈의 앞에 섰다. 세훈은 등을 반듯하게 펴고 앉은 주제에 내리깐 눈으로 아무 데나 시선을 꽂고 있었다. 

“오세훈.”

종인이 가서 이름을 부르자 세훈이 고개를 틀어 종인을 올려보았다. 흩어진 앞머리칼 사이로 뚜렷한 눈썹이 보였다. 인상이 유독 서늘해 보이는 데는 저 눈썹도 크게 한 몫 하겠다고 생각했다. 

“과제 같이 할래?”

세훈은 몇 번쯤 눈을 깜빡였다. 종인은 대답을 기다리며 세훈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았다. 명분이 있었으니 어렵지 않았다. 세훈은 눈썹이 짙고 속눈썹이 길었으며 입술이 예뻤다. 눈썹뼈가 도드라진 뾰족한 얼굴은 누굴 닮은 것도 같은데.. 이쯤 생각했을 때 세훈이 대답했다. 그래, 하고.  









03.




태형이 여자친구가 생기면서 종인이 혼자 앉아 수업을 듣는 일수가 점점 늘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만 교양교수가 화공 박태형 학교 다니는 것 맞냐고, 화공과 손 들어보라고 했을 때, 종인 본인에게 시선이 몰린 것이 싫었다. 걱정 반, 짜증 반으로 한 소리 했더니 돌아오는 것은 1학년 때나 이렇게 놀아보지 언제 놀아보겠냐는 것이었다. 바로 윗 학번 선배들이 형, 누나 인척 하겠다고 써먹는 레퍼토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독창성 없는 레퍼토리에 종인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 놀이라는 것이 꽃놀이 시즌이랑 맞물려서인지 태형은 거의 들어가는 수업이 없을 정도로 불성실해졌다. 그나마 전공은 출석은 중요했는지, 맨 뒷자리에 앉아 출석만 하고 둘이 맞잡은 손이나 주물대다가 나가버렸다. 그런 순간마다 종인이 가장 싫었던 것은 ‘너도 갈래?’ 하고 묻는 유진의 목소리였다. 곤란한 듯 웃는 태형도 짜증나긴 마찬가지였지만 묘한 연민과 우월감 섞인 그 소프라노 톤이 더 싫었다. 종인이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은 지 세 번쯤 되고 나니 더 이상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종인은 두 팔 안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준면은 이렇게 말했다.

“당연해.”

앞만 보고 운전을 하는 얼굴. 종인은 고개를 휙 돌려 준면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웃으면 살풋 접혀 다정해지는 커다란 눈이나 선한 입매. 저 하얀 얼굴이 문득 몹시 낯설었다. 종인은 제 형이 저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준면은 얄밉게 깔끔한 말투로 덧붙였다.

“학기 초에 붙어 다니는 애들이랑 떨어지는 거 흔한 일인데 뭐.”

분명 맞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종인은 저 다 알고 있다는 듯 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창밖만 본다. 준면이 힐끗, 말이 없어진 종인을 보았다. 그리고는 낮게 웃는다. 정문을 지난 차가 빈 길을 거침없이 달려 금세 기숙사 앞에 섰다. 몇 명의 사람들이 어두운 실루엣으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종인이 안전벨트를 푸는데 준면이 물었다. 

“근데 넌 여자친구 없냐?”
“어.”

종인의 뚱한 대답에 준면은 알 수 없는 얼굴로 웃으며 그러냐, 하고 말았다. 하얗고 예쁜 얼굴로 저 하고 싶은 말이라면 촌철살인으로 다 해버리는 게 제 형이었다. 더 있으면 무슨 말이 쏟아질 지 몰랐다. 갈게. 종인은 부루퉁한 얼굴로 뒷좌석에 던져둔 가방을 챙겨들고 문을 쾅 닫았다. 부러 크게 닫은 것이 맞다. 그러다 종인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차창이 쭉 내려간다.

“왜?”
“형, 집에 가?”
“아니. 친구 좀 만나고 가려고.”

친구 누구. 물을 새도 없이 간다, 하고 차창이 올라갔다. 어쩐지 데려다 준다고 선뜻 나선다 했다. 4학년인 주제에 버겁게 학회장씩이나 도맡는 바람에 준면은 좀체 쉴 틈이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침까지 거르고 침대에 푹 잠겨 자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잠이 잔뜩 묻은 얼굴로 피곤하다고 중얼거려 안쓰럽기까지 했었는데. 제 볼 일 때문이었구만. 종인은 짧게 혀를 찼다. 







백현은 왔던 것 같기는 한데 방에는 없었다. 큼지막하고 빵빵하게 꽉 찬 백팩만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석식 시간은 한참 넘겼는데 어쩐지 허기가 지는 느낌이 들어, 종인은 지갑을 챙겼다. 컵라면이라도 먹고 와야지 싶어 일부러 외진 구석에 있는 편의점을 찾았다. 많이 돌아서 걷는데 밤공기가 서늘했다. 편의점 문을 열자 앞치마를 두른 알바생이 졸다가 푸르르 깼다. 그 모습을 본 종인은 잠시 후회했다. 그렇지만 이왕 깨운 거 죄책감 갖지 않기로 했다. 혼자 앉아서 컵라면을 먹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다 먹고 편의점을 나왔는데 의외로 아는 얼굴을 만났다. 그러니까 또, 오세훈. 딱히 반갑지도 싫지도 않았지만 인사를 해야 하나 망설여지긴 했다. 그런데 뭐, 굳이 피할 이유도 없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목소리가 낮아 무심하게까지 들리는 종인의 인사에 세훈과 또 다른 누군가의 시선이 함께 따라붙었다. 어, 안녕. 세훈이 느릿하게 인사를 받았다. 세훈은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그보다 한참 작은 키에 눈동자가 새까맣고 컸다. 체구도 한참이나 작아 동생인가 싶어 내려 보지만 영 안 닮았다. 세훈은 그런 종인의 속을 읽은 듯 덧붙였다.

“사촌 형이야.”
“아. 안녕하세요.”
“얘는 김종인.”

종인이 뒤늦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세훈이 덤덤히 종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믿기지 않게도 형이라는 사람이 안 그래도 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 하고 저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한 템포 느리게 인사했다. 

“도경수요. 저도 이 학교 다녀요.”

아, 네. 종인은 대답과 동시에 조금 얼빠져보였겠다, 하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제 소개를 하는 차분한 목소리는 듣기 편안했다. 어설프게 웃어 보이는 얼굴은 아무리 봐도 형 같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동갑내기쯤으로 보이는 얼굴. 종인은 뚜렷하면서도 섬세한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잠에서 확 깨어나듯기억을  떠올렸다. 공학관 식당에서 같이 앉아있던 낯선 얼굴이 이 사람이구나, 하고. 종인이 약간 멍해있는 찰나에 경수는 세훈을 올려보며 말했다. 

“친구랑 놀아. 나 들어갈게.”
“아. 가게?”
“어. 간다.”

그리고는 종인 쪽으로 가볍게 목례를 까딱하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린다. 종인이 얼빠진 채로 뒤늦게 고개를 푹 숙였고 그 위로 세훈의 미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종인은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잠시 눈을 두었다. 어깨며 등이며 성인 남자라기엔 너무 작은데 이상하게도 존재감이 부풀어 오르는 듯 한 등이었다.

“뭐 사러 왔어?”

세훈이 뜬금없이 물었다. 종인이 말없이 세훈을 쳐다보았다. 세훈이 손을 들어 뒤 쪽의 편의점을 가리켰다. 가리키는 손짓이 몹시 건성이었다. 종인은 설명을 덧붙일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세훈은 금세 궁금증을 치워내고는 물어왔다.

“기숙사 가?”
“어.”
“데려다줄까?”
“어?”

종인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가 곧 후회했다. 세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한 건 아무래도 바보스러운 반응이었다. 종인은 한 번 가본 적 있는 세훈의 자취방을 떠올렸다. D관 근처 쪽문이면 확실히 기숙사를 가로질러 가는 게 빨랐다.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기분에 종인은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 별로 없어 사촌형 이야기를 물었더니 은근히 말이 길어졌다. 집이 멀어서 자취하는데, 학교 근처에 이모 댁이 있다고 했다. 말로 미루어보아 식사나 뭐 그런 귀찮은 부분은 그 쪽에서 해소하는 듯 싶었다. 종인은 가만히 응, 응 대답을 해주며 세훈의 목소리를 들었다. 조용한 목소리는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바람 소리처럼 스쳐갈 것 같았다. 그만큼 조용하고 무심하고.. 그랬다. 

봄꽃이 만개한 계절이라지만 일교차가 컸다. 바람이 불지는 않았지만 공기가 차가웠다. 종인은 흘깃 세훈을 쳐다보았다. 검은색 무지 티셔츠 한 장으로 감싼 마른 몸. 춥지도 않은 지 얇은 입술색이 생생하게 붉었다. 종인은 괜히 어깨를 떨며 후드집업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세훈이 뭔가 생각난 듯, 아 하고 말했다. 

“미술사 과제, 그 형한테 연락 왔더라.”

미술사 과제라면 태형이 처음으로 수업에 빠졌을 때 받은 것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종인이 역시 아, 하고 말을 늘였다. 생각해보니 수업이 끝나고 나서 셋 다 번호를 교환했었다. 종인은 그때 세훈의 번호를 알았는데 어쩐지 세훈의 핸드폰에는 종인의 번호가 이미 저장되어 있어 약간 놀랐더랬다. 그런데 분명 찬열의 번호는 저도 같이 받았는데. 종인은 의문을 담아 말했다.  

“난 못 들었는데.”
“전해달래.”
“너 그 형이랑 친해?”
“아니.”

세훈이 전혀 아니라는 듯 짤막하게 말했다. 종인은 키가 훌쩍 크고 눈도 엄청 큰 찬열의 얼굴을 떠올렸다. 품 큰 카키색 야상에 커다란 백팩. 블랙진에 컨버스 차림. 가진 무엇이든 클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형 후배라더니. 

종인의 기분이 약간 뒤틀렸다. 왜인지는 몰랐다. 아랫입술이 조금 부루퉁했다. 세훈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상한 얼굴로 물었다. 

“시간 언제가 괜찮아?”

세훈이 잘 못 한 것도 아니니 괜히 짜증내지 말자고 생각하며, 종인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냈다. 그리고는 핸드폰의 시간표를 켜서 건넸다. 그러자 폰을 받아든 세훈이 한참을 꼼꼼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화요일 4시 이후 괜찮아?”
“어. 아마.”
“그럼 그 형이랑 맞춰보고 시간은 좀 조정해도 그 날 보는 걸로 하자.”
“니가 연락하게?”
“그러지 뭐. 다 왔네.” 

어느새 기숙사 근처였다. 저 쪽에 건물이 보였다. 들어가라. 세훈이 깔끔하게 인사했다. 종인이 잘 가, 하자 엷게 웃으며 하얀 손을 흔들었다. 종인은 몇 걸음쯤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세훈의 마른 등이 조금쯤 멀어져 있었다. 종인은 말아 쥔 주먹의 손끝이 차갑다는 것을 느꼈다. 

“오세훈!”

종인의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세훈이 휙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고 종인을 바라보았다. 종인은 큰 보폭으로 세훈을 따라잡았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후드 집업을 벗었다. 대충 한 번 흔들어 털고는 내밀자 세훈이 영 모를 눈으로 종인을 보았다.

“입고 갈래?”
“…….”
“추운데.”

그런 건 벗기 전에 물었어야 했나. 세훈의 느린 반응 덕분에 얼굴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세훈은 한참이나 내밀어진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고마워, 하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길고 마른 팔을 움직여 제 옷을 입는 세훈을 보고 있자니 좋은 건지 부끄러운 건지.. 모를 기분이 되었다. 종인은 내일 보자, 고 말하고는 뒤돌아 빠르게 걸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기숙사 엘리베이터를 타고 거울을 보자 앞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제 모습이 비쳤다. 종인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쓱쓱 빗었다. 생각해보니 누군가가 자신을 데려다준 것은 처음이었다. 







다음 날 세훈은 빌려주었던 옷을 페이퍼백에 담아 내밀었다. 화요일 4시 반에 T관에서 보자더라. 괜찮지? 세훈이 덧붙인 말에 종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개켜진 옷에서는 낯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냄새가 좋아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종인이 혼자 앉는 날이 늘어나면서 앉은 거리는 세훈과 점점 가까워졌다. 옆에 앉지는 않았지만 앞 뒤 정도는 되었다. 오히려 태형보다 나았다. 점점 태형은 얼굴 보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나마 들어오는 수업은 여자친구와 붙어 있느라 정신이 없어보였으므로 굳이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계절에 따라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박태형, 정유진 또 결석이야? 한 번 더 결석하면 F야. 친한 사람 있으면 손 한 번 들어봐.”

종인은 손을 드는 대신 뒤를 쭉 돌아보았다. 부과대와 같이 다니던 여자 동기 둘도 눈을 내리깔고 손은 들지 않은 채였다. 그 어색함에 종인은 제가 결석하게 되어 이런 상황이 오면 혹시라도 오세훈이 손을 들어줄까를 생각했다. 







약속한 시간에 T관 입구로 가자 세훈이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서있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차가운 옆얼굴. 태생적으로 외로운 분위기를 타고 난 듯한 모습이었다. 가까이 가자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무슨 수업 들었냐고 물어보니 무슨 영상매체 수업이라는데 이름이 어려웠다. 찬열은 5분 늦긴 했는데 그 정도는 수비범위 안에 들었으니 괜찮았다. T관은 처음 와 본다는 종인의 말에 찬열이 형 보러 온 적 없냐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찬열은 준면과 같은 과였다.

“저희 형이요.”
“응.”
“어때요?”

찬열이 잠시 종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웃었다. 하얀 이를 내보이고 시원하게 웃는 얼굴에 악의는 없었지만, 왜 웃는지는 몰라 종인은 찬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족한테 험담은 못하겠는데.”
“네?”
“아냐. 좋지. 응. 좋아.”

어떤 다짐처럼 찬열은 말했다. 세훈은 할 말이 없는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찬열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는 물었다. 

“둘은 안 친해?”
“네?”
“말이 없길래.”

처음부터 대답을 바라지 않았는지 찬열은 앞서 걸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종인이 민망하게 세훈을 쳐다보았지만, 세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 







과제는 난이도에 비해 시간을 질질 끌어야했다. 벌써 바깥이 깜깜했다. 세훈이 프린트를 하러 간 사이, 찬열은 아예 책상에 엎드렸다. 길게 늘어진 찬열이 하품을 하더니 말했다. 

“여덟 시 넘었네.”
“그러게요.”
“형한테 밥 사달라고 해보지.”

찬열이 엎드린 채로 고개를 틀어 씩 웃었다.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닌 것 같아 종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또 기숙사 석식 시간도 넘긴 시간이었다. 먹고 들어가지 않으면 도리어 사납다. 어릴 때부터 준면은 제 친구들한테도 신경을 많이 써주곤 했으니까 밥 한 끼 사주는 게 어렵진 않을 거였다. 그리고 찬열이 알아서 노트북을 가져오는 수고까지 했으니까 뭐라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종인은 핸드폰을 꺼냈다. 재미없는 신호대기음은 길지는 않았다.

“형. 어. 학교야? 나 밥 좀 사줘.”

어. 찬열이형 알지? 형이랑 있어. 어? 아. 교양 과제 같이 했어. 응. 신기하지. 여기 T관…….

짧은 통화 후, 준면은 선뜻 자리에 나왔다. 근처라더니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피곤해하면 어쩌나 했는데, 말끔한 모습이었다. 종인은 조금 안심했다. 

“안녕하세요.”

세훈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준면이 눈을 접어 웃었다. 

“어. 종인이 형이야. 김준면. 이름이?”
“오세훈이요.”
“어. 세훈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무거나..”

세훈이 민망한지 말끝을 흐렸다. 준면은 종인에게 의사를 묻는 대신 찬열과 몇 마디를 섞더니 후문 쪽에 있는 처음 보는 음식점에 데려갔다. 메뉴를 고르는데 시간이 꽤나 할애될 법한 곳이었다. 여자 데리고 올 법한 내부 분위기에 종인은 제 팔을 쓱쓱 문질렀다. 세훈은 시키는 말에 간간히 대답을 하는 정도였을 뿐, 묵묵히 먹기만 했다. 

“이거 맛있다. 먹어봐.”

찬열이 제가 먹던 그릇을 세훈 쪽으로 쭉 내밀었다. 꼭 없는 사람처럼 구는 세훈을, 제가 아닌 준면이나 찬열이 챙기고 있었다. 약간 유난스러운 그 모습에 종인은 괜한 짓을 했나, 생각하며 리조또를 헤집었다. 







“기숙사 갈 거야?”
“응.”
“자주 좀 연락해. 밥 정도는 사줄 테니까.”
“내가 바쁜가. 형이 바쁘지.”

준면의 타박에 종인이 가볍게 말을 받았다. 세훈은 약간 어색한 듯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서있었다. 아. 종인은 그쯤에서 말을 끊기로 한다.

“우리 갈게.”
“친구는 어디 사는데?”
“기숙사 뒤쪽에.”
“그래. 들어가라.”

대화의 끝에 세훈이 얌전히 준면에게 고개를 숙였다. 숫기 없는 인사에 준면이 부드럽게 웃었다. 찬열에게도 고개만 가볍게 숙여 인사하자 찬열이 손을 휘휘 흔들었다. 내일 보자. 그래, 어차피 내일 볼 거였다. 종인이 먼저 돌아서고 세훈이 어색하게 한 번 더 고개를 숙여보이고 돌아섰다. 찬열은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준면을 보았다. 저보다 키가 꽤 작아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형은 어디로 가요?”
“다시 들어가봐야지.”
“또 술이요?”
“뭐…….”

말을 잔뜩 뭉갠 준면은 음식점에서 뽑아서 나온 자판기 커피를 홀짝 거리고 있었다. 진하고 텁텁한 설탕 맛이 났다. 세훈과 종인이 저만치 멀어지고 나자 찬열이 불쑥 말했다. 

“형 동생 있잖아요.”
“응.”
“닮았어요.”
“쟨 어머니 닮았는데.”
“아니, 그런 거 말구요.”

찬열이 팔짱을 낀 채로 웃었다. 뜻 모를 웃음에 준면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찬열을 올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큰 건 제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게 뭐든. 찬열은 그런 준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물었다.

“모른 척 하는 거죠?”

준면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부딪쳐오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눈을 내리깔았다. 밤바람에 하얗게 질린 손끝이 보였다. 준면은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난 아무것도 모르겠던데.”

아무렇게나 말해버린 준면이 앞서 걸었다. 덜 마신 커피는 화단에 휙 쏟아버리고는 종이컵도 구겨서 버렸다. 찬열은 준면의 작은 뒤통수와 반듯한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잡지 않으니 잘도 멀어졌다. 저 사람은 원래 그랬다. 원래 그런 사람을 좋아한 게 잘못이고 실수였다. 부수지도 못 할 견고한 벽은 하루하루 높게만 쌓였다. 개새끼, 하고 찬열은 생각했다.










04.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를 쓴답시고 네이트온만 한 지가 한참이었다. 벌써 몇 시간이 지났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딴엔 시험기간이라고 도피가 시작된 것 같았다. 어깨가 뻐근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 기지개를 쭉 폈다. 그리곤 생각 없이 옆을 흘긋 보았다. 윽. 종인의 어깨가 약간 움찔했다. 나란히 놓인 책상의 옆에 앉은 백현은 두꺼운 전공서적에 얼굴을 푹 처박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종인을 놀라게 한 것은 백현의 귀에 꽂힌, 고3때나 보던 주황색 귀마개였다. 키보드 소리가 울리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본인에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어서 몰랐다. 

종인은 메신저창에 나간다는 메시지를 급히 쓰고 노트북을 껐다. 일단 게으름 부린 대가로 과제를 하긴 해야 하는데 기숙사에선 영 글렀다. 최대한 기척을 죽여 일어났다. 백현은 여전히 책 속에 푹 파묻혀 눈을 휙휙 굴리고 있었다.  

사실 백현은 소리뿐만 아니라 냄새나 작은 기척에도 몹시 예민했다. 백현은 분명 웃으면 유순한 얼굴인데, 어쩌다 한 번 정색이라도 하면 주변의 공기를 남다르게 만드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그간 종인이 본 백현은 그럴싸한 칼집에 한 번 감쌌을 뿐이지, 잘 벼려진 칼 같았다. 언제든 날을 세울 수 있다는 의미였다. 종인은 의자 뒤에 대충 걸어 두었던 후드 집업을 걸쳤다. 종인은 적어도 얌전히 공부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자신이 내는 소리가 밀도 높은 소음 속에 파묻히는 쪽이 낫다고 여겼다. 

노트북을 챙겨서 나올 때까지 백현은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공부 중이었다. 종인은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서야 얕은 숨을 돌렸다. 백현이 생긴 값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놀란 게 사실이다. 

저녁 때를 넘긴 도서관은 몹시 붐볐다. 눈치 안 보고 과제를 해야 해서 온 건 맞는데,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을 줄 몰랐다. 노트북 사용가능 좌석은 좀처럼 빈 데가 없어 한참을 돌았다. 아는 얼굴이 드문드문 보였다. 입구 근처에 간신히 자리를 잡은 종인이 피곤한 얼굴로 가방을 풀었다. 환기가 잘 안 되는 도서관의 텁텁한 공기가 벌써부터 싫었다. 시험 기간은 시험 기간이었다. 

다섯 장짜리 리포트를 반 조금 넘게 썼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툭툭 어깨를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휙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세훈이었다. 요즘 들어 저와 아는 척씩이나 하고 지내는 것은 세훈 정도였다. 원체 벽이 높은 타입인 종인은 태형이 손 안의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나서도 딱히 친구를 사귈 필요성을 느끼질 못했다. 생각해보면 세훈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지도 몰랐다. 

종인은 세훈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세훈은 도서관에 처박힌 지 오래됐는지 약간의 피로감이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광등처럼 새하얗게 질린 피부가 조금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세훈의 작은 입술이 열렸다. 

뭐해?

이미 소란하긴 해도 명색이 도서관이라 그런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묻는다. 종인도 소리 없이 과제, 하고 대답하지만 세훈은 못 알아듣겠는지 한쪽 눈썹을 들었다. 종인은 다시 한 번 과제, 하고 입을 움직여보지만 세훈은 대답이야 아무래도 좋은 듯 입을 우물거렸다. 

나갈래?







야간 수업을 하나 끝내고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오는 길이었다. 원래 야간 수업은 끝내기가 무섭게 썰물처럼 사람이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밤늦게 학교에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벌써 조용해진 어두운 복도를 지나는데, 울리는 것이라곤 제 발소리뿐이라 찬열은 약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휘파람을 한 번 불어보지만 소리가 어쩐지 공허했다. 

길게 뻗은 복도를 쭉쭉 지나다가 걸음이 느려진 곳은 과실 부근이었다. 그럴 시간이 아닌데 안으로 불이 훤했다. 찬열은 과실 문 앞에 걸린 팻말을 발견했다. 대학원 수업 중.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그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한 찬열의 긴 손가락이 과방 문고리를 감아쥐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 아. 찬열의 입에서 웅얼거리듯 한 음절이 떨어졌다.

가로로 긴 책상의 가운데 앉은 것은 준면이었다. 찬열은 곧 허, 하고 짧게 한숨처럼 웃었다. 준면이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크고 새치름한 눈을 크게 떴다가 금세 눈을 내리깔아버린다. 찬열은 소리 안 나게 문을 닫고 다가가 준면의 맞은 편 의자를 쭉 꺼냈다. 

“놀라는 시늉 정도는 해요.”
“내가 왜.”

무심히 대꾸하는 준면이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드문 일이었다. 찬열은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그리고는 준면의 것이 분명한, 책상에 높이 쌓인 책들을 하나하나 내려서 휙휙 넘겨본다. 책장이 얕은 바람을 일으켰다. 찬열이 그렇잖아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올려 뜨며 물었다. 

“공부해요?”
“응.”

준면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바삐 손을 놀리는 폼이 뒤늦게 서머리 정리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찬열이 들고 있던 마지막 책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도서관 안 가요? 작년엔 아주 거기 살더니.”
“이따 주영이 오기로 했어.”
“그 선배는 왜요?”
“통계학 못 들어간 게 2주째야. 노트 복사해준다고 해서.”

거의 기계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준면의 덤덤한 대꾸에 찬열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저런 것까지 걸어놨어요?”

준면은 잠잠한 표정으로 찬열의 말을 씹었다. 침묵이야 아무래도 좋은 찬열은 부루퉁하기까지 한 얼굴로 제 할 말을 했다. 

“그 선배랑 놀지 마요.”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뀐 준면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찬열은 고개를 약간 치켜들고 준면을 내려다보았다. 서도 앉아도 키는 제가 더 컸다. 3초면 찬열은 타인을 굴종으로 물들일 수 있었다. 그게 안 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건 바로 김준면이었다. 준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친절했고 누구에게든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런 점이 좋으면서도 싫고 또 좋았다. 찬열은 속이 약간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한 번 엎어져보려고 덤비는 거 눈 있는 사람은 다 아는데, 왜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그런 건 몰라요?”
“걘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찬열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팔짱을 끼고 앉아 준면을 노려보듯 쳐다본다. 심문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봐야 혼자만의 생각이다. 준면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다. 찬열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것도 모른 척이에요?”

찬열의 뾰족한 시비에 준면이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찬열을 직시한다. 그 눈동자 안에 자신이 들어찬다. 찬열은 때로, 준면의 시선을 받아내는 것이 버겁다고 생각했다. 그 반듯한 시선 속에 갇히는 것은 제 시커먼 속내까지 까발리는 기분이 들곤 했다. 물론 알고 있겠지만.. 찬열은 그럴 때마다 부러 퉁명하게 굴곤 했다. 

“못 들은 걸로 해요. 그런 거 잘 하잖아요.”

그 말에 정말 준면이 고개를 푹 처박고 다시 샤프를 고쳐쥔다. 단정한 글씨로 이것저것 꼼꼼히 정리한다. 보통 급하면 글씨부터 날리기 마련인데 준면은 항상 교본을 놓고 쓴 것처럼 깨끗한 필체였다. 아무리 봐도.. 찬열이 본 준면은 전면에 나서 감투를 쓰는 것보다 뒷방에서 혼자 난이나 치고 제 학문이나 닦는 게 일인 선비 타입이었다. 그런데 인물이 하도 없어 졸업을 코 앞에 두고 학회장씩이나 맡아 고생 중이었다. 찬열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찬열은 한참이나 턱을 괴고 앉아 골몰한 준면을 보았다. 신기한 사람이다. 어떻게 봐도 질리지 않는다. 차분히 내려앉은 속눈썹이나 꾹 다물린 입술이 예뻤다. 부지런히 놀리는 손이 섬세한 외모에 비해 투박한 것도 좋았다. 시선을 하나하나 천천히 옮겼다. 훑고 또 훑어도 흥미로웠다. 언제나가 최초의 발견 같았다. 찬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을 때쯤, 준면이 샤프를 탁 놓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볼 건데.”
“방해 안 하잖아요. 계속 하던 거 해요.”

찬열이 조용하게 대답했다. 입만 안 열면 좋을 텐데. 아니, 그래서 좋은 건가. 그보다 다시 눈을 돌릴 줄 알았는데 준면은 눈을 크게 올려 뜨고 찬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찬열은 일순긴장한다. 

“혹시 나 귀찮아요?”

시선이 맞닿았다. 찬열의 커다랗고 맑은 눈이 준면을 직시했다. 똑바로 와 닿는 눈길에 준면이 슬쩍 눈을 피하고 다시 샤프를 들었다. 찬열이 팔을 길게 쭉 뻗어 그 위로 엎드렸다. 느슨한 자세. 찬열의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였다. 

“그럼.. 말해요. 그런 거 싫어요.”

찬열이 눈가를 약간 찌푸렸을 때, 그 표정이 안타까울 정도로 무너졌다는 것을 준면은 몰랐다. 그래도 준면은 작게 고개를 저었고 찬열은 보지 못했다. 침묵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찬열은 조용하게 물었다. 

“밥은 먹었어요?”
“아직.”
“더 마르면 볼썽사나워요. 잘 좀 챙겨먹어요.”
“……알아서 할게.”

아주 냉정하지는 못 한 말이었다. 찬열은 그래서 항상 기대를 버리기 어려웠다.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해놓고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힘들 때마다 빌었던 것 같다. 심장이 쉬이 지치지 않기를. 바람은 누구에게였던가. 찬열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주영선배는 언제 와요.”
“곧.”
“그럼 갈게요.”

내려두었던 가방을 챙겨들었다.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이 들어 찬열은 작게 인상을 썼다. 의자를 끌고 일어나자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찬열이 문고리를 쥐었을 때 등 뒤로 가라앉은 인사가 들렸다.

“잘 가.”

뒤돌아보자 고개도 들지 않은 준면의 옆얼굴이 보였다. 문을 성의 없이 닫았다. 인사 정도는 얼굴 보고 해요. 쏟아내지 못한 말 때문인지 찬열의 입가가 굳어있었다. 







어디?
1층 2열람실 92번

지잉지잉하는 진동과 함께 온 것은 세훈의 메시지였다. 예민한 룸메이트를 피해 과제 하러 갔던 도서관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다만 자리싸움이 치열해서 공부를 하려해도 쉽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종인은 본래 성정이 치열하진 못했다. 느긋하고 쫓기는 걸 싫어해서 이건 영 안 되겠다, 하는 찰나였다. 과제를 하다 말고 밖에 나가 달짝지근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세훈은 쉽게 말했다. 학생증 줘. 내일부터 자리 맡아줄게. 

대단히 미안한 일을 시키는 것 같아 망설였더니 외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싫어? 하고 물어 종인은 약간 당황했다. 미안한 표정으로 학생증을 내밀었더니, 세훈은 가볍게 웃었다. 고마우면 시험 끝나고 밥이나 한 번 사라. 그 날 이후로 남은 시험기간, 종인은 도서관 열람실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기숙사 통금시간 직전까지 시험공부를 하고 같은 시간에 도서관을 나섰다. 세훈은 생각보다 까탈스럽지 않았고, 종인은 세훈과의 묘하게 간지러운 관계가 싫지 않았다. 

다음 날 있을 마지막 시험을 대비해 좀 오버를 했더니 문제가 생겼다. 종인은 핸드폰 시계를 보았다. 12시 1분. 1분 차이로 기숙사 문이 잠겼다. 종인은 잠긴 문을 의미 없이 흔들어보았다. 덜컹덜컹 소리만 났다. 자동으로 잠기는 문이니 흔들어봐야 소용없었다. 까딱하면 경비업체나 출동되겠지. 종인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계절에 관계없이 밤바람은 찼다. 종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대기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받는다. 종인은 상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불쑥 말했다.

“기숙사 문 잠겼어.”

종인의 한숨 섞인 말에 건너편에서 세훈이 잠깐 뜸을 들였다. 

“내 방 어떻게 오는지 알지?”
“어.”
“여기서 자고 시험 보러 가. 1교시잖아.”

그래서 두 번째로 세훈의 집에 오게 됐다. 와본 적 있는 복층 룸은 이전보단 조금 어지러운 모양새였다. 시험기간이라고 정신이 없긴 한 모양이었다. 세훈은 쌓인 옷가지 따위를 한 곳에 밀어놓았다. 그 무신경함이 보통 남자애다웠다. 세훈은 종인에게 다시 한 번 새 칫솔과 갈아입을 옷을 꺼내주었다. 내어준 티셔츠와 트레이닝복에서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남자애답지 않은 냄새에 종인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양치를 하고 나오자 세훈은 이미 잘 준비를 마친 터였다. 종인은 어색하게 삐걱이는 나무 계단을 밟았다. 매트리스에 길게 몸을 누인 세훈이 보였다. 종인이 누울 자리를 비워놓고 있었다. 약간 쭈뼛거리며 옆에 눕자 매트리스가 꽉 들어찼다. 세훈이 팔을 길게 뻗어 스탠드를 껐다. 맨정신으로 나란히 누워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움직일 때마다 맞닿은 맨살이 부드럽게 쓸렸다. 종인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어둠이 눈에 익어 천장만 쳐다보다가 물었다. 

“세훈아.”
“응.”

세훈이 잦아드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발대식날. 나 무슨 짓 없었어?”

종인의 말과 함께 흡, 하고 짧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종인은 조용하게 덧붙였다.

“너네 집에서 잤잖아.”
“실수 안했으니까 걱정 마.”
“그러니까.”
“졸려. 잔다.”

세훈이 뱉은 답은 짧고 무성의했다. 잘라먹은 기억이 답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랬지. 그 땐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종인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규칙적인 숨소리가 가라앉았고, 얼마 지나지않아 종인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중간고사가 끝났다. 종인은 시험 마지막 날, 다음날이 공강이라고 어정쩡하게 밤을 새는 바람에 더 피곤해져 시험이 끝나자마자 하루를 통째로 날렸다. 헐 나 하루종일 잤어, 하고 보낸 메시지에 답이 없는 것을 보면 세훈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루를 꼬박 자고 일어나자, 백현은 없고 열린 창문으로 햇빛과 바람만 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오후 수업에 약간 아슬아슬할 정도로 잤다. 알람도 맞추지 않고 잔 것이 용감하다 싶을 정도였다. 종인이 푹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내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백현이었다. 

“시험보고 와요?”

얼굴 한 번을 제대로 못 본지가 꽤 된 것 같아 물었더니 백현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고 있던 백팩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팽개치고, 팔에 안은 책은 책상에 쏟아버린다. 종인은 어깨에 수건을 걸치며 백현이 내던진 가방을 치웠다. 

“형 얼굴이 곧 죽을 사람 같은데요.”
“이틀 밤 샜다. 말도 마.”

거의 중얼거리듯 뱉어낸 백현이 입고 있던 옷을 차례로 벗었다. 정신도 없어 보이는데 옷을 갈아입는 손짓은 기계적이기까지 하다. 백현은 이틀 밤을 꼬박 새고 혼미한 정신으로 시험을 보러 간 것치고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입술이 터져나간 것 빼고 말이다.

“무슨 공부를 그렇게 입술이 다 터지게 해요.”
“이거?”

백현이 졸린 눈으로 터진 입술 끝을 가리키며 물었다. 종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서 그런 거 아니야. 맞았어.”
“맞아요? 누구한테요?”

종인이 큰 눈을 껌뻑이며 묻자 백현이 여자친구..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꿈틀꿈틀 이불을 말고 누워버린다. 얼굴은 대강 멀쩡해보이는데 정신은 정말 혼미했던 모양이었다. 공부 많이 했냐고 캐묻는 여자친구의 말이 너무 귀찮고 짜증나서 본심대로 말했다가 뺨을 맞았다는 백현의 말은 지나치게 무신경했다. 

“뭐라고 했길래요.”
“피냄새..”
“네?”

종인의 띨한 반문에 백현이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생리하는지 피냄새가 너무 나.. 머리 아프게.”

진심으로 머리가 아프다는 듯한 그 짜증 섞인 목소리에 종인은 탄식했다. 어쩐지 후각이 심하게 예민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옆방에서 시킨 치킨 냄새나 종인이 술자리에서 묻혀온 담배 냄새 따위를 기차게 캐치하곤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좀 심했다. 종인이 한숨도 못 쉬고 말했다. 

“좀 심한 거 아니에요? 뺨으로 끝난 게 다행인 거 같은데.”
“응. 나도 알아.”

백현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렸다.







그런 백현이 여자친구에게 차인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과 여자애들 사이에 개새끼 씹새끼 뭔 새끼 온갖 욕은 다 나돌았다고 했다. 백현은 그래도 과에서 제법 중심인 인물이었다. 그런 백현을 순식간에 잠정적 개새끼로 낙인찍은 것은 여자애들의 입담이 크게 한 몫 했음을 의미했다. 기집애.. 쪽팔리지도 않나. 백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사실 과 CC가 다 그렇듯, 분위기에 휩쓸려서 사귄 거지 막 좋아 죽겠고 하진 않았어서 감정적 타격은 없었다. 다만 이런 게 불편했다. 수업 들어갔을 때 구 여친 무리의 싸늘한 시선 같은 것. 백현은 민망함에 뒷머리칼을 다시 한 번 쓸어내렸다. 시간표를 여자친구랑 짰던 터라 같이 앉을 만한 사람을 물색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한참이나 눈을 굴리며 레이더망을 펼친 결과, 익숙한 뒤통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머리통, 작은 어깨. 친하지는 않은 얼굴이지만 백현은 특유의 뻔뻔함을 발휘해보기로 한다.

“도경수.”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을 하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파르르 떨며 뒤를 돌아본다. 날 세우긴.

“옆에 자리 있냐?”

아무렇지도 않게 묻자 경수가 조금 얼떨떨한 눈으로 백현을 올려보다가 가방을 무릎 위로 치워준다. 

백현과 경수는 분명 동기였지만,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도경수는 아싸였고, 그런 주제에 말랑하게 생긴 외모와 다르게 매사에 단호했다. 경수의 순한 외모만 보고 만만히 여긴 윗 학번 선배가 조별 과제에 이름만 넣어보려다가 발표 날에서야 제 이름이 빠진 프리젠테이션을 보게 된 것은 백현은 물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윗 학번에서 싹수가 노랗다, 재수 없다, 싸가지가 없다는 소리도 제법 들어먹은 걸로 알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수는 꿋꿋했다. 

사실 경수의 평판 같은 것은 백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군을 적군으로 돌리게 된, 일주일에 두 번 들어야 하는 이 수업에서 비빌 언덕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교수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부르는 이름 하나 하나가 구 여친의 무리다. 백현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가만히 펜을 굴리다가 제 노트 위로 몇 글자를 찍찍 날려써서 경수에게로 내밀었다.  

도경수. 이따 점심 같이 먹을래?









05.




“야. 너 어떻게 유경이한테 그런 짓을 하냐.”
“뭘.”

백현은 부러 모른척하며 안주로 나온 알탕을 휘저었다. 뭐 먹을 만한 건더기 하나 없는 국물 사정에 백현이 입맛을 다셨다. 백현이 전공필수과목 시험날 아침에 여자친구에게 막말을 했다가 따귀를 맞고 차인 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퍼진 소문이었다. 백현은 3학년 과대였고, 누구나와 쉽게 어울렸고 공강에는 평범하게 공차고 당구도 치는 보통 남자였다. 담배는 상황에 따라 가끔 피울 줄은 알았지만 골초는 아니었고, 술도 적당히 분위기 맞춰 마실 정도는 되었다. 다들 간과하는 사실이 있었다면 백현은 누구나와 어울렸지만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됐고, 받아라.”

제 앞으로 소주병이 들이밀어졌다. 백현은 한 손으로 대충 술을 받았다. 반만 꺾고 잔을 치워두었다. 속이나 채우고 싶은데 안주는 영 시원찮다. 그렇다고 하나 더 시키자니 찝찝했다. 안주빨 세우는 종자들은 저부터가 질색이었다. 기본으로 나온 팝콘이나 주워 먹고 있으니 제 위로 여러 말들이 오갔다. 근데 조유경이도 존나 웃긴 년이야. 그걸 지 입으로 떠들고 다니냐.. 쪽팔린 줄도 모르고.  

유경과 사귄 것도 따지고 보면 주변의 여론에 휘말려서였다. 과 CC가 형성되는 과정이야 뻔했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감정이 새어나오기 시작하면 주변인들이 먼저 떠들썩해진다. 스캔들은 여럿의 입을 타면 곧 연애가 되었다. 누구나 제 일 아닌 일에 쉽게 관여하고 쉽게 등을 돌렸다. X가 Y를 좋아한다더라, 하는 소문은 그 순간만큼은 월드컵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다. 안 될 일도 되게 만드는 것이 대중이었다. 사실, 백현은 그 결과 값이 유경이라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어차피 사귀게 될 거라면 얼굴이라도 봐줄 만한 편이 낫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사는 것은 쉬웠다. 적당히 공부하면 성적이 나왔고, 웃어만 주면 누구든 제게 호감을 가졌다. 남들 하는 만큼 하면 평균 이상이 되었다. 어렵지 않게 보답 받았고, 어디서나 만족할 만한 인생이었으므로 백현은 매사에 필사를 몰랐다. 그게 나쁜가. 다시 한 번 술잔이 돌려졌다. 백현은 남은 소주를 재빨리 입에 털고 잔을 내밀었다. 그런 백현에게 술을 따라주며 승민이 말했다. 

“소문 다 났어, 임마. 너 유경이 때문에 발생학 도경수랑 듣는다며.”
“어.”
“그러니까 우리랑 같이 듣자니까 혼자 따로 놀더니.”

저쪽에서 진욱이 짧게 혀를 찼다.

“도경수?”

반대편에서는 준영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높였다. 준영은 언젠가 학번 별로 잘라서 조를 맞춘 과제에서 경수에게 물 먹은 전적이 있었다. 물론 백현이 볼 때는 준영의 잘못이 컸다. 제가 지각을 자주 해서 벌금을 왕창 물어낸 것이 도경수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말도 안 되게 높은 벌금을 책정한 주범이 경수였다고는 하지만, 경수는 그렇게 하면 준영의 지각이나 결석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걔가 무슨 빚쟁이도 아니고 남의 지갑 긁으려고 안달복달할 이유가 있나.. 그러나 백현은 괜한 말은 삼간다. 준영이 경수에게 품은 적의는 말 한두 마디로 휘발될 성질이 아니었다. 제가 나서서 화를 뒤집어 쓸 이유도 없었다. 준영은 씨이발, 하고 억양 세게 욕을 했다. 

“차라리 혼자 다니지, 그런 재수 털리는 씨발새끼랑 어떻게 같이 다녀. 변백현 비위 많이 좋아졌다.”

대놓고 빈정대는 말에도 백현은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로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통금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나를 확인했다. 한 시간쯤 남았나. 제가 안주에 오르는 술자리를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불편한 건 싫었다. 화제는 짧게 도경수로 옮겨갔다. 경수는 1학년 이후로는 과 활동이라고는 일체 하지 않았고, 항상 혼자였고 과 탑을 놓친 적이 없었다. 친구도 없어서 누구도 경수의 실체를 몰랐으므로 화두에 오르진 않았지만 한 번 노출되면 표적이 되기 가장 쉬운 존재였다. 경수의 이름과 엮이는 말은 대부분이 쌍소리였다. 사실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 나서서 변호까지 할 맘은 없어 그만두었지만 백현은 정말, 도경수가 나쁘지 않았다. 







칸막이로 분리된 열람실에 처박히는 것이 싫어 항상 도서관 서고의 빈 책상에 자리를 잡는 경수였다.

대학에 소속되고 나서 제가 한 일이라고는 공부밖에 없었다. 달리 몰두할 것이 없어 공부를 했다. 대학은 고등학교와는 다른 세계였다. 경수는 그 세계의 극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에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정해진 틀이 없는 것도 그렇고, 노력하지 않으면 누구도 저를 울타리 안에 들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다. 고등학교는 옆에 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쉽게 친구가 되곤 했었지만 대학은 아니었다. 다들 쉽게 적응하고 제 색깔을 바꿨으나 경수는 도무지 그러질 못했다. 경수는 모든 새로운 상황에 적응이 더뎠다. 

적응이라기보다 인정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경수는 술도 담배도 싫었고, 으레 하는 게임이나 당구, 축구 따위에 흥미도 없었으므로 뒤늦게라도 무리에 섞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경수는 혼자가 되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그런 줄 알았다. 

도경수. 이따 점심 같이 먹을래?

전공 책 위로 휙휙 날려쓴 글씨와 백현의 희고 말끔한 얼굴이 떠올랐다. 경수는 책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결국 펜을 놓았다. 천장을 올려보았다. 커다란 눈이 도록도록 굴러갔다. 천장 합판의 일률적인 무늬를 보며 눈을 깜빡여보았다. 도무지 집중이 안 된다. 

백현이 제 옆자리에 앉을 때부터 뭔가 의아했다. 아싸인 경수조차도 백현이 과내에서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백현은 항상 사람들의 중심에 놓였고,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세계의 중심이 자신인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선택받은 부류였다. 그리고 백현은 그런 사람이 맞았다.  

경수를 데리고 학관 식당에 갔던 백현은 몰랐겠지만, 경수는 그 다음 시간에도 수업이 있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쉽사리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적의가 아닌 감정이 제게 직접적으로 표출된 것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 때, 경수는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고는 한참이나 내밀어진 노트를 보다가 백현을 쳐다보았다. 백현은 노트를 밀어놓고 정작 칠판이나 보고 있었다. 경수는 초조한 듯 도톰한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작은 글씨로 그래, 라고 써서 노트를 다시 백현 쪽으로 밀었다. 망설임이 잔뜩 묻은 대답이었다. 백현은 슬쩍 고개를 숙여 노트를 확인하고는 여상한 얼굴로 다시 칠판을 보았다. 경수는 강의 내내 쟤가 대체 왜 이러지를 생각하느라 도무지 집중하지 못했다. 

학관 식당은 점심시간을 약간 비켜간 시간이라 제법 한산했다. 백현은 제 멋대로 식권 두 장을 뽑아서는 경수를 향해 내밀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파란색 식권을 받아드는 경수를 향해 백현이 의아하게 물었다.

“뭐야. 닭 싫어하냐?”

경수는 눈을 크게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리버리한 반응에 백현이 피식 웃었다. 백현이 뽑아온 식권으로 밥을 먹는 내내, 경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 연속적으로 벌어지면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경수는 뒤늦게야 알았다. 백현이 빠르게 그릇을 비워내는 동안, 경수는 제가 집어 올리는 닭칼국수의 면발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백현은 학관 식당을 나오면서 다음엔 네가 사라며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는 다음 수업이 있다며 사라졌다. 경수는 제가 다음 수업에 이미 30분 넘게 지각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달리지도 못했다. 조용히 강의실에 들어가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아만 있다가 출석을 하고 넋을 뺐지만,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업에 지각하는 것이 알고 보면 별 일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경수는 그 이후로도 백현과 점심을 먹었다.







시험이 끝나고 주말에 집에 갔더니 준면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종인을 부르더니 대뜸 영화표 두 장을 줬다. 종인은 내밀어진 예매권을 내려보다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왜 주는데.”
“친구랑 봐.”

종인의 말에 준면이 피식 웃었다. 영화표를 영화보라고 주지, 뭐하라고 줬겠냐.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섞어 말하는 모양새가 준면다웠다. 계속 들고 있게 두는 것도 어쩐지 민망해서 종인은 일단 예매권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형이 쓰지, 왜.”
“바빠서.”
“무슨 영화 볼 시간도 없이 바쁘대.”
“싫음 다시 주고.”
“아냐. 고마워.”

공짜표 두 장이 생기고 나자 생각나는 것은 세훈이었다. 입학한 지 두 달이 지났고, 종인은 이제 강의실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옆 자리에 가방을 두었다. 자리를 맡아두었다가 강의 시작 직전에나 세훈이 뒷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방을 슬쩍 치웠다. 세훈은 당연하게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는 잠이 약간 덜 깬 얼굴로 물어왔다. 밥은 먹었어? 종인은 시간과 우연이 가져온 그 변화가 싫지 않았다. 

두 사람은 덜컹이는 전철의 문가에 서 있었다. 강의 끝나고 영화 보러 갈래? 말을 하면서도 종인은 이 상황이 몹시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세훈이 민망하지 않게 고개를 빠르게 끄덕여주었다. 세훈이나 종인이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종인은 어쩐지 둘 사이에 대화가 끊기는 것이 싫어 저 답지 않게 애를 쓰곤 했다.

“난 대학 오면 뭔가 확 달라질 줄 알았는데.”

종인이 푸념처럼 뱉어낸 말에 세훈이 기둥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대며 물었다.

“그래?”
“어. 생각보다 재미없지 않냐.”
“그런가. 난 재밌는데.”

세훈은 덤덤하게 대답하며 차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종인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피어올랐다. 세훈이 학교를 재밌어할 만한 건수가 있던가. 종인도 마찬가지였지만, 세훈은 과팅이나 소개팅 따위와는 영 거리가 멀었고, 과 활동도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동아리를 따로 든 것도 아니었다. 세훈은 모를 얼굴로 입술을 약간 끌어올렸다.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세훈이 종인을 바라보았다. 

“재미없어?”

나한테 묻는 건가. 종인이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며 눈을 키우자 세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인은 잠시 세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종인이 어색한 듯 웃기만 하자 세훈 역시 싱겁다는 듯 엷게 웃었다.

상영작 중 종인이 고른 영화는 뻔한 결말의 액션 히어로물이었다. 종인은 원래 그렇고 그런 뻔한 영화를 좋아했으므로 그럭저럭 만족했다. 종인은 모든 영화를 분위기로 보는 주의였다. 어둑어둑한 공간에 갇혀 팝콘 따위나 씹으면서 집중해야 하는 반강제적 분위기에 종인은 몰입했다. 반면, 세훈은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에 고개를 돌리고 소리 없이 하품을 했다. 하필 종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다음엔 니가 좋아하는 걸로 보자.”

무료한 표정에 내내 신경 쓰고 있던 종인의 말에 세훈이 잠깐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고는 이내 민망하다는 듯 눈을 휘었다. 







밥까지 먹고 돌아오니, 해가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까만 밤이었다. 낮에는 해가 쨍하더니 밤이라고 나뭇가지들이 스산하게 흔들렸다. 그래도 하얀 꽃을 달고들 있었다. 봄은 봄이었다. 매번 세훈이 기숙사를 거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경 쓰여 일부러 후문 쪽에서 내렸는데 마침 메시지가 지잉 울렸다. 올 때 콜라. 백현이었다. 답신을 보내려는데 한 통이 더 왔다. 빨간 걸로. 

덕분에 진로를 틀었다. 편의점에 들른 김에 콜라와 컵라면, 과자 따위를 골랐다. 종인이 과자를 고르는 동안 세훈은 담배를 샀다.

“너 담배 피워?”

편의점을 나서며 묻자 세훈이 약간 대답에 뜸을 들였다. 어. 짧은 답이 굼뜨게 떨어졌다. 종인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종인은 담배 냄새를 못 견뎌하는 편이었는데, 세훈에게서는 그런 싫은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몰랐다. 세훈이 산 담배를 가방에 넣어버리는 것을 보다가 종인이 말했다.

“피워도 되는데.”
“아니. 됐어.”

응. 종인이 들릴 듯 말듯하게 대강 대답하곤 나란히 걸었다. 세훈이 사는 곳은 밀집한 자취촌과는 약간 거리가 멀었다. 언젠가 세훈의 집에 한 번 더 갔을 때 물었더니 시끄러운 게 싫어서 일부러 멀리 구했다고 말했었다. 어쩐지 세훈답다고 생각했다. 편의점을 지나 조용하고 어두운 골목에 접어들었다. 아주 작고 꺼질 듯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세훈의 집 쪽으로 갈수록 소리도 가까워졌다.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쓰였다. 내심 설마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세훈이 사는 건물 구석에 박스가 버려져있었다. 세훈과 종인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고양이네.”
“응. 아까 소리 들리더라.”

세훈도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종인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가끔 역 같은 데서 할머니들이 조악한 박스에 담아놓고 파는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등줄기에 까만 점박 무늬가 두 군데 있는 새하얀 털의 고양이는 오버 좀 보태서 정말 주먹만 했다. 종인은 천천히 손을 뻗어 고양이의 등을 한 번 쓸어내려보았다. 작은 몸이 움찔하고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종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세훈도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어떡하지.”
“어떻게 할까.”

종인의 말에 세훈이 덤덤히 답했다. 세훈도 어린 고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종인이 한 번 더 털을 쓰다듬자 고양이가 그새 손을 탄 건지 몸을 내맡기고 갸르릉대며 목을 울렸다. 

“고양이 좋아해?”

세훈이 불쑥 물었다. 종인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보는 건.”

종인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인 세훈이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반팔 티셔츠 한 장만 남은 몸은 말랐지만 어깨가 단단했다. 세훈은 벗은 셔츠로 어린 짐승의 작은 몸을 감싸고는 아주 능숙하게 안아들었다. 세훈은 품에 안은 고양이의 턱을 살살 간질이며 종인을 향해 말했다.

“그럼 자주 보러와.”

그리고는 눈을 길게 접어 웃었다. 처음 보는 다정한 얼굴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자 학교가 떠들썩했다. 체육대회 준비네 뭐네 하며 온 학교가 들떠있었다. 에브리데이 애니버서리인 봄의 캠퍼스 분위기가 아주 싫지는 않았다. 날도 좋고 바람도 선선하고. 찬열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무작정 걸었다. 귓가로 시끄럽게 때리는 드럼 소리가 잘게 쪼개졌다. 루트를 정한 것은 아니고 그냥 그늘진 길을 따라 걸었다. 건물 몇 개를 지났다. 외진 길 구석구석에도 늦은 봄꽃이 피어있었다. 그 와중에 만개한 꽃보다 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저 멀리서 걸어오는 준면이었다. 

“형!”

우연에 기댄 만남에 반가움이 앞선 찬열이 크게 소리쳤다. 준면이 고개를 트는 것이 보였다. 이쪽을 보나 싶어 찬열은 손을 흔들까 말까를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준면의 시선은 찬열 쪽에서 약간 비켜가 있었다. 궤적을 따라가자 여자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준면이 언젠가 입에 올린 적 있던 여선배였다. 노트 따위나 빌려주면서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이 유치하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유치한 것은 저였다. 제대로 나설 수도 없는 위치에서 더러운 질투나 하고 있었다. 

벌써 햇수로만 치면 5년차였다. 짝사랑이라는 것이 참, 사람을 치사하고 예민하게 만들었다. 찬열은 누구에게나 밝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찬열에게는 분명 봄날 초록의 나뭇잎 새로 비치는 햇살 같은 찬란함이 있었고, 그로 하여금 누구나를 웃게 할 수 있었다. 성정 자체를 해칠 수는 없었으나 찬열은 조금씩 변했다. 감정적인 일방통행은 찬열을 쥐고 흔들었다. 끝도 없이 기대하고 착각하고 그러다 깨닫고 망가지고를 반복해야했다. 많이 다쳤다. 준면이 저를 다치게 한 것보다 스스로의 짓이 더 많았다. 사랑이 이런 거라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순간이 늘었다. 자괴와 자학의 끝자락이었다. 

찬열은 자리에 멈춰 선 채로 준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면은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저를 보지 못하고 멀어졌다. 닿지 못한 한 음절이 입가에 맴돌았다. 







찬열은 학교 다닐 때도 일진 양아치 놀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은 좋아했다. 술이 좋은 건 아니었는데 술자리의 그 떠들썩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다보니 수능이 끝나고 어영부영 술독에 빠져 살았다. 민증 검사를 안 하는 곳으로 골라골라 다니다보니 해가 넘어갔고, 해를 넘기니 더욱 심해졌다. 대학가면 좋건 싫건 지금보다는 멀어진다는 생각에 더 악착같이 놀았던 것 같다. 그래서 오티도 가지 않으려 했었다. 제일 친한 친구와 오티 날짜가 겹치지 않았더라면 분명 누가 뭐래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오티는 분위기가 영 뻘쭘했다. 말을 먼저 붙여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이 어색하기 짝이 없어 대화도 쉽지 않았다. 괜히 왔다고 찬열은 생각했다. 선배들은 그 어색하고 또 어색한 분위기를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오티가 제일 재밌는 거라며 낄낄대는 선배들의 얼굴을 올려보며, 찬열은 방바닥에 앉아 일없이 손이나 꼼지락대고 있었다. 붙일 곳 없는 시선을 붙들어놓기라도 하라고 틀어놓은 TV에서는 리포터가 갓 잡아 팔딱대는 생선을 보며 뭐라 떠들고 있었다. 찬열은 길게 하품 했다.

“야, 김준면. 왜 이렇게 늦었냐.” 

그 말과 함께 찬열의 시간이 멈췄다. 갑자기 높아진 소리의 중심으로 눈을 두었을 때였다. 준면이 찬 바람을 묻히고 들어와 추위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고 있었다. 

“길은 안 헤맸냐?”
“그렇잖아도 이 근처에서 삼십분 돌았어.”
“그래도 온다고 고생했네. 밥은 먹었냐? 컵라면이라도 줘?”
“아뇨. 휴게소 들렀다 왔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가며 인사하고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이는 준면에게서, 찬열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찬열을 시작으로 하나 둘씩 커진 소리에 TV에서 눈을 떼고 슬쩍슬쩍 시선을 옮겨갔다. 그러자 시선을 느꼈는지 준면이 고개를 돌려 방바닥에 앉은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신입생들이에요?”

옆에 선 선배에게 소리를 낮춰 묻던 준면은 그때는 더 어린 티가 났다. 준면이라고 처음부터 단정하고 꼿꼿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찬열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 곧 내려갈 거니까 그때 인사들 하고.”
“에이. 얘한테 인사가 무슨 필요 있어요.”
“제대하면 같이 다니지 않냐?”

저희들끼리 몰려 웃는 선배들 틈에서 준면은 그저 슬쩍 웃는 얼굴이었다. 잘생겼다고 수군거리는 동기 여자애들을 놀리듯 뱉어낸 선배의 말은 찬열의 심장까지 들었다 놓았다.

“아서라. 쟤 다다음주에 군대 간다.”

눈이 휘둥그레 커지는 찬열의 시선도 모른 채, 준면이 저쪽에서 사람 좋게 웃고만 있었다. 새초롬한 눈을 활짝 휘어가며 웃는 얼굴이 말갛고 예뻤다. 







콘도의 무슨 홀에서 1차 술판이 벌어졌다. ㄷ자 구조로 놓인 테이블에 후배들이 바깥쪽에 앉아있으면 선배들이 그 앞을 번갈아 도는 희한한 구조였다. 면접도 아니고.. 찬열은 그 술판이 좀 구리다고 생각했다. 어색함을 극도로 높이는 자리에서 저는 그대로 앉아만 있고, 제 앞의 사람만 계속해서 바뀌었다. 딴 눈을 팔 수도 없게 조교며 학회 임원이며 이름도 다 못 외운 선배들이 와서 뱃속의 술을 한 잔 두 잔 늘려주었다. 술을 받아 마시고 어색하게 웃으며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이나 했을 뿐인데 다들 찬열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찬열은 이 술자리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몇몇 여자 동기들이 자리를 이탈하고 술판이 점점 개판이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여긴 한 번도 안 온 것 같은데, 맞죠?”

예의바른 존대와 함께 제 앞에 앉은 것은 다름 아닌 준면이었다. 아, 네. 찬열은 자세를 고쳐 바르게 앉았다. 허리를 곧추 세우자 찬열이 준면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생각보다 작구나. 찬열은 조금 놀라며 반사적으로 소주잔을 내밀었다. 멀리서 볼 때도 존재감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라 막연하게만 느꼈는데 준면의 키나 몸집은 생각보다 작았다. 준면은 술병을 드는 대신 잔을 받아들었다. 테이블에는 밑바닥도 보이지 않는 지, 안 딴 소주병이 잔뜩 널려있었는데도 그랬다. 찬열의 눈이 준면의 행적을 쫓았다. 준면은 받아든 소주잔을 내려놓고는 빈 종이컵을 찾아 물을 가득 따르더니 찬열에게 내밀었다.

“많이 마셨어요?”

찬열이 내밀어진 종이컵을 받아들며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준면은 처음부터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이름이.. 박찬열?”

준면이 찬열의 목에 걸린 이름표를 보며 확인차 물었다. 찬열이 반 박자 늦게 아, 네 하고 대답했다. 어쩐지 자꾸 놀라게 된다. 준면은 테이블에 오른손을 올려놓고는 의미없이 타닥타닥 손가락을 놀렸다. 

“제 이름은 알아요?”
“07학번 김준면 선배님..”
“아, 어떻게 알지.”

타인의 무리에서 들려온 말을 기억해내 대답했다. 그러자 준면이 약간 무안한 듯 혼잣말처럼 말하며 웃었다. 찬열은 꼿꼿하게 긴장한 채 준면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순진했다. 

“술은 좀 해요?”
“그냥..”
“다들 좋아하더라구요. 술 절대 안 뺀다면서.”
“아..”
“처음부터 죽자고 먹는 습관 들이면 안돼요.”

적당히 거절도 하고 그래요. 조근조근하게 타이르는 목소리가 맑았다. 준면은 그렇게 말하며 저도 빈 종이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정작 많이 마신 것은 본인이었는지 목덜미가 붉었다. 찬열은 당연하게도 술이 처음도 아니었고 주량도 알아서 컨트롤 할 정도는 되었지만,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물을 마셨다. 







2박 3일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강원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차량 안에서 모두가 곯아떨어졌지만 찬열은 그러질 못했다. 통로 하나를 지나 옆에 앉은 준면의 기울어진 단정한 머리통 때문이었다. 차가 흔들리면 움찔 깼다가 다시 스르르 눈을 감고 머리를 떨어뜨리는 준면을, 찬열은 몇 시간을 질리지도 않고 바라보았다.

학교 대운동장에 차가 섰다. 모두가 잠이 잔뜩 묻은 얼굴로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내렸다. 학회장 선배가 다들 수고 많았고 입학식때 보자는 하나마나한 인사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찬열은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다고, 그렇지 않을 거라면 저 따위 인사라도 길게 길게 해달라고 빌었다. 혼잡한 사람들을 헤치고 찾아낸 준면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웃고 있었다. 이틀간 술독에 빠져 모두 퀭한 얼굴인데 반해, 준면은 자다 깼으면서도 하얗고 깨끗한 얼굴이었다. 

해산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들 고개를 푹푹 숙여 인사를 하고는 삼삼오오 흩어졌다. 찬열은 멍한 얼굴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준면을 바라보았다. 준면이 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금세 눈꼬리를 접었다. 으레 짓는 미소인 것 같았지만 찬열은 심장이 철렁하고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뒤에서 이름 모를 선배가 해산, 해산 하고 찬열의 마른 등을 툭툭 쳤다. 찬열은 끝까지 시선을 늘여 준면을 바라보았다. 

예정대로 오지 않아서 준면을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2박 3일이 찬열을 뒤집어 놓았다는 걸 준면은 당연히 몰랐다. 일주일 뒤 입학한 찬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면을 찾아보았지만 당연히 그는 없었다. 후배들 쓰라고 과실에 놓아둔 교양 교재 따위에 쓰인 단정한 이름 세 글자가 찬열의 눈을 잡아끌었다. 찬열이 입학하고도 학교에 전혀 재미를 붙이지 못한 것은 분명히 준면의 탓이었다.









06.




시험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체육대회가 시작됐다. 이름만 대학이지, 놀 궁리에 안달난 사람들처럼 건수만 생기면 지나치게들 열성적이었다. 그래봐야 종인의 과는 예선전에서 거의 모든 종목에 떨어졌다. 당연히 순위권은 욕심도 못 내고, 이벤트에 가까운 당일 경기나 설렁설렁 하는 것이 전부였다. 애초에 목적은 해가 저문 뒤에 있었으니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벌써부터 과 천막 가장자리에는 소주가 짝으로 쌓여 있었다.

둘째 날이라 분명 열 시까지 오라는 단체 문자를 받았는데, 과 천막 앞에는 사람이 드문드문했다. 전 날 마신 술이 덜 깬 건지 피곤한 기색의 선배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저 쪽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있는 것은 세훈이었다. 세훈은 과 티셔츠 대신 소매를 두어번 접은 흰색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마른 등이 넓었다. 종인이 다가가 어깨를 확 짚자 세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일찍 왔네. 종인이 슬쩍 웃었다. 쌓인 가방의 개수가 많지는 않았다. 

“과티 안 입었네.”
“안 말라서.”

그러고보니 어제 누군가가 잘못해서 세훈 쪽으로 술을 쏟았던 것 같았다. 짧게 웃은 세훈은 종인의 가방을 받아 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두었다. 그리고는 펄럭이는 돗자리 위에 앉았다. 종인이 약간 갸웃한 얼굴로 뒤의 선배들을 한 번 쭉 훑고는 세훈을 내려 보았다. 

“앉아있어도 돼?”
“사람도 이렇게 없는데.”

세훈이 너무 멀쩡하고 태연한 얼굴이라 종인도 얼떨떨하게 옆에 앉았다. 

“안 피곤해?”

물어오는 세훈의 얼굴에는 약간의 숙취나 피로가 묻어있는 것 같다. 전 날 체육대회 첫 날이라고 다들 몰아가면서 술을 퍼대긴 했었다. 다음날 경기를 기권을 하더라도 먹고 죽자던 학회장의 목청 높은 소리가 떠올라 종인은 슬쩍 인상을 썼다. 테이블이 갈리는 바람에 못 보긴 했는데 많이 마셨나. 종인은 까칠한 세훈의 얼굴을 보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해보였다. 

“별로. 넌 엄청 피곤해 보인다.”
“어. 좀.”
“왜?”
“우유가 밤새 울더라고.”
“고양이들은 많이 자는 거 아니야?”
“그러게..”

세훈이 피곤한 듯 고개를 젖히고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우유는 세훈이 주운 고양이의 이름이었다. 왜 우유냐고 물었더니 하얘서, 라고 대답하던 세훈의 무덤덤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자주 보러 가겠다고 하긴 했는데, 정작 세훈이 우유를 기르기 시작하고 나서 딱 한 번 밖에 못 보았다. 체육대회 연습 시킨다고 매일같이 소집당해서 도무지 여유가 없었다. 그마저도 잠깐 세훈의 집에 프린트물 빌리러 갔다가 잠깐 본 것이었다. 종인은 짧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손바닥만한 흰 고양이를 가만히 그려본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보고 싶네.”
“뭐가.”
“우유.”

우유. 입에 감기는 발음이 뭉근했다. 세훈이 아아, 하고 말을 늘이고는 고개를 뚝뚝 꺾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종인을 빤히 보며 그런다, 뭔가 생각난 것처럼.  

“오늘 보러 갈래?”







학교가 온통 소란했다. 잔뜩 들뜬 분위기가 좀 싫다고 생각했다. 백현은 가는 손가락 사이로 펜대를 굴리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사람이란 사람은 다 끌어 모은 시장 바닥 같은 분위기, 백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잘하고 말고를 떠나 승패의 무게가 제 어깨에 실린 운동 경기도 영 싫었다. 그래서 대학 와서는 운동은 그냥 다 흥미 없는 척 했다. 고등학교 때는 축구나 달리기 따위를 반 대표로 나가 곧잘 했던 백현이었지만 미련은 없었다. 

환기를 포기하고 창을 닫아서 강의실 안의 공기가 답답했다. 그래봐야 안내방송이 건물 안까지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백현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경수는 듣기 힘든 지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교수 역시 영 집중이 힘든지 연신 안경을 고쳐 쓰더니 결국 보드마카를 내려놓았다. 

그래봐야 삼십 분을 남기고 끝난 수업이라 딱히 호재랄 것도 없었다. 강의실 뒤쪽을 점령하고 앉은 유경의 무리가 시끄럽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여러 입을 타고 변백현, 이라는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들렸다. 경수는 힐끔 뒤를 바라보고는 백현의 옆얼굴을 살폈다. 백현은 덤덤히 가방에 물건을 쓸어 넣고 있었다. 과 CC는 깨지고 나면 이래저래 최악이었는데, 여자애 기가 저렇게 세면 더 그랬다. 백현은 눈을 내리깐 여상한 얼굴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분위기가 평소보다 다운된 것처럼 보였다. 경수의 손이 몹시 느리게 움직였다.

“밥 먹자.”

드륵, 하고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백현이 일어나 다 챙긴 가방을 메며 경수를 향해 말했다. 언제 다 챙긴 건지 백현은 이미 말끔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경수는 굼뜨게 자리를 정리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올려 떴다. 아.. 어. 그리고는 서둘러 노트며 교재를 챙겼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의외의 얼굴이 백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경이었다. 어차피 체육대회야 3학년쯤 되면, 더구나 여자애라면 신경 쓰고 자시고 할 군번도 아니겠지만, 유경의 화사한 쉬폰 원피스는 떠들썩한 학교 분위기와는 언밸런스했다. 유경은 내리쬐는 햇살에 약간 인상을 구긴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 얼굴에 걸음이 느려진 것은 오히려 경수였다. 또렷하게 울리던 이름 석 자가 괜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현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걸었다. 덕분에 경수의 걸음이 약간 쳐졌다.

“야. 변백현.”

유경이 백현의 등을 향해 뱉어낸 것은 이름 정도였다. 당황했나. 일부러 무리도 물리치고 혼자 기다리고 있던 것 같은데, 백현은 그런 수고로움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굴었다. 사실 눈치 빠른 백현은 강의실에서부터 이런 상황 정도는 가볍게 예측했을 것이다. 

“왜.”

백현이 여상한 얼굴로 뒤돌아 유경을 보았다. 

“얘기 좀 하자.”
“여기서 해.”
“다음 강의 2시인 거 알아. 자리 옮기자.”

유경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뱉은 뻔한 말에 백현이 약간 인상을 구겼다. 그동안 경수는 완전한 타인으로 우리 바깥에 존재했다. 몇 발짝 떨어져 서서 가만히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몇 번 울렸다. 천천히 나온 탓에 하필 사람도 없었다. 소란한 틈이면 차라리 나으련만. 그냥 갈까. 다음 강의는 휴강 공지가 뜬 터였다. 경수는 가만히 주머니에 넣은 손가락을 접어보았다. 도서관에 갈까. 아니면 집에 갈까.. 

잠깐의 침묵을 경계로 백현이 다소 짜증스럽게 말을 뱉어냈다. 

“안 돼.”
“…….”
“쟤랑 밥 먹으러 갈 거라서.”

그러자 유경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경수는 혼자 멍하니 경우의 수를 재다가 움찔 놀라 앞을 보았다. 유경과 눈이 마주쳤다. 백현과 유경과 제가 두어 걸음씩 사이에 두고 일렬로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경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해야 하나. 난감한 얼굴로 눈을 굴리는 경수를 향해 백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짓했다.

“가자.”

가자고 말해놓고는, 백현은 혼자 성큼성큼 걸었다. 쪽문 너머에 있는 음식점에 갈 때까지, 경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백현이 가는대로 따라만 걸었다. 백현은 당연한 수순처럼 골목을 헤치고 널찍한 음식점의 문을 열었다. 낮에는 점심 메뉴를 팔고, 밤에는 삼겹살과 술을 파는 가게는 원래 운이 나쁘면 자리가 없어 못 먹는 집인데도 한적했다. 체육대회 기간이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주인 아주머니는 달갑잖은 망중한에 느슨하게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이모, 제육 두 개요.”

백현이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주문을 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익숙하게 물수건과 물통, 컵 두 개를 놓아주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백현이 물수건으로 손을 대강 닦을 때까지, 솔직히 경수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별 거 없는 사이라지만 뾰족해진 분위기를 알 정도의 눈치는 되었다. 그런 경수를 향해 백현이 물었다.  

“무슨 눈치를 그렇게 봐.”
“어?”
“너 아까부터,”

백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는 시늉을 했다.

“이랬잖아.”

그러고는 다시 덤덤한 얼굴로 돌아간다. 경수의 입에서 머쓱한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백현도 슬쩍 따라 웃었다. 

주문을 넣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가운데 놓인 가스버너 위로 얕은 냄비가 놓였고, 계란찜이나 밑반찬 몇 종류, 공기밥이 차례로 놓였다. 백현이 가스버너에 불을 높였다. 그런 자잘한 일들은 당연하게도 백현에게 돌려졌다. 딱히 경수를 위해서였다기보다 백현에게는 원래 그래야 할 상황이 많았을 뿐이다. 백현을 거쳐간 여자들은 그런 종류의 배려에 일일이 감동했지만, 자리에 앉을 때 자연스럽게 버너가 향해있는 쪽에 백현이 앉았다는 것까지는 경수는 몰랐다. 알면 여자애 대하듯 한다고 생각할까. 백현은 속으로만 생각했고, 경수는 가만히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점심때인데도 세 개의 테이블 정도만 채워져 있었다.

“사람 없네.”
“체육대회 때문에 그런가보지.”
“안 가봐도 돼?”

백현이 숟가락을 들다 말고 경수를 쳐다보았다. 경수는 밑반찬 접시를 쳐다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과대잖아.”

그리고는 가지런한 젓가락질로 반찬을 집어 올려 입에 쑥 넣는다. 백현은 조금 놀랐다. 사실 경수는 소식에 있어 누구보다 기민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사실을 저는 지금에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상만사 관심 없이 사는 줄 알았더니.. 아까 A관 앞에서 머뭇머뭇 눈치를 보던 것도 유경과 제가 사귀다 깨진 사이임을 알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었다. 백현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입술이며 턱을 한 번 쓸어내렸다. 경수는 도톰한 입술을 우물거리며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기분이 미묘했다. 백현은 문득 도경수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

“도경수.”

그 말에 경수가 고개를 들었다. 백현은 입맛 다시듯 입술을 한 번 핥았다. 

“강의 몇 시에 끝나?”
“왜?”
“이따 저녁에 술이나 한 잔 할래?”

어? 경수가 멍하니 반문했다. 저녁에 술 한 잔 하자고. 백현이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발음했다. 경수라고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선 탈락의 여파로 낮 시간이 그저 대기시간이었다. 짬 되는 선배들은 얼굴 도장이나 찍고는 자고 온다며 들어가버리곤 했지만, 1학년인게 죄라 종인을 비롯한 다수는 그러지도 못했다. 화장실에 갔다가 과 천막으로 돌아가는 길에 알 것 같은 뒤통수가 보였다. 태형이었다. 종인은 젖은 손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어색해지는 게 싫어 먼저 다가가 오랜만, 하고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본 태형은 그냥 머쓱하게 웃었다. 

“어디 갔다 와?”
“심부름. 하루 종일 앉혀놨더니 내내 뭐 까먹느라 정신없잖아, 애들.”
“하나 줘 봐.”

종인은 태형이 양 손에 무겁게 들고 있는 비닐봉투 하나를 넘겨받았다. 제법 묵직해서 종인은 양 팔로 음료수 병이 든 비닐봉투를 끌어안듯 들어야 했다. 근방에서 물풍선 게임이라도 한 건지 길이 온통 젖어있었다. 얼마 안 가 과 천막이 보였다. 천막 아래에 똑같이 새파란 티셔츠를 입은 비슷비슷한 여자애들 무리가 보였다. 소리 높여 떠드는 중에는 태형의 여자친구도 있었다.

“잘 돼가?”

종인이 무심히 묻자 태형이 뭐..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어가 없어도 대화 소재는 뻔했다. 정작 제 얘기는 함구해버린 태형이 종인을 향해 물었다. 

“너 요즘 쟤랑 다닌다며.”

쟤, 라고 턱짓하는 태형의 시선은 세훈의 옆얼굴에 닿아있었다. 세훈은 가방이 산처럼 쌓인 돗자리 끄트머리에 무료하게 앉아있었다. 세훈은 더운지, 가늘지만 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으로 몇 번쯤 손부채질을 하더니 이내 그만 두어버린다. 종인은 그런 세훈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태형 쪽으로 눈을 돌려 대답했다. 

“어.”

그러자 태형이 눈치라도 보듯 아랫입술을 씹었다. 

“왜?”
“그냥.”

종인은 느릿느릿 말을 끄는 태형의 태도가 불편했다. 조금 더 걸어가 사람은 없지만 과 본진이 분명한 구역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태형을 보았다. 태형 역시 조금 불편한 눈초리로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는 덧붙였다. 

“사실 쟤 평판이 좀 구리잖아. 선배들 사이에 안 좋은 말도 좀 돌고.”

세상에는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말들이 몇 가지 있는데 이 역시 그 중 하나일 것이라고, 종인은 뒤늦게야 생각했다. 그리고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러자 태형은 한참이나 종인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럴 일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하다 말아.”

종인은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게 싫어 일부러 웃음을 약간 섞어 대꾸했다. 태형이 뭔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마침 유진이 저 쪽에서 태형을 찾았다. 박태형! 안 오고 뭐해! 톤 높은 목소리가 꽂혀오자 종인은 대답을 듣기는 영 틀렸다고 생각했고, 태형은 난감한 듯 말했다.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오세훈한테 물어보던가.”

태형은 내려놓았던 비닐봉투를 챙겨들고 저 쪽으로 바삐 걸어갔다. 종인은 뭔가 답답하고 찝찝스러운 기분으로, 그늘에 남겨져있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세훈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종인을 올려보았다.

“왔어?”
“응.” 

그렇게 말하며 종인은 세훈의 옆자리에 앉았다. 세훈이 약간 몸을 틀어 종인이 앉을 자리를 좀 더 넉넉하게 비웠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본다. 게임을 하던 참이었는지 몇 번 더 키를 조작하고 나서야 종료버튼을 누른다. 그늘이라 서늘하고 습기어린 공기가 감돌았다. 저 쪽 바깥은 해가 쨍쨍했다. 종인은 가만히 앉아 운동장을 가득 메운 무리를 바라보았다. 

“마실래?”

세훈이 제 쪽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바깥에 물방울이 맺힌 이온음료 캔이었다. 종인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종인이 캔을 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훈이 천천히 눈을 운동장 쪽으로 돌렸다. 운동장은 여전히 사람으로 북적였고, 작열하는 태양에 잔디가 새파랬다. 세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조그만 입술이 침착했다. 종인은 좀 전, 태형과의 대화나 표정 따위를 떠올린다. 

이런 세훈이 대체 왜?

종인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종인은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있는 음료수를 목으로 넘겼다. 







강의를 다 마치고 나니 어느새 저녁때가 되어있었다. 경수는 건물 한 면을 돌면 나오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작은 어깨나 등이 둥글게 굽어있었다. 핸드폰 만지는 요령도 없이 앉아있는 경수의 옆모습을 보며, 백현은 참.. 답다고 생각했다. 

“도경수.”

이름을 부르자 휙 돌아보는 저 얼굴. 쏟아질 듯 커다란 눈이나 조그만 얼굴 등은 흔히들 도경수를 말할 때 쓰는 개새끼, 씨발놈과는 영 매치하기가 어려웠다. 하긴, 누구나 타인을 제 기준으로 분류했다. 

“오래 기다렸냐?”
“아니.”

경수는 잠시 말을 쉬었다.

“나도 방금 왔어.”
“그래? 배고프냐?”
“그냥..”

사실 백현은 끼니 같은 것에 개의치 않았지만 어쩐지 도경수는 아닐 것 같았다. 삼시세끼 정해진 시간에 차려진 밥상 앞에 단정히 앉을 것 같은 타입이랄까. 백현은 후문에 즐비한 고깃집 중 한 군데를 골라 들어갔다. 자주 가던 가게도, 서비스가 좋은 가게도 아닌 집에 들어간 것은 발 넓은 백현이 제게 아는 척 하는 얼굴이 아예 없을 법한 곳을 골랐기 때문이었다. 

주문을 넣고 나자 뻣뻣하게 얼어있던 냉동 삼겹살과 야채 몇 종류 그리고 소주 한 병이 테이블에 세팅되었다. 백현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일회용 물수건에서 알콜 냄새가 났다. 고기집게의 머리가 경수 쪽으로 향해있었다. 백현은 눈을 내리깔고는 손을 꼼꼼하게 닦고 있었다. 힐끔 백현 쪽을 살피던 경수가 집게를 들었다. 불판에 날고기를 올리는 경수의 동작은 어쩐지 어색해보였다. 손을 닦고 난 백현은 갸웃한 얼굴로 경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경수는 상황 자체가 어색한 게 아니라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리 줘.”

백현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경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백현을 바라보았다. 경수는 일일이 겁먹고 놀란 얼굴을 했다. 백현은 경수의 손에 들린 집게를 넘겨받았다. 그러자 경수가 소리 없이 아.. 하고 중얼거렸다. 백현은 테이블의 중앙에 놓인 고기접시를 제 쪽으로 조금 당겼다. 그리고는 버섯이며 마늘 따위를 불판에 올렸다. 치익, 하고 연기가 피었다. 어쩐지 경수의 얼굴은 그새 벌겋게 물든 것 같았다. 백현은 불판 밖으로 떨어질락 말락한 버섯을 안으로 긁어 넣으며 말했다. 

“너 영 허당이구나.”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경수의 얼굴을 한 번 본다. 정말 귓가며 뺨이 발간 것이 민망한 모양이었다. 경수가 홧홧한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눈을 깔았다. 저러니까 꼭 계집애 같네. 민망하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백현은 중얼거리듯 덧붙인다.

“못하는 것도 있고..”

백현은 잠시 하던 말 사이에 익었나, 하고 추임새 비슷한 의문을 넣었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보기보단 인간적이네.”

눈은 계속 불판을 향해있었다. 반면 경수는 도무지 눈 둘 데를 못 찾는 것 같았다. 삼겹살의 가장자리가 약간 타서 거뭇했다. 백현이 가위를 들어 썩둑썩둑 고기를 잘랐다. 그리고는 익은 고기 몇 점을 경수의 앞접시에 툭툭 던지듯 놓았다. 경수는 멀뚱히 그것을 내려 보고만 있었다. 백현은 손에 든 집게로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으며 눈짓했다. 

“안 먹어?”

그러자 경수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백현을 한 번 보고는 머뭇거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치익치익 고기 타는 소리와 드문드문한 사람들의 잡음을 뒤로 하고 백현이 말했다.

“근데 너 원래 그렇게 말이 없냐.”
“어?”
“아니. 맨날 내가 먼저 말해야 말하잖아.”
“……미안.”
“별로. 미안하라고 하는 말은 아니고.”
“…….”
“불편한가해서.”

백현은 익은 고기 몇 점을 경수의 접시에 더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불을 줄이고 저도 젓가락을 놀려 고기를 집어 들었다. 경수는 가만히 그런 백현을 쳐다보다가 불판 위의 고기를 백현 쪽으로 밀어둔다. 

아. 좀 어색한가. 백현은 속으로만 생각해본다. 경수도 이 상황이 썩 편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오버였나. 어색할 땐 알콜이 답이었다. 백현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소주병을 들었다. 그리고는 경수를 향해 병을 들이밀었다. 경수가 몇 초간 굼뜨게 백현을 바라보다가 잔을 들었다. 손끝이 긴장한 것도 같았다. 가득 채울까 하다가 3분의 2 지점에서 멈췄다. 그러자 경수가 채워진 잔을 어색하게 들고만 있었다. 마셔야하나 고민하는 것이 백현의 눈에 훤히 보였다. 

“너만 먹냐. 나도 줘야지.”

백현이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자, 경수가 머뭇거리며 술병을 넘겨받았다. 어색한 동작과 손짓이었다. 







핸드폰이 책상 위에서 미친 듯이 진동했다. 책상과 마찰하며 나는 소리가 엄청나게 거슬린다. 찬열은 누운 채로 팔을 길게 뻗었다. 아슬하게 걸쳐진 핸드폰이 손에 닿을 듯 말 듯 결국 닿지 않는다. 에이씨..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기어이 핸드폰을 들고 액정을 보니 떠 있는 이름은 김준면이다. 아. 찬열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었다. 고작 이름 석 자에 반응하게 된다. 찬열은 큼큼,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서야 통화키를 밀었다.

“여보세요.”
“나야.”

나. 
준면은 항상 무슨 자신감인지, 저를 그렇게 지칭했다. 찬열이 대꾸하지 않고 있자 준면이 알아서 서두를 뗐다. 

“부탁 좀 하자.”

알고는 있었지만, 준면은 용건 없이 전화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목적 없는 전화에 대고 목소리 듣고 싶어서, 따위의 말을 듣는 일은 그의 여자친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김준면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찬열은 때때로 기대했고 번번이 실망했다. 

“말해요.”

찬열의 낮은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 음성은 약간의 귀찮음을 수반한 것처럼 들렸다. 

“내일 학교 오지?”
“네.”
“수업 몇 신데?”
“세 시요.”
“그래?”

준면이 잠시 뜸을 들였다. 말을 고르거나 망설이는 건 준면의 성격을 미루어 보아 아닌 것 같고, 그냥 하던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라고 찬열은 생각했다. 사실 준면이 조용한 학교 외곽까지 나가서 전화를 거는 수고를 하고 있다는 것, 찬열은 전혀 모른다. 준면은 고개를 한 번 들어 하늘을 보았다가 다시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별 하나 없이 흐린 하늘을 보니 내일은 비가 올 것 같기도 했다. 준면은 괜히 빈 손을 꼼지락거려 티셔츠 밑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찬열은 조용히, 그 틈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좀 일찍 나올 수 있어?”

한참 만에 말이 뱉어졌다. 찬열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거야 어렵지 않지만.. 늘어지는 말에 정적이 끼어들었다. 준면은 확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왜요?”
“정민이가 다쳐서.”

아.. 찬열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찬열은 순간, 더 말하지 말라고 일갈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준면은 찬열에게 어떤 용건도 갖게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확률이었지만 찬열에게 기댈 것 또한 그 뿐이었다. 찬열은 조용히 준면의 말을 기다렸다. 

“농구 머릿수만 대충 채우면 될 것도 같아서. 좀 도와달라고.”
“……그럴게요.”
“어. 내일 늦지 말고.”
“알았어요.”

차분히 대답하는 찬열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준면도 알 정도가 되었다. 준면은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름이 가깝네 마네 해도 아직 밤은 싸늘했다.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반대편 팔을 한 번 쓸어본다. 차갑다. 술이 덜 들어갔나. 준면은 괜히 얕게 한숨을 한 번 내뱉었다. 그리고는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뭐, 화난 건 아니지?”

일찍도 물어본다. 조금은 섬세해진 준면의 말투에 찬열은 외려, 들리게끔 혀라도 차버리고 싶지만 꾹 눌러 참는다. 

“아니에요.”
“밥은 먹었고?”

이것도 참 일찍도 물어본다.. 벌써 아홉시였다. 밥이고 뭐고 드러누워 얕은 잠을 자느라 건너뛰었지만, 이 역시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닐 터였다. 찬열은 대강 대답한다.

“먹었어요. 형은요. 학교예요?”
“어.”
“조용하네요. 그럴 사람들이 아닌데.”

찬열은 말을 뱉고서 준면의 주변 사람들을 떠올렸다. 얼굴은 잘 모른다. 관심도 없었다. 그저 그 왁자함만이 잔상처럼 남았다.

준면은 밝았으나 차분하고 그러면서도 빈틈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주변 사람들은 죄다 시끄러운 사람만 모아놓은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찬열의 눈에는. 준면을 아는 모두가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고, 준면을 좋아했다. 찬열은 준면이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그것은 그의 주변인 모두를 부정하는 말이 될 수 있었다. 이쯤 해두자.. 찬열은 귀와 어깨로 핸드폰을 지지하며 손가락을 뚝뚝 꺾었다. 

“적당히 마셔요. 나 내일 몇 시까지 가요?”
“경기 12시라니까.. 그 전에만 와.”
“알았어요. 들어가요.”
“어.”

대답과 함께 끊어도 됐을 전화에, 찬열은 뒤늦은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내일 봐요.”

돌아오는 말없이 전화가 끊겼다. 종료와 동시에 찬열은 후회했다.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지듯 내려놓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제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치이는 사람이란 거 알고, 그래서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고 싶은데.. 왜 자꾸 멀어지게 만들까. 제가 품는 기대가 욕심이라는 것을 알아서 스스로도 답답했다. 찬열은 항상 어제를 바랄 수 없었고, 지금을 바라지 않았다. 









07.




현관에 발을 들이자 정면의 창에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문을 열어두고 나갔는지 집 안이 시원했다. 먼저 발을 들이며 세훈이 들어와, 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종인은 운동화를 던지듯 벗었다. 하루 종일 밖에서 흙먼지에 절어있던 탓인지 몸에서 흙비린내가 올라왔다. 세훈은 종인이 문을 채 닫기도 전에 입고 있던 상의 허리춤을 잡아 위로 끌어당겨 벗어던졌다. 안에 받쳐 입었던 민소매 티셔츠가 약간 젖어 몸에 달라붙어있었다. 

“에어컨 켤까?”

세훈은 더운 듯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희게 질린 얼굴에 반쯤 감긴 눈으로 종인을 향해 물었다. 종인은 느리게 들어와서는 구석에 몸을 늘인 고양이에 시선을 붙이고 있었다. 귀찮다는 듯 눈길 한 번 안주는 고양이를 한 번 쓰다듬어보지도 못하고 빤히 쳐다만 보고 있다. 세훈은 제 아래를 내려 보며 그저 옅게 웃었다. 곧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켠 세훈이 어슬렁거리고 집 안을 휘저었다.

“뭐 좀 시켜 먹을까?”

냉장고에 붙어있는 야식집 책자를 떼며 중얼거리자 종인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느릿하게 시선을 옮기며 그런다. 

“어. 근데 나 먼저 좀 씻어도 돼?”

종인이 못내 찝찝한 듯 티셔츠 끝자락을 끌어당겼다. 얼결에 나간 경기에서 물풍선이 제 앞에서 터지는 바람에 곳곳에 물이 튀어 옷이 약간 젖어있었다. 세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는 책자를 대충 넘겼다.  

“뭐 시킬까?”
“아무거나.”

정말 아무거나 상관없을 정도로 종인은 가리는 것이 잘 없었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없었다. 종인은 원래 가진 기호가 뚜렷하지 않았다. 화장실로 냅다 들어가려는 종인을 잠깐만, 하고 저지시킨 세훈이 갈아입을 옷가지를 가져와 내밀었다. 

“수건 안에 있으니까 쓰고.”
“어어.”

종인이 대충 대답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은 김에 머리까지 감고 나오자 낮은 탁상에 그새 배달 온 피자 박스가 펼쳐져 있었다. 원래 오래 씻는 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그렇게까지 지났나 싶어 슬쩍 시계를 한 번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흥 없는 얼굴로 피자를 먹고 있던 세훈이 흘긋 눈짓을 했다. 세훈은 뭐든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품 큰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종인은 푹 젖은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 쓴 채였다. 종인은 세훈의 맞은편에 털썩 앉아 콜라를 병째 벌컥벌컥 마셨다. 탄산에 목이 따가워져 크, 하고 인상을 썼다. 세훈이 조금 웃었다. 종인은 피자 한 조각을 떼어 들다가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세훈을 쳐다보았다. 

“우유는 뭐 먹어?”
“사료 먹지.”

세훈이 별 걸 다 묻는다는 듯 웃었다. 그리곤 깨달았다는 듯 밥 줘야겠다, 하고 중얼거리더니 일어서서 싱크대 쪽으로 간다. 허리를 구부리고 선반을 뒤지는 뒷모습을 힐끔 본 종인이 먹던 피자를 내려놓고 고양이를 끌어당겼다. 하얀 등을 쓰다듬자 그르릉 소리를 내며 몸을 길게 늘인다. 

“우유, 말은 잘 들어?”
“화장실은 잘 가리던데.”

세훈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사료 그릇을 대충 책상에 올려두고는 가까이 다가온다. 조심스럽게 털을 쓰다듬는 종인과는 달리 고양이를 덥썩 들어 올리더니 종인을 향해 손을 뻗는다. 

“자. 안아봐.”

그 말에 종인이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종인을 보는 세훈은 재밌다는 듯 웃는 얼굴이다. 얼른. 재촉하는 말에 종인은 엉성하게 품 안으로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팔에 따뜻한 체온과 물컹한 감촉이 와 닿자 종인은 우습게도 긴장했다. 그 어설픈 동작에 고양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몸부림치듯 품을 벗어나고 말았다. 세훈이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우유 이리와. 세훈은 다시 일어나 치워두었던 사료 그릇을 툭 내려놓고 빈 그릇에 물을 따랐다. 그러자 고양이가 푸르르 작은 몸을 떨고는 가까이 와서 물을 핥았다. 정해진 수순 같은 그 동작을, 세훈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물어가는 해의 마지막 햇살이 벌겋게 세훈과 그 주위를 물들이고 있었다. 종인은 그 광경이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했고 세훈은 곧, 그런 종인을 쳐다보며 낮게 웃었다. 







“영화 볼래?”
“뭔데?”

한참 먹고 무기력하게 늘어져있던 종인이 눈을 들었다. 세훈은 엎드려 누운 종인의 옆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종인은 느리게 하품했다. 졸려? 아니.. 목소리가 늘어졌다. 사실은 조금 졸린 것도 같았지만 종인은 그렇게 대답했다. 

“두 번째 사랑이라고.. 봤어?”
“아니.”

몸을 뒤집은 종인이 짧게 텀을 두고 물었다. 

“재밌어?”
“그냥. 좋아하는 거라서.”

대답을 듣지 않고도 틀 생각이었던지 세훈은 몇 번 타닥거리고 노트북 키를 두드렸다. 종인은 바닥을 짚고 일어나 앉았다. 관절 꺾이는 소리가 났다. 세훈의 잠을 훼방 놓는다는 고양이는 팔을 길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고롱고롱 잠들어있었다. 

세훈이 튼 영화는 상식 밖의 이야기였다. 임신을 위해 돈을 주고 남자를 사서 몸을 섞다가 사랑에 빠지는 남녀의 대조적인 피부색은 이야기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세훈은 집중한 얼굴로 잡음 하나 만들지 않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드물어도 있음직 하지만, 있어서는 안 될 내용의 영화를 보면서 종인은 세훈의 취향에 대해 생각했다. 전에 같이 보았던 영화에 힘겹게 하품을 하던 세훈의 옆얼굴. 종인은 손을 꺾었다 접었다 하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몇 번쯤 자세를 바꾼 끝에 느슨하게 앉은 종인의 옆에서 꼿꼿하게 앉아있던 세훈이 불쑥 일어섰다. 

“나 좀 씻고 올게.”
“정지시킬까?”
“괜찮아. 많이 봤던 거라.”

그리고는 세훈은 미련 없이 씻으러 들어갔다. 단단하게 밀집된 공기가 한 번에 흩어졌다. 곧 물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규칙적으로 튀는 소리가 꼭 자장가 같아 종인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세훈이 없어지고 나자 졸음이 확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는 어두운 화면에 끈끈한 감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졸린가.. 영화가 어디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 세훈이 문을 열고 나왔다. 후끈한 습기가 방 안으로 끼쳤다. 

세훈의 덜 마른 몸에서 풍기는 냄새는 제 몸에서 나는 것과 같은 산뜻한 자몽 냄새였다. 세훈은 다시금 종인의 옆에 앉아 푹 젖은 머리칼을 털었다. 종인의 뺨에도 물 몇 방울이 튀었다. 종인은 길게 하품했다. 세훈은 머리카락을 말리면서도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세훈은 쉽게 집중했다. 몇 번이나 보았다는 매끄럽지 못한 영화를, 세훈은 엄청나게 열중해서 보았다. 종인은 감기는 눈을 부비다가 말했다. 

“나 누울래.”

목소리가 피곤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자 세훈은 몸을 비틀어 자리를 내주었다. 금방이라도 잠들어버릴 듯, 종인의 눈이 감겼다 뜨이는 간격이 몹시 길어졌다. 세훈은 노트북 볼륨을 줄였다. 그리고는 길게 누운 종인을 내려 보다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삐걱이는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곧 베개를 가지고 내려와서 종인의 옆에 앉은 세훈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 들어봐.”

그러자 잠이 들락 말락한 종인이 머리를 조금 띄웠다. 세훈은 그 아래로 조심스럽게 베개를 밀었다. 종인이 눈을 길게 감고는 등을 구부정하게 말았다. 무거운 눈을 간신히 들었을 때, 화면으로는 길게 누운 금발의 여주인공이 비쳤다. 익숙한 얼굴의 남주인공이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여자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사랑해요. 절절하게 젖은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눈이 감긴 것이었다. 혼몽 속에서 같은 대사가 한 번 더 조용하게 뱉어졌다. 세훈의 목소리 같았다.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세훈은 잠들어있는 종인과 고양이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팔을 뻗으면 종인에게 가 닿을 수 있었다. 세훈의 손이 종인의 머리카락 부근에서 내려앉을 듯 말 듯 배회하다가, 결국 거두어졌다. 세훈은 작게 한숨을 쉬었고, 둘 다 깨지 않고 달게 잠들어 있기를 바랐다. 







누구나 그렇지만 어색하면 술이 빨리 들어갔다. 백현과 경수가 소주 한 병을 거의 균등하게 나눠마셨을 때의 시간은 사실 그렇게 늦지 않았다. 가게 안의 테이블이 반쯤 차 있었고 그럼에도 연기가 자욱했다. 반은 구워지는 고기에서 반은 담뱃불에서 나온 것이었다. 백현은 까맣게 타버린 불판을 한 번 보고는 삼겹살 1인분과 소주 한 병을 더 추가했다. 아주머니는 빠르게 불판을 갈아주고는 주문한 고기와 소주, 서비스 콜라를 놓고 갔다. 

둘 사이에는 별 말 오가지 않은 상태였다. 흐르는 이야기는 주로 수업이나 과제, 교수를 소재로 했다. 같은 과라면 누구나 섞을 수 있는 말들이었다. 경수는 대개 조용히 웃고, 간간히 몇 마디의 말을 했다. 중간고사가 까다로웠다거나 하는 이야기였다. 백현은 타고나길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문득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너 김민혜 알지?”
“……응.”

경수가 눈썹을 약간 휘어뜨리며 대답했다. 김민혜는 자타공인 과에서 제일 예쁜 동기였다. 남자라면 안 좋아해본 애가 없다는 민혜의 이름을 들먹이자 경수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백현은 보다 헤프게, 헤퍼보이게 웃었다. 

“나 1학년 학기 초에 걔한테 고백했다가 까인 적 있어. 완전 야무지게 채였는데.”

백현의 말은 가볍게 이어졌다. 솔직히 안 될 거라고 생각 안했는데 진짜 무 자르듯 쳐내더라고. 경수는 그런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백현을 쳐다보았다. 굳게 닫힌 입술을 바라보던 백현이 제 아랫입술을 한 번 핥았다. 바싹 말라있었다. 백현은 짐짓 태연한 척 고기 집게를 집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같은 동작으로 남은 고기를 다 불판에 올렸다. 그리고는 경수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빨리 친해지는 데는 남들 모르는 비밀 같은 거 주고받는 게 최곤 거 아냐.”

그 말에 경수가 커다란 눈을 약간 가늘게 좁혔다.

“나 김민혜한테 채인 거 아는 사람 별로 없어. 걔. 나. 이제 너까지.” 

백현의 말에 담긴 함의는 분명히 저를 향한 것이었다. 경수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짙은 눈썹이나 도톰한 입술이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백현은 경수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가는 손끝이 경수가 가져올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처럼 경쾌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경수는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 심각한 표정을 풀지도 않고 혼자 소주를 꼴꼴 따르더니 고개를 옆으로 틀고 원샷했다.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는 경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야, 누가 너랑 술게임 하자고 했냐.”

백현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나 너한테 뭐 대단한 거 말하라는 거 아니거든?”

보다 노골적인 요구성 발언에 경수는 눈썹을 구기고 물을 마셨다. 백현은 어이없다는 듯 파, 하고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익은 고기를 경수 쪽으로 밀었다. 술자리에서 본 적이 당연히 없었기 때문에, 경수의 주량은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수는 한 잔 두 잔 술을 늘려갔다. 백현이 계속해서 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시간은 백현의 편이었다. 백현이 과에서 두 번째로 사귀었던 선배와의 섹스를 얘기를 꺼내자, 경수는 진심으로 괴롭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소주 한 병을 추가했다. 

빈 소주병이 세 병, 반쯤 비운 소주병 하나가 테이블에 채워졌을 때였다. 거의 경수가 마신 것이었다. 생각보다 셌다. 사실 백현은 경수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더디게 가는 시간과 알콜은 경수를 괴롭히고 있었다. 혀가 조금씩 꼬이기 시작한 경수가 낮게 말했다.

“나는 뭐든 다 얘기해. 비밀 같은 거 없어.”

누구에게인지는 몰랐지만, 백현은 그 때 알았다. 진짜가 나올 거라는 걸. 그리고 진짜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제가 될 것이다. 백현은 입을 꾹 다물고 경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큰 눈을 간수도 제대로 못하고 느리게 꿈뻑이는 경수의 얼굴을, 백현은 잠자코 지켜만 보았다.

“비밀. 그래. 하나 있다.”
“…….”
“니가.. 뭐든 좋댔으니까.”

경수의 손이 테이블을 한 번 짚었다. 핸드폰이라도 찾는 지 더듬어지던 손이 곧 이마로 향했다. 바짝 깎은 손톱에 잠시 백현의 눈이 닿았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몇 번쯤 고개를 젓는 얼굴을 보며, 백현은 숨을 급히 삼켰다. 경수는 띄엄띄엄하게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게 누군데.”

그간 잘 참아왔건만 백현은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물었다. 경수의 눈이 감겼기 때문이었다. 경수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백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경수는 거기까지였다. 쿵. 경수의 작은 머리통이 테이블로 수직낙하했다.







체육대회 마지막 날이었다. 소수 학과들만 여전한 축제 분위기였고, 곳곳에 빈 천막이 많았다. 그마저도 얼굴만 가리고 드러누운 사람이 태반이었다. 교내에 쩌렁쩌렁하게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영학과와 토목공학과 농구 준결승전에서 경영학과가 결승에……. 파지직하는 소음이 섞였다. 준면은 찬열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 결과는 머릿수만 채우러 온 찬열이 제 몫 이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수업이 있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찬열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앉을 자리를 찾는 것처럼 느리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찬열은 천막 구석에 놓인 플라스틱 간이 의자를 끌어다놓고 앉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후배들이 말 붙이는 것도 불편하고, 신경써주는 것도 달갑지 않아 땀이나 식히고 갈 참이었다. 준면이 하라는 대로 머릿수를 채웠으니 할 일은 끝난 셈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찬열보다 머리 두 개쯤 작은 여자 후배가 스포츠 타월을 주고 갔다. 수건 귀퉁이에는 학교 로고와 함께 H대 경영학과라고 정직한 로고가 박혀있었다. 이런 촌스러운 짓은 역시 김준면다운 일이다. 찬열은 수건으로 대충 목덜미를 닦았다.

그런 찬열의 눈앞으로 불쑥, 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새파란 캔을 쥐고 있는 손. 손등 위로 툭툭 불거진 핏줄. 올려보니 준면이 맞았다. 준면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듯 말간 얼굴로 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안 받아?”

찬열은 내밀어진 캔을 받는 대신 준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내려다 볼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이거 안 좋아하나?”

준면은 손이 무안한지 혼잣말처럼 중얼대며 캔을 몇 번 흔들었다. 찬열은 느릿느릿 손을 뻗어 캔을 받아들었다. 준면이 음료수를 쥐느라 약간 젖은 손을 바지에 대강 문질러 닦았다. 찬열은 무심히 팝탑을 밀어젖혔다. 치익, 소리가 났다. 준면은 찬열의 무표정한 얼굴과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쳐다보다가 무슨, 감상처럼 말했다. 

“고마워.”
“뭘요.”

찬열은 여상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음료수를 마셨다. 툭 불거진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준면은 팔짱을 끼고는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준면이 본 지금의 찬열은 무언가에 지친 얼굴에 평소보다 텐션이 낮았다. 

“어디 아파?”
“아뇨?”

오히려 모를 말이라는 듯 찬열이 눈을 크게 올려 떴다. 가만히 있어도 큰 눈이 더 크게 뜨였다. 준면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다들 늘어져있었다. 다음 경기는 다섯 시였다. 수업이 있는 지 물어봐야 할 텐데, 뭔가 말을 꺼내는 것조차 내키지 않는다. 준면은 조용하게 덧붙였다. 

“평소 같으면 뭐라 중얼중얼 태클도 걸고 그러는데 조용하네.”
“형이야말로..”

찬열은 잠시 말을 쉬었다. 뒤로 떠들썩한 여자애들 웃음소리가 터졌다. 

“오늘따라 왜 다정하고 그래요.”
“…….”
“미안한가봐요?”

거기까지 말한 찬열이 느린 눈길로 준면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젖혀 음료수를 털어 넣었다. 준면은 커다랗게 열린 눈으로 멍하니 찬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느낌에 헤메고 있을 때, 뒤에서 준면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준면오빠, 여기요.. 준면은 그 말에 급히 자리를 떴다. 찬열은 웃지 않는 얼굴로 그 등을 바라보았다. 돌아서는 준면의 귓가가 붉은 듯도 싶었다. 







원래 학교 가까이 사는 애들이 지각이 잦다고, 매번 정각에 맞춰서 강의실에 들어오는 백현인데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빨랐다. 백현은 비어있는 앞자리를 보고 경수를 떠올렸다. 

어젯밤, 정신을 놓을 정도로 취한 경수의 모습에 백현은 적잖이 당황했었다. 계산을 하고 경수의 등을 흔들어 깨울 때만 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죽은 건 아니겠지. 야, 일어나봐. 그러자 경수는 푹 잠긴 눈을 하고는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백현을 만류했다. 됐어. 혼자 갈 수 있어.. 그리고는 지갑까지 뒤져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내려놓고는 비척비척 나가버렸다. 

솔직히 그 정도로 마셨으면 수업을 제낄 수도 있겠지만, 아마 도경수는 올 것이다. 전공 필수 과목이고 3학점짜리다. 수업 시작 직전에야 경수가 왔다. 깬 지 얼마 안 된 얼굴이었다. 경수가 들어오고 정말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교수가 들어왔다. 백현은 황급히 제 친구들을 다 물리치고 가방을 챙겼다. 야, 변백. 어디 가. 같이 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대충 둘러대자 몇몇이 대놓고 혀를 찼다. 경수는 제 옆으로 온 백현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처음도 아니면서.

교수의 출석이 이어졌다. 백현은 제 차례에 손을 들고나자마자 몸을 낮추며 경수를 향해 속삭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야?” 
“뭐?”
“궁금해서 잠도 못 잤다. 이름. 빨리.”

퇴로를 차단한 백현의 질문에 경수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다가 혼잣말인지 물음인지 모를 말을 뱉어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 어제 실수했나.”
“야, 니가 무슨 기집애도 아닌데 실수할 게 뭐 있냐.”

백현은 기가 찬다는 듯 대답했다. 출석부 호명을 끝낸 교수가 전공 교재를 휘릭 넘겼을 때, 경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경수의 기억은 드문드문하게 잘리고 끊겨있었다. 숙취가 뒤늦게 밀려드는 것 같았다. 늦잠을 자느라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온 속이 쓰렸다. 백현이 전공 교재 귀퉁이에 누구, 라고 두 글자를 써서 제 쪽으로 밀었다. 이미 강의는 시작 됐는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백현과 가까워지고 나서부터 제 생활이 엉망이었다. 진심으로 머리가 아팠다. 









08.




찬열은 제 앞으로 따라지는 소주를 받으며 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옆 테이블의 준면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술을 받고 있었다. 맥주다. 자세히 지켜보니 건배만 하고는 내려놓는다. 차 가져와서 안 된다는 준면의 말에 원성이 터졌다. 원래 준면은 술을 잘 못 한다. 분명 어제도 죽자고 마시는 무리에서 곤란하게 웃으며 주는 술 다 받아 마시다가 한 차례쯤은 속을 게워냈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짧게 혀를 차는 찬열에게, 테이블에 앉은 여 후배가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건배해요. 찬열은 제 손에 어정쩡하게 들린 소주잔을 한 번 쳐다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그러자 테이블에 앉은 여자애들 여럿이 잔을 가져다대며 저두요, 저두요,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분위기는 분명 불편했다. 그럼에도 온 것은 준면이 잡았기 때문이었다. 농구 결승 경기까지 뛰고 나자 몸이 피곤했다. 준면은 안 해도 된다는 전제를 붙였지만 사실 찬열이 준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경기는 근소한 차이로 졌고 과 천막으로 돌아온 찬열이 가방을 들었을 때, 준면이 다가와 제 팔을 잡았다. 가게? 좀 있다가 가지. 찬열은 그 말에 손에 들린 가방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찬열은 아싸나 다름없었고, 과 활동도 안 해서 아는 후배도 없었다. 남은 목적은 뻔했다. 그래도 제가 잡은 건데 신경이나 써주지 않을까 해서. 그랬던 준면은 지금 저 쪽 테이블에 잡혀 게임이나 하고 있다. 눈을 활짝 접어가며.

잔에 든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고 나자 옆에서 안주를 챙겨주었다. 젓가락 째로 입에 들이미는 후배의 적극적인 동작에 찬열은 머쓱하게 웃었다. 소리 높은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테이블엔 저 빼고 전부 여자였다. 1학년이라더니 찬열이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들 떠들었다. 화두에 오른 것이 찬열 저였다. 농구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왜 과 활동 안 하세요, 번호 주실 수 있으세요, 종알거리는 입들이 전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좀 지친다고 찬열은 생각했다. 그 때였다.

“근데 선배님 되게.. 잘생기셨어요.”

옆에 앉은 여 후배는 분명 농담조로 가볍게 뱉으려 한 말 같은데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렸기 때문이었다. 찬열은 미묘한 진동의 세기를 알았지만 모른 척 하기로 한다. 고마워. 쑥스러운 척 웃었다.

“여자친구 있으세요?”
“아니.”

사실을 뱉었을 뿐인데 테이블에 우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감출 수 없는 흥분에 옆 테이블에서 쳐다보는 눈들이 늘었다. 준면도 그 중 하나였다. 준면의 동그란 눈이 저를 향했다가 이내 거두어졌다. 찬열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어쩐지 입이 달았다. 몇몇 여자애들은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타이밍을 재는 그 얼굴들에 대고 찬열이 민망한 듯 눈을 깔았다.  

“근데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

찬열이 잔을 들자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가 곧장 소주를 채웠다. 가득 따르는 모양새가 보지 않아도 실망한 입술을 하고 있음을 알 것 같았다. 좀 재수 없지만 찬열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학교 사람이에요?”
“그것까진 좀.”

맞나봐, 저희들끼리 얼굴 각도를 낮추고 떠들지만 찬열의 귀에는 다 들렸다. 어떻게 소설을 써도 정답에는 가닿지 못할 터였다. 찬열은 쏟아지는 말을 잘 걸러 들었다. 누굴지 진짜 궁금하다. 그치? 일부러 들으라는 듯 조금 커진 소리로 들린 말은 찬열을 떠보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찬열은 가득 찬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저쪽에 있는 준면을 한 번 흘긋 본다. 제 앞으로 권유되는 술을 난감하게 물리며 웃는 얼굴. 뭐라고 불평하고 속앓이를 해도 막상 이렇게 보면 또 좋았다. 속도 없지.. 찬열은 천천히 눈을 거두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지 예뻐.”

그러자 테이블에서 또 원성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가 높아졌다. 준면은 또 이쪽을 쳐다보았을까.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찬열은 가득 찬 잔을 들었다. 가봐야 돼서 그러는데 막잔하자. 아쉽다느니 하는 말로 붙잡힐 찬열이 아니었다. 찬열은 잔을 비우고는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문질러 닦으며 일어섰다.

보폭 큰 걸음으로 다가가 준면의 어깨를 슬쩍 짚었다. 그러자 동그란 눈을 올려 뜨고 저를 본다. 커진 눈과 꾹 다물린 입술을 가만히 내려 보던 찬열이 조용히 말했다. 

“갈게요.”
“가게?”

준면이 놀란 듯 눈을 크게 치떴다. 그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덕분에 준면이 앉아있던 테이블의 모든 시선이 찬열과 준면에게로 향했다. 찬열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으므로 당황스럽다는 듯 인상을 약간 찡그렸다. 

“있어서 뭐해요.”

그 말에 준면은 제가 앉았던 테이블 사람들을 돌아보며 신경 쓰지 말고들 놀아, 하고는 아예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불쑥 찬열의 팔을 잡았다. 

“그럼 데려다줄게. 좀만 있어봐.”
“됐어요. 금방 가요.”
“내가 불편해서 그래. 기다려봐.”

그리고는 혼자 뭐가 그리 바쁜지 술집 안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저쪽 테이블에 있는 부학회장 후배를 붙들고 잠시 뭐라 설명을 하는 준면의 옆얼굴을 보았다. 현운지 현균지 이름도 헷갈리는 후배가 준면의 어깨 너머로 찬열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찬열은 짧게 혀를 찼다. 기대나 하게 하질 말라고. 그래도 그 마저도 좋아서 약한 짜증이 치밀었다.







준면의 차는 드물게 깨끗했다. 몇 번 얻어 탈 때마다 신기했다. 아버지에게서 넘겨받았다는 구형 비엠은 어딘가 김준면다웠다. 찬열은 조수석에 앉아 차 안을 휙휙 둘러보았다. 껌 한 통, 주유소에서 나눠주는 휴지나 생수 외엔 뭣도 없었다. 뒷좌석에 놓고 다니는 테니스 라켓 정도가 유일한 짐이었다. 

라디오조차 틀지 않는 준면의 습관 덕에 차 안은 조용했다. 언젠가 왜냐고 물었더니 시끄러우면 운전을 못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찬열은 운전을 하는 준면의 말끔한 옆얼굴을 한 번 보고는 껌 통을 들었다. 손바닥에 툭툭 털자 네 개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찬열은 그것을 모조리 입에 털어 넣었다. 알싸하면서도 싫은 단맛이 입에 퍼졌다. 

“오늘 수고했어.”

준면이 말했다. 목소리가 깨끗했다. 찬열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 얼굴을 본다. 앞만 보고 운전하는 준면의 얼굴은 담담한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제 말 한마디에 별 다른 불평 없이 끌려 다니는 찬열을, 준면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떤 답이 나올 지 몰라 직구를 던진 적은 없었다. 찬열은 창틀에 기대듯 고개를 꺾고는 물었다.

“가끔.. 내 생각해요?”

여전히 준면은 앞만 보고 있다. 손가락 끝이 움찔하고 긴장했으나 이내 차분해졌다. 준면은 모르지 않았다. 찬열이 어떤 눈으로 저를 보는 지.. 준면은 그 뜨거운 눈을 내치지도 끌어  안지도 않은 채 항상 관망하고만 있었다. 찬열은 틈을 비집고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가끔이라도 내 생각하긴 해요?”
“……매일, 늘 하고 있어.”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고, 그저 푸념에 가까운 말이었으므로 찬열은 짐짓 놀랐다. 커다란 눈이 온전히 준면을 향했다. 사이의 거리가 좁았다. 찬열이 긴장으로 굳어 마른 침을 삼켰다. 준면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차체가 가볍게 코너를 돌았다. 

“너 내 머릿속에 들어앉았잖아.”

내려앉는 말에 몇 잔 마시지도 않은 술기운이 끼치며 머리가 도는 것 같아, 찬열은 잠시 창밖을 보았다. 그렇고 그런 풍경이 제가 내릴 곳이 가까워옴을 알리고 있었다. 준면은 한 번 와본 후로는 같은 길을 묻지 않았다. 준면의 차가 섰다.

준면은 차를 세우고도 찬열 쪽은 쳐다보지 않는 채다. 뭔가를 뒤적거리는 폼이 아마 담배를 찾는 것 같았다. 준면이 손을 여기저기로 놀리며 중얼거렸다. 도무지.. 

“나가질 않네.”

찬열은 그런 준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아마 담배는, 대시보드 깊숙한 곳에나 들어있겠지. 

“그런 말은 좀..”
“…….”
“웃으면서 하면 안돼요?”
“웃으면.”

그제야 준면이 찬열을 보았다. 이제 담배 찾는 것을 포기한 듯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시선이 똑바로 마주 닿았다.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저를 올려보는 것에, 찬열은 속이 싸하게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준면의 입술이 천천히 휘었다. 눈은 가라앉아있는데 입술은 웃는다. 준면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웃으면 그 의심이 좀 사라져?”

준면이 손을 뻗어왔다. 찬열의 머리카락을 쓱쓱 쓸어내리는 손길이 제법 부드러웠다. 

“나 너 안 싫어해.”
“…….”
“오히려 좋아하는데.”

감당 못 할 말은 뱉는 게 아닌데. 어쨌거나 이쯤에서 조르는 건 그만두라는 말이다. 찬열은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지지만 그냥, 애써 웃었다.

“그럼 됐어요.”
“박찬열.”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술 적당히 마시고 잠은 집에 가서 자요.”

준면이 제 이름을 불렀지만, 찬열은 제 할 말만 빠르게 뱉고는 차문을 닫았다. 툭 닫힌 문과 함께 찬열의 등이 골목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휘청한 걸음걸이와 마르고 훌쩍 큰 인영이 잔상으로 남았다. 준면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왜 감정은 이렇게나 불균등할까.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주면 명료할텐데.







찬열은 일학년을 마치자마자 곧장 입대했다. 학교는 영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정이라도 붙여보려고 학과 행사도 다 나갔고, 소개팅 과팅도 몇 번씩은 해보았다. 두 명인가, 잘 될 뻔한 적도 있었지만 뭔가 부족했다. 찬열은 종종 준면을 생각했다. 뽀얀 얼굴에 웃음이 해사하던 남자 선배가 자꾸 떠올랐다. 그 사람이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 모르겠다. 기억은 항상 급작스럽게 튀어 올랐다.

자신의 머릿속에 준면이 차 있었기 때문에, 찬열은 반대의 경우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것이 실수였을까. 한 가지 목적만 가지고 갔던 개강 총회에서 준면이 혼자 떨어져 앉았을 때였다. 찬열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제 자리를 물리고 준면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술자리는 이제야 무르익었는데 준면이 앉은 곳은 문가의 빈 테이블이었다. 수저통에 냅킨만 있는 휑한 테이블을 앞에 두고 준면은 어디선가 가져왔을 차가운 소주병을 얼굴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찬열의 낮은 인사에 준면이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준면의 뽀얀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아, 네. 준면은 뺨에 대고 있던 소주병을 빠르게 치웠다. 그리고 민망한 듯 웃었다. 잘 노는 사람들 두고 굳이 제 쪽으로 온 찬열을 곤란해 하는 기색이 비쳤다. 

“대고 계셔도 되는데.”
“네?”
“그거요.” 

찬열이 눈짓을 했다. 준면이 의자 위로 대충 밀어둔 소주병을 흘끔 보고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맑았다. 

“많이 드셨나봐요.”
“좀.. 그렇게 됐네요.”

찬열은 준면의 달아오른 얼굴을 보았고, 준면은 그런 찬열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다가 물었다. 

“신입생이에요?”
“네?”
“아, 아닌가. 제가 후배들 얼굴은 잘 몰라서.”

끝을 맺지 않은 멋쩍은 듯한 그 말에 찬열의 머릿속은 이미 백짓장이었다. 물론 별 다른 의미 부여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찬열은 그 때 알았다. 타인의 기억이나 감정이 제가 가진 것과 동등한 질량을 갖는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찬열은 어렵게 입을 열 수 있었다. 목소리가 더 낮아져 있었다. 

“오티 때 뵌 적 있는데. 기억 안 나시나 보네요.”

아.. 준면이 인상을 약간 찌푸리고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했다. 그래봐야 모를 것이다. 기억할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알아보았겠지. 속이 몹시 쓰렸다. 찬열은 엉망이 된 머릿속을 빠르게 수습했다. 정리와 동시에 제일 먼저 한 일은,

“08학번 박찬열이요.”

처음으로 돌아갔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준면을 두고 찬열은 이따금씩 자괴했다. 고작 며칠 본 사람이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머리는 그렇게 외치는데 심장은 달리는 속도를 높이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눈에 안 보일 때는 안 보이는 것으로 죽겠더니, 이제 자주 보이니 그건 그것대로 힘들었다. 

이후로 찬열은 마치 제가 아닌 것처럼 준면에게 살갑게 굴었다. 준면은 생각보다 벽이 낮은 사람이었다. 꾸벅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경계를 허물어 준 준면은 언젠가 같이 듣는 전공 수업이 끝나고 밥을 샀다. 찬열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한 네 명쯤 되었다. 말 놓으셔도 되는데. 찬열의 말에 준면이 멈칫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럼 형이라고 부르면 되겠네, 하고 눈을 접어 웃었다. 점점 더 좋아진다고, 찬열은 생각했다. 

참여율이 극도로 낮았던 연합엠티 참가 명단에 굳이 이름을 올린 것도 준면이 가기 때문이었다. 

남은 사람이 원형으로 둘러앉은 방은 하나 남은 빈 방이었다. 가져온 소주가 짝 단위로 비어있었다. 대부분이 몸을 사리거나 이미 뻗어서 펜션의 방이란 방은 다 점령하고 잠든 뒤였다. 특히 여자는 거의 남은 수가 없었다. 남아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예비역들과 술 잘 마신다고 정평이 난 3학년 여자 둘. 그리고 찬열과 준면이 있었다. 다들 취할 만큼 취했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준면이 깨어있는 것은 의외였다. 게임에 강한 편인가. 찬열은 게임이 시작 됐는데도 집중하지 못하고, 곁눈질로 준면의 옆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4번.”

꺼칠한 목소리가 숫자를 부르자 준면이 손을 들었다. 찬열은 숫자를 부른 사람의 얼굴을 흘끔 보았다. 이미 졸업했다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까마득한 선배였다. 03학번쯤 되었던 것 같다. 

“내가 다음에 지목하는 애랑 찐하게 키스 한 번 해라.”

능글맞기까지 한 말에 우워어하고 낮게 웅성거렸다. 찬열은 깨어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쭉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남자였고, 깨어있는 여 선배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었고, 그리고 준면은.. 그냥 웃을락 말락한 얼굴로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쓰읍, 애들 잔다. 조용히 해. 부학회장인 성준이 그래도 남은 정신으로 말하자 조금 분위기가 잡혔다. 그 때였다. 

“9번.”

순간, 찬열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제 손에 들린 종이쪽지에 쓰인 숫자는 모로 보아도 9가 맞았다. 

“9번 누구야. 빨리 손 들어봐.” 

사형선고처럼 떨어진 재촉에 찬열이 느리게 손을 들었다. 다시 한 번 주변이 소란해졌다. 찬열이 고개를 들어 살핀 것은 준면의 표정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입가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찬열과 준면이 가운데로 불려 나갔다. 찬열은 어쩔 줄 몰라 했고, 준면은 시선을 약간 아래로 둔 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야, 그냥 빨리 해. 준면의 친구인 대현이 소리를 잔뜩 낮추며 눈치를 주었으나 준면은 단단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야, 안 하냐? 지목했던 선배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거칠게 뱉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져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찬열이 눈을 한 번 내리깔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준면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낮게 소리죽여 말했다. 

“형. 눈 감아요.”

준면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준면의 턱을 쥔 찬열이 입을 맞췄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가 이내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준면의 발간 입술을 물자 경계가 허물어졌다. 놀라 벌어진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야, 미친 거 아니야? 웃음과 당혹이 섞인 욕설이 등 뒤로 낮게 감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닿아오는 젖은 점막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가까이 닿자 준면의 몸에서 산뜻하고 부드러운, 꼭 준면에게서 날 법한 냄새가 났다. 코끝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벌칙이 길 필요는 없었으므로 찬열의 혀는 빠르게 빠져나갔다. 찬열은 조금 피곤한 얼굴로 준면을 보았다. 그 얼굴이 당혹감과 수치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준면의 입술이 젖어 있었다. 손을 뻗어볼까도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일부러 펜션 건물을 빙 돌았다. 흔한 가로등 불도 저만치 멀리 있어 어둑어둑했다. 찬열은 주머니를 뒤져 꺼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 당기는데 저 쪽에서 발끝을 툭툭 부딪는 소리가 났다. 찬열의 시선이 소리를 따라갔다. 누구든 마주치면 골이 아파질 것 같아서 멀리 돌아 나온 건데, 의외로 거기 준면이 있었다. 찬열은 걸음을 옮겨 준면의 앞으로 갔다. 기척을 느낀 것은 분명한데 준면은 시선을 멀리 두고 있었다.

“왜 여기 있어요.”

그러자 준면은 손에 든 담배를 한 번 들어보이고는 반쯤 태운 그것을 입술로 가져가려다가 이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발로 꾹 눌러 끄고는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찬열은 한 모금 깊이 빨고는 연기를 훅 뱉었다. 

“기분 나빴어요?”
“별로.”

준면은 손바닥으로, 지그시 눈가를 눌렀다.

“니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미안하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표정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찬열은 어둠 속에서 가만히 준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희멀건 얼굴이 약간의 짜증과 피로, 무너진 자존심 같은 것으로 얼룩져 있었다. 준면이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것이 보였다. 찬열의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글자가 불쑥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저는 좋았는데요.”

낮게 뱉어진 말에 준면이 의아한 눈으로 찬열을 올려보았다. 찬열의 말은 스스로도 놀라게 한 터였다. 찬열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취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찬열은 어렵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눈가가 떨렸다. 입술이 또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저 형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좋았어요.. 마지막이 웅얼거리듯 뱉어졌다. 주변이 몹시 조용했고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찬열은 준면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어 이내 고개를 숙였다. 준면의 가슴께가 가파르게 몇 번쯤 오르락내리락 했다. 숨소리가 조금 거칠다고 생각했을 때, 준면은 찬열을 두고 들어가버렸다. 







피곤에 쩐 얼굴들은 해산령이 떨어지자마자 각각 흩어졌다. 밤늦게까지 술을 펐던 선배 몇이 초췌한 얼굴로 찬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갔다. 허리가 꺾어지게 인사하는 찬열의 등을 마지막으로 짚어온 것은 준면이었다. 준면은 제가 돌아보자마자 타이밍 나쁘게 하품을 했다. 손가락으로 눈을 한 번 부빈 준면이 물었다. 

“피곤해?”
“그냥..”
“속 안 쓰려?”

묻는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피곤하고 속이 쓰린 것은 본인인 모양이었다. 찬열은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했다. 준면에게는 더 없이 껄끄러울 그 고백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찬열은 커다란 눈을 어쩌지 못하고 준면의 어깨 부근을 보았다. 새삼, 참 작았다. 

“해장 하러 갈래?”

준면이 데려온 곳은 처음 보는 해장국집이었다. 골목 어귀에 허름하게 자리 잡은 가게는 아무리 보아도 준면과는 거리가 멀었다. 좋게 봐줘도 깨끗하다고는 못 할 분위기의 가게에서 어색해하는 것은 찬열 하나였다.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메뉴가 한 가지였다. 준면과 찬열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주방에 주문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준면은 의외로 편안한 태도를 보였다. 알아서 냉장고에서 물을 가져오더니 곧 아무렇지도 않게 수저통을 뒤져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아주었다. 짝이 안 맞는 젓가락을 놓은 것이 실수인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준면은 여상한 얼굴이었다. 그는 아래로 핸드폰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찬열의 핸드폰도 비슷한 간격으로 울렸다. 잘 들어가시라는 메시지가 쏟아지는 것일 테다. 둘 사이에 말이 오가지 않은 지 몇 분 되지 않아 펄펄 끓는 해장국 뚝배기가 하나씩 놓였다. 

“먹자.”

준면이 깔끔하게 말했다. 둘은 말없이 해장국을 먹었다. 얹힐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면 어쩌나 했는데 차라리 말이 없는 쪽이 편했다. 속이 뜨끈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보면 준면도 태연하게 숟가락을 놀리고만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준면은 지갑을 꺼내는 찬열을 단호하게 만류했다. 작은 손으로 찬열의 손등을 내리친 준면이 카운터 위로 빠르게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려놓았다. 찬열이 민망한 듯 목덜미를 매만졌다. 준면은 카운터에 있던 박하사탕을 하나 집어 우물거리고는 덜컥대는 미닫이문을 밀었다. 준면은 혀에 박하사탕을 굴리며 고개를 들어 찬열을 보았다. 

“집이 어디야?”

등에 멘 가방끈을 한 번 고쳐 쥔 찬열이 눈썹을 구겼다. 준면은 입에 문 사탕과 새까만 눈동자를 동시에 굴리기라도 마음먹은 것처럼 찬열을 쭉 훑어보았다. 눈이 마주 닿자 찬열이 곧장 물었다. 

“왜 잘해줘요?”

낮은 목소리가 조금 위협적으로 떨어졌다. 준면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찬열은 주먹을 그러쥐며 또박또박 힘주어 다시 한 번 말했다.

“왜 잘해주는데요.”

준면이 무슨 대답을 하건, 찬열은 달게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후배라고 생각할 참이라면 그렇게 남아주겠다고도 생각했다. 찬열의 곧은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준면이 한참 작아진 사탕을 으적 깨물었다. 

“별로..”

준면이 말을 쉬었다. 사탕 조각을 전부 삼킨 준면이 보일듯 말듯 아주 희미한,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웃었다. 

“그런 적 없는데.”









09.




세훈은 대개의 주말이면 경수의 집에 갔다. 경수의 집은 학교에서 넉넉잡아 15분쯤 걸으면 되는 거리에 있었다. 나이가 들면 보통 친척들과 멀어진다고 하는데, 세훈과 경수의 사이는 그런 통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모는 도무지 닮은 구석이 없어 친척이라고 하면 다들 놀라곤 했지만 속은 형제처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말수가 적고 벽이 높은 성격은 각각의 교우관계에 있어 폭을 줄이는데 일조했다. 두 사람은 원래 곁에 두는 사람이 적었고, 서로는 그 범위 안에 속해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많고 많은 친척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친했다. 나이가 차면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오래보지 않아도 편했다. 

세훈은 경수의 침대에 몸을 길게 늘이고 엎드려 있었다. 만화책을 뒤적거리는 얼굴이 차분했다. 얼굴만 보면 넘기고 있는 책장이 만화책이 아니라 시집이라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경수는 뻑뻑한 눈을 몇 번쯤 깜빡이다가 손바닥으로 감은 눈 위를 꾹꾹 눌렀다. 오랫동안 모니터를 보고 있으니 눈이 아팠다. 등 뒤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경수는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걔는?”

경수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금 거칠었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걔랑은 잘 돼가?”

연이어 뱉어진 말에 세훈이 낮게 웃었다. 책장이 팔랑 넘어갔다.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세훈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불쑥 말했었다. 그 이후로 종종 세훈에게 돌려지는 질문이었다. 

“그냥..”

세훈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되게 좋아.”

말을 마친 세훈이 입가를 한 번 쓸었다. 목소리에는 쑥스러움에 기반한 달큼한 만족감이 묻어 있었다. 경수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제게 향해지는 시선을 감지한 세훈도 금세 눈을 들었다. 마주한 시선에 세훈이 먼저 멋쩍게 웃었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세훈의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경수는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입꼬리를 일자로 끌어당겼다. 

“다 잘 될 거야.”
“응.”

세훈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문 너머로 들려온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에 경수가 소리 높여 나가요, 하고 대답했다. 나가자. 세훈이 짧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경수는 먼저 방문을 나서는 세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수의 눈이 쓸쓸하게 가라앉았다. 그냥.. 되게 좋아. 세훈의 쑥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남았다. 어느새 세훈은 저런 말도 할 수 있게 됐다. 경수는 문득 외롭다고 생각하며 제 목덜미를 한 번 쓸어내렸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그때도 세훈은 제 침대에 길게 누워있었다. 핸드폰을 만지작대며 뭔가에 열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경수는 들고 있던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펜인지 가방이었는지 그 무게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세훈의 얼굴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과?”
“응.”

응, 하고 대답하는 세훈의 입술 끝이 약간 올라갔다. 경수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어때.”

뭐가 어떠냐는 건지, 저도 모를 말에 세훈은 조용하지만 말을 늘어놓았다. 까맣고 키도 크고 눈이 되게 커. 맨날 졸린 것처럼 눈을 이렇게 ?이 대목에서 세훈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 뜨고 천천히 깜빡거리는데 그게 엄청... 멎었던 말에 쑥스러운 웃음이 뱄다. 

“예뻐.”

정작 그 말을 하며 가볍게 눈으로 웃는 세훈의 하얀 얼굴이 예뻐서, 경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 형의 얼굴로 돌아가는 데까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경수가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었다. 완전히 돌아앉아 누워있는 세훈을 보았다. 경수는 어렵게 입술을 당겨 웃으며 물었다. 

“이름이 뭐야?”

경수의 대수롭지 않은 질문에 세훈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아주 미미한 변화였지만 경수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데. 경수는 제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뱉어야 할 지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훈은 곧 다시금 편안한 표정을 하고는 말했다.

“김종인.”
“남자 이름 같네.”
“남자 맞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세훈은 위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놓고는 경수를 쳐다보았다. 거기까지의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경수는 저를 똑바로 향하는 시선에 약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세훈의 슬쩍 접힌 눈이 비칠 듯 말 듯한 불안을 담고 있었다. 

“나 좀 이상하지.”

세훈이 웃는 표정 그대로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서 축축한 흙내음이 났다. 경수는 시간이 한참이고 더 지난 후에야 간신히 뱉어낼 수 있었다. 

“아니.”

전혀..







오늘따라 어쩐지 사람이 적은 학관 식당의 메뉴는 닭곰탕이었다. 오늘도 닭이네. 경수는 지금에서 멀어진 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백현이 불쑥 물었다.

“근데 진짜 말 안 할 거냐?”

주변이 시끄러웠기 때문에 어지러이 섞인 말이었지만 경수는 똑똑히 들었다. 눈만 간신히 들어 앞을 보자 맞은편에 앉은 백현이 큼직한 쇠그릇에 담긴 국물에 밥을 푹푹 말고 있었다. 경수는 조금 지치는 표정을 했다.

“왜 자꾸 물어.”
“왤 것 같냐.”

경수의 짙은 눈썹이 아래로 쳐졌고, 백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밥을 한술 떠 입에 넣었다.  

“니가 대답을 안 해서 그러는 거야.”

백현이 한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사실 누구건 별로 상관없었다. 숨기는 데야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알게 된다고 해도 백현은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나칠 때 아, 도경수가 좋아하는 애 정도로 생각하게 되겠지. 그럼에도 잊을 만하면 물어오는 것은 경수가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냥, 오기를 부리는 정도다. 열심히 밥을 우물거리던 백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웃으라고 한 말에 경수의 표정이 더욱 가라앉았다. 저는 들을 말 못 들을 말 다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백현과 경수의 거리감이 애매해졌다. 정확히는 경수의 규정 범위 내에서 그랬다. 가까워졌다고 하기엔 부족하고, 여전하다고 하면 뭔가 변했고. 그렇다고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백현은 그 날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고 끈질기게 노트 귀퉁이에 밑줄을 그었다. 누구야? 밑줄과 동그라미가 원래의 글자도 못 알아보게끔 위로 어지럽게 덮여있었다. 경수가 대놓고 꺼리는 기색을 했더니 백현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타고난 눈치가 빠른 듯 했다.

그래서인지 백현은 자꾸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재서는 돌을 던지곤 했다. 지금처럼.







한 학기를 채우기도 전에 학식에 질려버린 종인은 언젠가 학교 근처에 갈 만한 밥집이 얼마나 있는가를 준면에게 물었다. 정작 입이 짧은 준면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밥집만 알려주었다. 위치도 상호도 어물쩡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조금 귀찮은 것 같기도 했다. 종인은 굳이 캐묻지 않기로 한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남는 시간을 보내는 법 같은 것 말이다.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선택지가 적었다.

“보통은 뭐 해?”

준면이 반쯤 눈을 치뜨고 종인을 흘금 보았다. 공강때 뭐하냐고. 중얼거리듯 말한 종인이 쿠션을 안고 다리를 쭉 뻗었다. 준면은 일인용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까만 눈에 권태를 담고 리모컨 버튼만 누르던 준면이 느릿느릿 말했다. 

“당구도 치고, 피씨방도 가고, 공도 차고.. 그러지.”
“형은 뭐 해, 주로.”

던져진 물음에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준면은 찬열을 떠올렸다. 물론 제가 보내는 빈 시간 속에 찬열이 들어오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떠오르는 것은 찬열이 혼자인 모습이었다. 휘적휘적 걸어 다니는 그 마른 등. 떨어질 듯 커다란 눈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준면은 말을 길게 늘였다. 

“그냥..”

준면의 대답은 몹시 불분명했다. 종인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원래 준면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질문에는 이렇다 할 답 자체를 내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종인은 준면의 그런 부분이 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월요일이 되었고, 종인은 학식 대신 준면이 가르쳐준 밥집으로 세훈을 이끌었다. 위치만 대강 들은 그곳은 지은 지 몹시 오래되었을 외관에 낡은 테이블이 몇 개 놓인 좁은 백반집이었다. 종인은 솔직히 조금 놀랐다. 제 형의 깔끔한 외모와 영 매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종인은 낡은 내부에 조금 긴장했지만 세훈은 전혀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음식은 나무랄 데 없는 맛이었고, 종인과 세훈 둘 다 밥공기를 깨끗하게 비웠다.  

다음 강의까지는 제법 여유가 있었다. 아이스티 한 잔씩을 물고 천천히 걸었다. 날이 제법 뜨거워져 있었다. 종인이 쏟아지는 햇살에 인상을 찡그렸다. 손등으로 차양을 만들고 아이스티를 쭉 빨아올렸다. 얼음이 달그락대는 소리가 경쾌했다. 짧게 입맛을 다신 종인이 말했다. 

“덥다.”
“그래도 올 여름엔 비 많이 온다던데.”
“비 오는 거 싫은데.”
“더운 것 보다야..”
“그런가. 여름 싫은데.”
“아.. 곧 종강이네.”

세훈이 뭔가 깨달은 듯 어물어물 말했다. 그리고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어?

백현과 경수의 입에서 동시에 터진 말이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소리였지만 같은 반응에 서로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종인과 세훈을 발견하고 각각 보인 반응이었다. 

“김종인!”

백현이 소리를 높이자 종인과 세훈의 눈이 자연히 이쪽을 향했다. 단박에 경수를 발견한 세훈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휘었다. 옆에 선 종인은 백현을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어보이고는 경수를 보고 곧장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경수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종인과 세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희들 앞에 멈춰 섰다.

“뭐야. 아는 사이냐?”

백현이 경수 쪽으로 눈짓을 했다. 

“친구 사촌 형이세요. 형은요?”
“얘? 내 친군데.”

백현의 짧은 규정에 종인이 아아, 하고 수긍했다. 경수는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기도 하지만 입이 굳어버린 듯,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현은 아는지 모르는지 저 하고 싶은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둘이 사촌이라고?”

백현이 의아한 눈으로 경수와 세훈을 번갈아 보았다. 인사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세훈은 뒤늦게나마 고개를 숙여보였다. 백현은 그 인사를 가볍게 받으며 경수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을 했다. 경수는 그제야 애써 웃었다. 웃고 있긴 한 걸까. 사실 경수는 제 표정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어. 사촌동생.”
“하나도 안 닮았네.”

세훈이 그 말에 짧게 웃었다. 사심 없이 웃는 얼굴이 맑았다.

“얜 내 룸메이트.”

가는 손가락이 종인을 슬쩍 가리켰다. 종인이 멋쩍게 웃었다. 경수가 아아, 하고 아는 시늉을 했다. 종인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한 번 흘긋 보고는 말했다. 

“형. 저희 수업 가봐야 돼서.”
“어어. 이따 기숙사에서 보자. 수업 잘 듣고.”

세훈이 백현에게 고개를 다시 한 번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경수를 쳐다보며 슬쩍 웃고는 손을 흔들었다. 둘은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은 사이였다. 경수의 입술 끝은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끝내 웃지 못 했다. 세훈과 종인이 시선을 길게 늘이며 둘을 스쳤다. 

종인은 분명 세훈의 입을 통해 많이도 들었던 이름이었다. 한 번 본 적도 있는 얼굴이지만 이렇게 보니 또 달랐다. 그때는 밤이었고 지금은 훤한 낮이었지만 다만 밤이고 낮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종인은 주위로 빛이 모여드는 것처럼 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 정도는 잘 모르는 제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저런 기운에 끌렸을까. 

두 사람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었다. 경수는 그 모순적인 감정에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느꼈다. 제가 뭐라고.. 경수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제 옆에 선 백현을 한 번 쳐다보았다. 잊을 만하면 물어왔던 그 질문이 떠올랐다.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경수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백현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종인과 세훈의 뒷모습까지 훑고서는 감상처럼 말했다. 

“동생 잘 생겼네.”
“……쟤야.”

경수의 어렵게 뱉은 말에 백현이 반문했다. 

“어?”

경수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어쩐지 말해주는 것이 당연한 수순 같아 뱉었는데, 정작 꺼내고 나니 억울해졌다. 억울함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속이 울컥하고 차올랐다. 제 진심을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고, 첫 대상이 백현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 해 본 적 없었다. 경수가 내리 깔았던 눈을 들어 백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쟤라고.”

말하고 나니 이렇게 쉬운 것이었나.. 하고 그만 허무해졌다. 경수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백현의 얼떨떨한 표정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백현은 아마 바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화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들었다. 경수는 애써 표정을 누그러뜨리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경수는 백현을 두고 도망치듯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선 백현의 눈가가 가볍게 경련했다. 아.. 백현이 뒤늦게야 깨달음으로 벌어진 입을 수습하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경수의 등이 저만치 멀어져있었다. 







백현은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 제 팔을 베고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뒤척이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술 먹자고 나오라는 메시지가 연신 울렸지만 무시했다. 백현은 제 경솔함을 뒤늦게야 탓하고 있었다. 그런 걸 왜 궁금해했지. 뭐든 숨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을 텐데. 백현이 누운 채로 머리를 싸매고 끙끙댔다. 술이 땡기긴 했지만 아는 얼굴들하고 마시다간 더 심난할 것 같았다. 종인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놓인 옆 침대에 엎드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멍한 눈을 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보니 게임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백현이 종인을 향해 툭 던지듯 말했다. 

“김종인아.”
“네.”

종인이 별로 공손하지는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백현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눈짓을 했다. 

“옆 방 좀 갔다와봐. 누구 있나.”
“왜요?”
“나가서 한 잔 하게. 우리끼리 가기 좀 그렇잖냐.”
“술 땡겨요?”
“그냥. 일단 보고 와봐.”

깊게 따지고 들지 말라는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종인이 읏샤, 하고 몸을 일으켰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가 옆방 문을 두드린다. 소리는 움직임의 궤적을 그대로 그려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아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곧 돌아온 종인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그런다.

“아무도 없는데요.”
“아씨.”

백현이 가감 없이 짜증을 냈다. 되는 일이 없다. 백현은 머리가 복잡한 날이면 사람에 휩쓸리고 싶었다. 그래야 잡생각이 안 드니까. 혼자 삽질해봐야 나오는 답도 없고 머리만 터진다. 그런데 꼭.. 백현은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종인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약한 짜증이 묻어났다. 

“치킨 좀 시켜라. 생맥이랑.”
“형이 사요?”
“어어.”

귀찮다는 듯한 대답에 종인이 팔을 길게 뻗어 전화기 아래에 깔린 야식집 책자를 끄집어냈다. 여기 남자기숙사 3동인데요.. 주문을 넣는 종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백현은 납작하게 누운 채로 눈을 깜빡였다. 자꾸 같은 생각만 났다. 뭔가를 꾹꾹 눌러 참고 참는 듯한 일그러진 얼굴. 무슨 말이라도 듣기만 하면 서럽게 울어버릴 것 같은 경수의 그 얼굴이 자꾸 백현의 머릿속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백현이 짜증스럽게 눈을 감았다.

“형. 일어나요.”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종인은 언제 왔는지도 모를 치킨을 이미 풀어놓은 채였다. 백현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종이컵까지 챙겨다 놓은 종인이지만 맥주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였다. 백현은 헝클어진 뒷머리칼을 헤집듯 쓸어내리며 말했다. 

“계산은 뭘로 했냐?”

그러자 종인이 책상 위에 덜렁 놓인 백현의 지갑을 가리킨다. 5만원짜리 있던데요. 남의 지갑 사정을 훤히 들여다보는 무심한 목소리에 백현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바닥으로 내려가 앉았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종인이 말했다. 

“저 다리 먹을게요.”
“뭐 그런 걸 허락을 맡고 그러냐.”

허락 없이 제 지갑 들고 나가 계산은 잘만 해놓고. 백현이 무뚝뚝한 얼굴로 맥주를 따자 종인이 들고 있던 치킨을 내려놓고는 종이컵을 밀었다. 그러고 보면 종인은 거슬릴 것 없는 룸메이트였다. 적당히 눈치도 볼 줄 알고 착한 동생이었지만, 그렇다고 종인과 깊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백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너 아까 낮에 본 걔랑 친하냐?”
“세훈이요?”

이름 같은 건 모르는데.. 백현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종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 같은 것은 없는 얼굴이었다. 종인은 닭뼈를 상자 구석에 던져 넣고는 날개를 집어 들며 우물거렸다.

“친해요.”

음. 뭔가 좀 물어볼까 싶었는데, 뭘 물어도 이상해질 상황이라 백현은 입을 다물었다. 이름도 방금 들은 그 사촌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궁금한 것이 없었다. 

“그럼 걔 사촌 형은?”

백현의 물음에 종인은 눈을 크게 올려 떴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백현이 덧붙였다. 

“경수 안다며.”
“본 적은 있는데.. 잘 몰라요. 한 번 본 게 다라.”

한 번 본 게 다라면 역시 소용없겠다. 백현은 다시 한 번 맥주를 들이켰다. 사실 안다고 해도 뭘 물어보려고 한 건가. 스스로의 발상이 어이없어 백현은 실없이 피식 웃었다. 근데.. 종인이 닭 날개를 뜯으며 우물우물 말했다. 

“형 친구 아니에요? 저보단 형이 잘 알겠죠.”

백현은 얼떨떨하게 정곡을 찔린 표정이 됐고, 종인은 아무 생각도 없는 얼굴로 닭 날개를 마저 뜯었다.  







과하게 먹고 마신 탓에 배가 불렀다. 백현은 다 먹기도 전에 담배 한 대 피우고 온다며 나가버렸다. 배도 부르고 어쩐지 머리도 띵해서 종인은 일단 누웠다. 형 오기 전에 저거 치워야 되는데.. 침대 아래에 치우지 않은 치킨 상자나 휴지 따위가 귀찮았다. 종인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눈을 감았다.  

잠이 들락 말락 하게끔 정신이 혼곤한 와중이었다. 꿈처럼 불현듯 떠오르는 광경은 아는 것 같기도 또,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장면은 서서히 구체화되고 있었다.

발대식 날이었다. 얼굴을 알 듯 말 듯한 여선배가 종인에게 종이컵 가득 따른 술을 내밀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귀염상인 얼굴과 달리 말술이라고 정평이 났다고 했다. 종인은 난감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흐물한 종이컵에 든 소맥은 소주를 얼마나 부었는지 색이 맑았다. 종인은 그 잔을 들여다보면서 불안하게 웃었다. 친히 술을 말아 내민 여선배는 쓰읍, 하고 입술을 물며 안마시네? 라며 종인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다. 

그 때였다. 종인의 손에 있는 잔을 누군가 낚아챘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손의 거친 동선에 그득 담긴 술이 종인의 손등으로 약간 흘렀다. 굳이 그 사실 때문이 아니더라도, 종인을 비롯한 근처에 있던 모두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낚아챈 잔에 있는 술을 단숨에 넘겼다. 그리고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그는 어쩐지 화가 난 얼굴을 하고, 멍하게 저를 올려보는 종인의 손목을 쥐었다. 

“일어나. 가.”

눈썹을 구기고 화를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종인을 일으켜 세운 것은 세훈이었다. 

화들짝 놀란 종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10.




“왜?”

불쑥 고개를 들고 종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세훈이 물었다. 제게로 던져진 말에 종인은 느리게 눈만 깜빡였다. 한참 만에 입술이 틈을 만들었다.

“나 아무 말도 안했는데.”
“되게 할 말 있는 얼굴로 봤던 것 같아서. 이렇게.”

그렇게 말하고는 빤히 저를 쳐다보았다. 암갈색 눈동자 안에 딱 종인만이 담겼다. 얇게 쌍꺼풀진 긴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기다란 속눈썹도 그 움직임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 세훈의 노골적인 시선에 종인의 귓가가 화끈거렸다. 잠깐 한 눈을 팔았다고는 생각했지만 저렇게 대놓고 봤다고 생각하니 뒤늦게나마 창피함이 밀려들었다. 민망해진 종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펼쳐놓은 책장으로 눈을 돌렸고, 세훈이 낮게 웃었다. 

세훈은 곧 펜을 고쳐 잡고 종이 위를 빽빽하게 채워가기 시작했다. 만만하기로 정평이 난 교양수업에서 기습적인 과제가 떨어진 것은 아마, 수강인원의 반 이상이 졸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인도 그 중 하나였다. 시집 두 권을 정해주고는 그 안에서 마음에 드는 시 열 편을 골라 필사를 해오라는 과제는 쉽지만 성가신 것이었다. 이미 발 빠른 익명들이 빌려갔을 시집을, 세훈은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덕분에 오늘도 세훈의 방에 와서 마주 앉아있는 것이었다. 종인은 길이가 짧은 시를 골라내는데 열중했고, 세훈은 뭔가 기준을 둔 것처럼 꼼꼼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세훈은 집중해서 손을 놀렸고 종인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세훈의 이마 위로 쏟아진 앞머리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종인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재생되는 광경은 같았다. 손목을 붙들고 저를 일으키던 세훈의 화가 난 얼굴. 강하게 느껴지는 악력이나 주위의 경악스러운 분위기. 

왜 이제야 생각난 걸까. 아니, 차라리 아예 잊었더라면 좋았을걸. 제가 모르는 기억이 있는건 아닐까.

종인은 제 뒷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다행히도 세훈의 내리깐 눈이 들리지 않았다. 털이 잘 손질된 고양이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몸을 누이고 그르릉 목을 울렸다. 종인은 눈썹을 구기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이제야 물어보면.. 좀 이상할까. 사실 별 거 아닐지도 모르는데. 종인이 엎드리듯 팔 안에 얼굴을 묻었다. 







모종의 선언처럼 떨어진 고백으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백현은 대개의 강의에 있어 시간을 오차 없이 맞추곤 했다. 그리고 경수의 시간감각은 백현의 것을 한참 앞서있었다. 경수는 매사에 서두르는 법이 없게끔 여유 있게 시간과 동선을 맞췄다. 그런데 자꾸 그 규율이 무너졌다. 탓할 생각은 없었지만 변백현이 그 원인인 것은 분명했다. 경수는 강의실 뒷문을 조용히 닫았다. 출석은 진즉 불렀을 것이다. 지켜온 학점이 처음으로 무너졌을 이번 학기에 대한 미련은 별로 없었다. 다만 저쪽 반대편 창가에 백현이 앉아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 얼굴을 보고나니 더 했다. 강의 내내 멀리 있는 뒤통수를 신경 쓰느라 잔뜩 굳어있었다. 경수는 백현의 구부정한 등에서 시선을 뗐다. 처음부터 혼자였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제 시간이 해결할 일만이 남았다. 경수는 제 물건을 갈무리해 가방에 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두를 것은 없었지만 일부러 마주할 필요도 없었다. 경수의 움직임에 뒤늦게 속도가 붙었다. 

복도에 울리는 발 부딪는 소리가 커졌다. 바짝 따라붙는 걸음에 경수의 발이 조급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서두름은 곧 무의미해졌다. 뒤 따라온 백현이 경수의 팔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체온이 닿았을 때, 경수는 그 대상을 알았기 때문인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서.. 

“도경수.”

이름이 불리기까지 여러 차례의 헛손질과 망설임이 오갔음을, 경수는 모르지 않았다.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경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현은 경수의 얼굴에서 약간 비켜간 곳에 시선을 두고서 민망한 듯 콧잔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 다음 말을 뱉어냈다.

“밥 먹자.”







정작 붙든 것은 저였으면서, 백현은 밥을 먹는 내내 변변한 말 한 마디 붙이질 못 했다. 답지 않게 어물쩡한 태도에 스스로에게 짜증이 일었다. 백현은 여러 차례 입술을 깨물었고 경수는 오히려 의연해보였다. 

“다음 수업 있냐?”

경수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경수에게 중요한 것은 출석이나 학점이 아니었다. 지킬 것이 없었으므로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단지 몰두할 수 있는 데에 선택지가 협소했기 때문에 열심이었을 뿐이다. 경수의 말에 알아들었다는 듯, 백현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은 자연히 백현의 쪽을 따르게 되었다. 경수는 반 발짝쯤 떨어진 채 뒤에서 걸었다. 백현은 그런 뒤처짐을 못 견디겠다는 듯 몇 번쯤 걸음을 맞추려 들었다. 그러나 경수는 번번이 뒤쳐졌고, 그것이 고의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안 백현은 노력을 그만 두었다. 백현은 매점 근처의 벤치에 경수를 앉혀두고는 잠깐만, 하고 등을 보였다. 설렁설렁 달리듯 매점으로 들어간 백현은 곧 캔커피 두 개를 사들고 나왔다.

“어느 쪽?”

백현이 경수의 앞에 캔 두 개를 나란히 내밀었다.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쪽을 고른 경수가 멋쩍게 웃었다. 백현은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을 했다. 

한낮의 해는 뜨거웠다. 알량한 바람은 머리카락이나 나뭇잎은 흔들었지만 별 영향을 주지는 못 했다. 백현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 마셔버린 캔을 옆에 두고 손부채질을 몇 번 했다. 경수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어딘지 모를 애매한 곳에 시선을 두었다. 양 손으로 쥔 캔커피는 입 한 번 대지 않은 채였다. 백현은 그런 경수를 흘금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마음에 잡긴 했는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를 몰랐다. 

“걔…….”

경수의 차분한 말에 백현이 과장처럼 움찔 놀랐다. 귀를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스치는 소음, 혹은 바람 소리 정도로 여겼을 지도 모를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진짜 사촌 맞아. 그러니까, 피 섞인 사촌.”

입에 꺼내 올린 적 없지만 닿았을 의문에 대한 답을, 경수는 시작했다. 초여름의 더운 공기에 이마에 땀이 맺혔고 경수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말이 길어질수록 백현은 제 입술에 피가 몰려옴을 느꼈다. 해줄 말이 없어 짓씹은 입술은 벌겋게 달아있었다. 

그러니까, 경수는 제 사촌 동생이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남자. 사촌인게 더 큰 문제인지, 남자인게 더 큰 문제인지 백현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별난 유대관계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사촌지간이라고 했다. 갖가지 경조사때 만나는 그런 뻔한 친척간인데 좋아졌다고, 본인 스스로도 이상한 걸 아는데 어쩌지 못해서 담고만 있다고. 

백현은 경수의 덤덤한 목소리에 제 사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실 매일 보는 제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판에, 일 년에 두어 번이나 보는 사촌들의 얼굴을 제대로 그려낼 리 만무했다. 그러니까 경수의 말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백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이해는 물론이고, 평범하게 지켜오던 제 가치관이나 윤리의식에도 위배되는 말이었으나 백현은 어쩐지 속이 찌릿하게 저려옴을 느꼈다.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해도 되나.. 싶기까지 한 내밀한 고백이었다. 

경수의 말이 끝났다. 더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백현은 입가를 한 번 쓸었다. 곁눈질로 본 경수는 입도 못 댄 캔을 양 손으로 쥐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처연하기까지 한 옆얼굴에 입이 썼다. 백현은 옆에 둔 캔을 손에 들고 구겼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서였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대강 훔쳐내고 손으로 차양을 만든 백현이 인상을 약간 구겼다. 

기분이 영 이상했다. 혐오나 거리감이 들어야 정상일 텐데 들어차는 생각은 안쓰럽다는 정도였다. 더 할 데 없이 꼿꼿한 앤 줄 알았더니. 잘못 본 것이 아니긴 했다. 원래 단단하면 잘 꺾인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경수가 일어났다. 백현을 짧게 쳐다보는 얼굴은 벌써 굳어있었다. 마인드 컨트롤이 잘 되나보지. 백현은 느긋하게 시선을 끌었다. 경수의 다음 행동은 등을 보이고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백현은 놀라는 대신 쯧, 하고 혀를 찼다. 죄다 쏟아놓고 도망가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백현은 천천히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그리고는 경수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어깨를 툭 치자 경수가 파르르 몸을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 떨어지겠다.”

백현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냐. 백현이 혼잣말처럼 덧붙이자 경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입가를 굳혔다. 그 표정에서 경수의 행동이 읽혔다. 분명해졌다. 아마 먹고 떨어지라고 한 얘기겠지. 앞서 방어적으로 구는 경수의 태도가 갑갑하면서도 안쓰러웠다. 타인의 시간, 그 기록을 읽는 것이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지만

“같이 다니면 누가 잡아먹냐.”

적어도 앞으로의 시간을 바꿀 수는 있지 않을까.. 하고, 백현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잠이 들락말락한 찰나, 베개 아래에서 진동이 울렸다. 항상 잠들기 전에는 핸드폰을 베개 옆에 두는데 이상하게도 일어나보면 그것은 꼭 베개 아래로 가 있곤 했다. 손가락으로 액정을 쓸어내리는 종인의 눈에 졸음이 묻어있었다.  

뭐해?

세훈이었다. 종인은 꾹꾹 답장을 찍어 눌렀다. 

그냥
밥은 먹었어?

바깥으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빛이 커튼을 타고 넘어들었다. 일이 없어 누웠다가 잠이 들 뻔했는데 지금 자면 외려 시간이 엉망이 된다. 마침 잘 됐다 싶었다. 답장을 대충 찍어 보내고 난 종인은 길게 누워있던 몸을 뒤집으며 눈을 부볐다. 

세훈은 가끔씩 이렇게 용건 없는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여자애들이나 할 법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으나 싫지는 않았다. 답장을 기다리며 그간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쓱쓱 올려보던 종인의 손가락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행사 다음날 보낸 메시지였다. 일상적으로 일어났는지를 확인하는 게 다인 내용이었으나 종인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꾸 불쑥불쑥 흐릿한 기억이 떠올랐다. 전후 상황이 궁금하면서도 성가신 기억이었다. 누가 설명해준다고 온전히 해결될 일이 아니라서 더욱 답답했다. 종인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터졌다. 별 일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는데 왜 자꾸 신경이 쓰이고 난릴까. 종인은 어린애처럼 손톱을 잘근 씹었다. 손끝이 붉었다.  







시험 직전의 과제철에 굳이 술판이 벌어진 것은 어떻게든 건수를 만들어보려는 만인의 합심이었을 것이다. 종인은 다음날 교양 퀴즈가 있었음에도 자리에 붙들려 있었다. 무슨, 체육대회 번외경기 우승 상금이 나왔다던가. 여하튼 희한한 명분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약발이 떨어져간다고는 해도 신입생은 신입생이었으므로 행사에 빠져서는 안됐다. 

제 앞으로 돌아오는 술잔을 받으며 종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일부러 남녀학번을 헤쳐서 섞은 자리였기에 세훈을 비롯한 아는 얼굴들은 다 떨어져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소주를 원샷하고 인상을 찡그리자 옆에서 누군가 쟤 되게 귀엽다,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종인의 귓가가 뜨겁게 달았다. 

화합을 강조하는 의도야 어쨌건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앉았으므로 몇 번인가의 게임이 돌려진 다음 자리는 어색하게 흩어졌다. 테이블의 사람들이 한 명씩 바뀌고 있었다. 종인은 슬쩍 눈치를 보며 자리를 떴다. 술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태형이 있었다. 큰 키의 태형의 뒤에서 흠칫 놀라며 누군가 모습을 비쳤다. 남몰래 연애질을 겸한 땡땡이를 치고 있었던 모양인지 유진의 얼굴이 벌갰다. 나 먼저 들어간다. 종인은 태형의 팔을 툭 치며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버리는 유진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태형이 민망한 듯 웃었다.

“정신 없지?”
“좀.”
“많이 마셨냐?”

1학년 때나 하는 말이었지만 많이 마셨냐는 말은 인사처럼 이루어졌다. 종인은 옅게 웃으며 그냥, 하고 대꾸했다. 새침하게 모습을 감춘 블라우스 입은 등을 떠올리며 종인이 물었다.  

“잘 돼 가?”
“그냥.”

같은 대답이 돌아왔고, 두 사람분의 낮은 웃음이 퍼졌다. 달리 할 말이 없었는데 태형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종인의 의아한 눈길에 태형이 멋쩍게 웃었다. 그새 배운 모양이었다. 대학이 학문의 습득을 위한 공간이 아님은 진즉 알았지만 담배 냄새는 달갑지 않았다. 종인은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았다.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자니 연기와 냄새가 섞여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연락 없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종인이 문득 떠오른 것이 있다는 듯 아, 하고 목소릴 냈다.

“너 전에 그랬었지.”

종인의 말에 태형이 눈썹을 가볍게 꿈틀거렸다. 

“뒷말 별로 안 좋다고. 세훈이.”

덧붙이듯 말한 이름에 태형이 연기를 훅 뱉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린 듯한 표정을 하는 것을, 종인은 보았다. 곤란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으나 사실 뭐 그렇게 곤란할 일도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꺼리는 척 해도 뒷말을 즐겼다. 타인을 온당치 못한 이유로 입에 올릴 때의 카타르시스를 누구나 모르지 않았다.

“그거 왜 그런 거야?”

이렇게 물었을 때, 걔한테 가서 물어봐 라고 자를 수 있을 사람은 몇 없다. 종인은 앉은 채로 태형을 올려보았고, 태형은 잠시 딴청을 피우다가 담배를 툭 떨어뜨렸다. 그리곤 발로 꾹꾹 눌러 밟았다. 좀체 종인을 쳐다보지 않은 채 태형이 건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냥. 걔가 원래 좀 그렇잖아. 그때 너도 그렇고, 선배들 고백도 여러 번 까고.”

너도 그렇고, 라는 말이 최근에서야 떠오른 잘려있던 기억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후자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의문으로 눈가가 절로 찌푸려졌다. 종인은 학교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을 세훈과 공유했다. 그렇다고해서 제가 세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이건 좀. 태형은 발끝으로 바닥을 두어 번 툭툭 차고는 종인을 슥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입방아 많이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난 걔한테 별 생각 없어.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손을 어디에 둬야할 지 갈피를 못 잡는 사람마냥 부산스럽게 입가를 매만지고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태형이 이내 나 들어간다, 하고는 술집 안으로 다시 들어가버렸다. 자리에 그대로 남겨진 종인은 멍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세훈은 어떤 사람일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에 따른 어떤 생각이 들었다기보다는 그저…… 얼떨떨했다.







지저분한 술자리가 쉼표를 찍는 지점인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술집 문턱을 넘었다. 저마다 쪼그려 앉은 종인을 보고 많이 마셨냐는 등의 말로 신경을 썼다. 종인은 달갑지 않은 얼굴로 억지로 웃었다. ‘괜찮아요’를 여섯 번 넘게 말했을 때쯤 문을 열고 나온 것이 세훈이었다. 다들 문 옆에 앉아버린 종인을 보고 움찔 놀랐으나 세훈은 다 안다는 듯, 가만히 저를 올려보는 종인 옆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
“좀 됐어.”

대꾸하는 종인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다. 목을 쓰지 않고 벌어진 공백이 길었던 탓이었다. 밤공기는 유난히 날카로웠다. 콧속을 파고드는 찬 기운에 종인이 입으로 몇 번 숨을 내쉬었다. 비가 오려는지 미미한 습기 속에서 세훈에게서 타고 오는 좋은 냄새가 났다. 다 같은 술자리에 있었는데도 세훈에게서는 막 씻고 나온 듯한 상쾌한 향이 묻어있었다. 그러고보니 담배도 피운다고 했는데. 종인은 세훈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세훈이 정적을 깨고 뱉은 말에 종인은 주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 어차피 자리는 조금 더 길게 이어질 것이다. 패턴은 매번 비슷했다. 파장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종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훈이 슬핏 웃는 얼굴로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제 앞으로 내밀어진 크고 가는 손을 잡기까지 약간의 망설임이 따랐다. 악력이 좋은 손에 종인의 긴 몸이 쭉 일으켜졌다.

세훈은 일부러인지 빙 돌아서 걸었다. 편의점에 들어가서는 제 마음대로 콘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서 계산하고는 종인에게 내밀었다.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 행동의 기반에는 배려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종이 포장을 죽죽 벗겨내고는 한 입 베어 물자 입 안이 차가워 졌다. 세훈은 한 입에 한 번씩 윗입술을 핥았다. 그저 습관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종인은 잠자코 있었다.

“많이 마셨어?”
“그냥.”
“빨개졌어. 여기.”

불쑥 다가온 손에 종인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세훈의 시원한 손끝은 종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났다. 종인의 걸음이 돌아온 길이 아닌 골목으로 향할 때쯤 세훈이 말했다. 

“나 좀 많이 마셨는데.”
“아, 응.”
“술 좀 깨고 가자.”

조금도 취하지 않은 듯한 목소리와 함께 걸음이 닿은 곳은 놀이터였다. 놀이가 필요할 나이는 훌쩍 넘겼는데도 후문 너머에는 다소 쌩뚱맞다 싶은 놀이터가 있었다. 와 보는 것은 물론 처음이었다. 

텅 빈 좁은 놀이터의 모래에는 술병과 담배꽁초가 수두룩했다. 세훈은 개중 깨끗해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돌보지 않는 놀이터의 가로등이 점멸했다. 옅은 불빛의 등 아래에는 날벌레가 들끓었다. 종인은 약간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세훈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새하얀 얼굴. 이따금씩 발간 혀가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보여지는 풍경이 꽤나 과격했다. 손을 타지 않은 지 오래되어 길게 자란 잡풀들과 모래에 반틈 묻힌 술병. 종인이 앉은 벤치 아래에도 담배꽁초가 제법 쌓여있었다. 문득,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말이 생각났다. 담아두는 것은 아무래도 제 스타일이 아니었다. 골이 깊어 좋을 것은 없었다. 그래서 별로 무겁지 않은 말투로,

“너 고백도 많이 받고 그런다며.”

라고 말했고 종인은 곧장 후회했다. 차분하니 덤덤하던 세훈의 얼굴이 흠칫 굳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어떤 말을 꺼내야할 지 몰라 종인은 망설였다. 주위가 적막했다. 세훈이 눈을 내리깔고는 손가락을 뚝뚝 꺾었다. 뭐.. 세훈이 대충 중얼거렸다. 부정의 말을 뱉지 않는 그 입술이 조금 낯설어 종인은 부러 농담처럼 말했다.

“알고 보면 여자친구도 있고 이런 거 아니고?”

세훈이 다시 한 번 흠칫 굳었다. 종인이 또 한 번 후회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농담인데 괜히.. 잘못이라도 한 것 같잖아. 종인은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입술이 까슬했다. 입술 위를 더듬어 거스러미를 찾아냈다. 벗길까 말까. 우습게도 종인은 그런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벗기면 피날 텐데. 그럼에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세훈은 정적을 못 견디는 사람처럼 시선을 여기저기에 두었다. 

한참이나 뜸을 들인 세훈이 말했다. 

“좋아해.”

하도 힘을 주어 뱉어낸 말이어서 발음이 뭉그러졌다. 아니, 그저 그렇게 들었는지도 모른다. 달콤해야 할 말이 몹시 쓰게 울렸다. 명료한 말이었으나 의미가 바로 와닿지 않았다. 종인은 입술을 더듬던 손짓을 그대로 멈추고 세훈을 바라보았다. 세훈이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종인은 그 순간, 침묵의 불안함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더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은 채 세훈이 입을 열어 한 마디를 더 했다. 

“내가 좋아하는 거 너라고.”

쏟아내듯 뱉은 말에 종인이 벙쪘다. 

세훈은 민망한 듯 입술을 말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종인은 세훈의 동작이 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피하는 것임을 알았다. 종인은 다급하게 세훈의 팔을 잡았다. 세훈이 고개를 틀어 저를 내려 보았다. 무표정하고 서늘한 얼굴은 마른 입술을 핥지 않아도 초조해보였다. 

종인이 띄엄띄엄하게 말했다.

“그거 사귀자는 거나.. 뭐, 그런 거야?”

세훈은 아무 말 없이 종인을 내려 보았다. 다음을 기다리는 얼굴은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갑자기 불어온 미풍에 잡풀들이 스산하게 흔들렸다. 종인은 침묵의 함의를 모른 척 하고 싶어졌다. 세훈의 단정한 얼굴이 그렇게 나빠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 그냥.. 친구잖아.”

힘겹게 꺼낸 그 말에 꾹 다물려있던 세훈의 얇은 입술이 벌어졌다. 무슨 말인가 쏟아질 것도 같았으나 몇 번을 입술만 달싹이던 세훈은 결국 파, 하고 한숨처럼 어이없어 했다. 말과 말 사이에 간격이 길었다. 종인아. 세훈이 한참만에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종인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세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 같은 걸 뭐라고 하는 지 알아?”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았기에 종인은 입을 꾹 다문 채 세훈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속눈썹이 유난히 길어 그늘까지 진 눈매가 짙었다. 세훈의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헤집듯 쓸어넘겼다. 못 참겠다는 듯한 그 동작. 세훈의 얇은 입술의 한 쪽 끝이 천천히 비틀렸다. 

“개새끼.”

타인을 향한 욕설임에도 자조적인 어조에 종인은 그대로 굳었고, 세훈의 뒤틀린 목소리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웃으라고 한 말이니까 웃어.”

그 말에 웃은 것 또한 세훈 혼자였다. 









11.




세훈은 꼬박 이틀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종인은 내내 초조했다. 전화를 걸기에는 아직 충격이 컸으므로 메시지를 두 통 보내두었다. 어디냐, 아프냐는 시시한 내용이었고 답장은 당연히 없었다. 내내 씹어댄 펜대 끄트머리가 너덜너덜했다. 

이틀간의 공백을 깨고 세훈을 만난 것은 과 사물함 앞에서였다. 종인은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연 채로 멍하니 세훈을 바라보았다. 세훈의 창백한 얼굴에는 당혹감이라거나 그 비슷한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른하게 뜬 눈을 규칙적인 속도로 깜빡이며 다가온 세훈은 깔끔한 태도로 종인을 스쳤을 뿐이었다.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해진 종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세훈은 팔을 쭉 뻗어 제일 윗줄에 자리한 제 사물함에서 교재를 넣고 또 꺼내고 있었다. 어떤 말도 먼저 붙이지 않았지만, 종인의 시선에는 자신을 발견해주길 바라는 조금은 기만적인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세훈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태도로 책을 꺼내고 사물함을 잠갔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종인을 아주 없는 사람 대하듯,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종인을 스쳐 엘리베이터에 탔다. 

먼저 인사라도 해주길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전개는 예상 밖이었다. 

다음 강의는 필수 과목이었고, 대부분이 같은 과 동기들이었다. 종인은 강의실에 들어가 세훈을 찾았다. 항상 같이 앉던 중간쯤의 자리가 아닌 제일 첫 줄의 창가 자리에 앉아있는 단정한 뒤통수는 분명 세훈의 것이었다. 종인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가방을 멘 채로 세훈에게로 다가갔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크게 뛰었다.

“어디 아팠어?”

종인의 목소리는 답지 않게 조금 갈라져 나왔다. 세훈은 그 말에 눈만 들어 종인을 올려보았다. 꾹 다문 입술이 그렇게 싸늘해 보일 수가 없었다. 종인은 긴장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한참의 침묵이 오갔다. 누군가는 두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의 시간이었다. 세훈은 한참동안 빤히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말 걸지 말걸. 하다못해 아무도 없는 데서 할 걸. 종인의 머릿속에 무수한 후회가 오갔다. 세훈은 정말 한참이나 지난 뒤에 시선을 돌렸다. 느린 회피나마 종인은 안도했다. 눈을 내리깐 세훈이 느릿하게 말했다.

“별로.”

들으라는 듯 무성의한 대꾸였다. 종인의 얼굴에 열이 확 끼쳤다. 세훈은 내리깐 눈을 들지 않고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종인은 아.. 하고 제 말을 주워 삼키지도 못하고 서 있다가 자리를 떴다. 







그 날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먼저 자리를 피해버린 것은 종인이었다. 다음에 어떤 말, 어떤 행동이 쏟아지건 종인은 당황했을 것이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와중에도 굳이 얼빠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이라면 자존심이었다.

그 이후로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면, 태형이 종인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종인이 혼자 수업을 듣고 기숙사로 곧장 향하는 것을 반복한 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태형은 아마 자신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진 줄로 오해한 듯 싶었다. 종인은 마음대로 착각하게 두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태형을 비롯한 친분 없는 동기들이 보이는 저를 신경 쓰는 시선이나 배려는 몹시 불편했다. 그럴 때마다 당연한 수순처럼 세훈이 떠올랐다. 

세훈은 깊은 말이 오가지 않아도 편한 친구였다. 그랬다. 종인에게 있어 그들을 규정할 수 있는 단어는 친구였다. 세훈이 언제부터 다른 마음을 품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내가 그럴 여지를 주었던가, 하고 종인은 한참이나 앓았다.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강의가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평범한 신입생 무리는 여자고 남자고 죄 섞여서 몰려다닌다는 것을, 종인은 최근 며칠 사이에야 알았다. 대체 왜 이렇게 불편하게 다니는 걸까.. 종인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말 속에서 어렵게 웃고만 있었다. 어디에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종인은 원래 말이 많은 편이 못 되었다. 세훈 역시 그랬지만 두 사람은 말이 없이도 편한 관계였다. 종인은 다시금 세훈이 간절해졌다. 그러나 서늘한 눈빛을 떠올리면 목이 콱 메는 기분이 들었다. 몰려 걷는 무리가 중도를 지날 때였다. 도서관 입구에서 얼굴 한 쪽을 쓸며 나오는 것은 세훈이었다. 세훈은 한 눈에 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서늘하게 굳히고 걸어갔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종인은 멀어지는 등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찬열은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기다리는 연락이 있어서가 아니라 시간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정오를 넘긴 시간이었다. 눈을 반도 못 뜬 채로 커튼을 젖히자 햇빛이 하얗게 새어들었다.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린 찬열이 다시 커튼을 쳤다. 

속이 몹시 쓰렸다. 숙취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이를 먹는 건지 단순히 기분이 그랬던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찬열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뭔가 뜨거운 국물을 넣어야 할 것 같아 찬장을 뒤지는데 하필 라면 한 개도 보이지 않았다. 밤 샐 때마다 깨부숴 먹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에 모자만 쓰고 나선 찬열의 걸음이 귀찮음을 잔뜩 끌고 있었다.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골목을 요란하게 울렸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고 있을 때, 찬열은 더러운 타이밍을 원망했다. 들어가려던 편의점 문을 밀고 나오는 것은 준면이었다. 

“안녕.”

준면은 눈을 한 번 크게 떴다가 곧장 깔끔하게 인사했다. 찬열도 대강 인사를 하려했지만 목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뭔가 컥, 하고 걸리는 소리에 찬열이 목을 감싸 쥐곤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준면은 문턱 아래로 내려오며 입을 열었다. 

“술 먹었어?”
“네.”

그제야 잔뜩 갈라져 엉망이 된 목소리가 나왔다. 눈높이가 한참이나 낮아진 준면이 입술을 한 번 안으로 말았다가 물었다. 

“왜.”

왜는 왜야. 너 때문이지.. 찬열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래로 향한 시선에 뒷목이 당겨왔다. 준면은 처음부터 답을 들을 생각이 아니었던지 왼쪽 손목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시간을 확인하고 여유가 있다는 것을 안 준면이 옅은 미소를 걸고는 찬열을 올려보았다.

“점심 아직이지? 해장하러 가자.”

찬열이 뭘 하러 나왔는지도 모르면서 태연하게 제 뜻대로 말한 준면이 앞서 걸었다. 찬열은 허, 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저보다 한참 작은데도 작아 보이지 않는 그 등을 따라 걸었다. 빠르지만 보폭이 좁은 준면의 걸음은 금세 따라잡혔다. 

“같이 밥 먹어주는 사람도 없어요?”
“다들 수업 들어갔지.”
“형은요.”
“자체 휴강.”
“4학년씩이나 돼서 그럼 어떡해요.”

찬열의 면박에 대답 없이 푹 웃은 준면은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 사이에 간판도 없이 제일 허름해 보이는 가게 문을 밀었다. 낡은 미닫이문이 덜컹거렸다. 처음 올 때는 준면과 지독하게 매치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가게였지만 이제 찬열은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저를 처음 데려왔을 때처럼, 준면은 알아서 물을 가져오고 수저를 놔주는 등 부산하게 굴었다. 음식은 기다림 없이도 빠르게 나왔다.

김이 펄펄 끓어오르는 뚝배기에 밥을 말던 찬열은 그제야 준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화장한 여자애들보다 뽀얗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다크써클을 달고 있었다. 찬열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피곤해요?”
“응. 좀.”
“뭘 하고 다니길래 눈 밑이 이렇게 시커멓고.. 관리 좀 해요.” 

툭툭 내뱉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준면이 길게 하품했다. 찬열은 숟가락을 놀리다 말고 눈만 들어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 술 가득 입안에 떠넣어 볼 한 쪽이 빵빵해진 찬열을 보고, 준면은 미안한 듯 웃었다. 

“오늘은 좀 봐주라.”

눈썹을 누그러뜨린 얼굴로 어렵게 웃는데 그 표정이 또 묘하게 안쓰러워, 찬열은 툭툭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어졌다. 왜 항상 이렇게 될까. 찬열은 약간 자책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숟가락으로 국물에 만 밥만 꾹꾹 눌러댔다. 벌써 입맛이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한참이나 헛손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너야말로 술 많이 먹고 그러지 말라니까.”

놀랄 새도 없이 불쑥 준면의 손이 다가왔다. 놀라서 고개를 휙 들자 준면이 안쓰럽다는 듯 눈썹을 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는데도 준면은 여상한 태도로 찬열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나마 볼 만한 게 얼굴인데 이렇게 꺼칠해서 어떡하냐.”

곧 손이 거두어지고 준면은 식사를 마저 이어갔다. 찬열은 그 단정한 머리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준면의 식사 시간은 제법 긴 편이었고, 그런 그가 뚝배기를 바닥까지 비워내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준면은 물을 마시면서 반도 못 비운 찬열의 몫이었던 뚝배기 안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찬열의 침묵이나 표정 없는 얼굴은 제법 위협적이었다. 준면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계산을 하고 카운터에 놓인 박하사탕까지 입에 넣고 돌아왔다. 오도독하고 사탕 깨무는 소리가 요란했다.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골목이 막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점심시간은 이 무렵이었다. 준면은 찬열을 만나기 전, 편의점에서 샀을 담배를 꺼냈다. 

“한 대만 피울게.”

준면이 허락받듯 말하자 찬열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줄까? 하고 담뱃갑을 내밀어보았으나 찬열은 고개를 내저었을 뿐이었다. 팔짱을 끼고 선 찬열은 준면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발로 툭툭 바닥을 차댔다. 입에 물린 담배가 훌쩍 짧아졌을 때, 찬열이 말했다.

“자고 가요.”

꺼질듯 뱉어진 말에 준면이 시선을 돌려 찬열을 바라보았다. 그 옆얼굴은 모자를 푹 눌러쓴 데다 고개까지 숙이고 있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찬열은 제가 뱉은 말이 민망한 듯 콧잔등을 문지르며 웅얼거렸다. 

“어차피 수업 없잖아요.”
“…….”
“못 미더우면 나가있을게요. 그러니까..”

찬열의 말은 몹시 서툴게 이어졌다. 드문드문한 낮은 목소리에 준면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옅게 웃었다.

“그런 거 아닌데. 그냥, 너 피곤하니까.”
“괜찮아요.”
“…….”
“그러니까 눈이라도 좀 붙이고 가요.”







안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제 방에 준면을 데려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찬열은 급히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준면은 어쩌지도 못하고 좁은 현관에 서있었다. 다급한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찬열은 아무렇게나 널린 옷가지 따위를 끌어 모아 한꺼번에 의자에 걸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더럽진 않거든요. 변명처럼 덧붙인 말에 준면이 슬핏 웃으며 뒤따라 들어갔다.

“내 방은 이거보다 더러운데 뭐.”

무안함을 상쇄시키려는 듯 준면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뒤늦게야 모자를 벗은 찬열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준면은 처음 와본 방임에도 어색함 없이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올라갔다.

“좀 잘게.”

꾸물꾸물 몸을 눕힌 준면이 이불을 끌어당겼다. 어질러진 물건 따위를 쓸어 담던 찬열이 뒤늦게 물었다.

“갈아입을 옷 줘요?”
“괜찮아.”
“불편할 텐데..”

찬열의 말에 준면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이불을 코끝까지 올려 덮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비누인지, 향수인지 모를 부드러운 냄새가 훅 끼쳤다.

“너 냄새 난다.”

그리고는 제가 한 말이 영 간지러웠는지 푹 웃었다. 준면의 웅얼거림에 찬열의 상기된 얼굴에 더한 열이 확 올랐다. 나 진짜 잘게. 잦아드는 소리로 말하고는 준면은 눈을 감았다. 찬열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다가 물었다.

“몇 시에 깨워요?”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낮은 숨소리가 가라앉았다. 찬열은 소리 없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 잠들어버린 준면의 평온한 얼굴을 보며 저를 취하게 한 전날의 술자리를 떠올렸다. 김준면 때문에 술 먹는 건 진즉 끝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해주고 싶은 것은 찬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자꾸 입술은 통제를 벗어났다. 그것이 전적으로 시간의 탓임을, 찬열은 모르지 않았다. 햇수로 5년 차. 지나치게 길었다. 물론 그동안 오직 김준면만을 생각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과정이야 어쨌건 5년은 길었다. 기약 없이 길기만 한 기다림은 찬열을 지치게 했다. 

그것이 누구라도 같았을 테지만 찬열은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좀 더 깊고 끈질기게, 넓게 받아주지 못하는 제 옹졸함이 싫었다. 준면의 말이나 행동거지를 비꼬거나 할 때 가장 많이 다치는 것은 저였다. 준면이야 대수롭지 않게 잊어버리곤 했지만 찬열의 입을 타고 나온 많은 말은 제 짝사랑에 흉터를 남겼다.

아마, 제 앞에 앉은 희멀건 얼굴의 세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였다.

찬열이 세훈을 불러낸 것은 충동적이었다.

사실 세훈은, 한밤중에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에 처음 놀랐다. 그리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찬열의 태도에 두 번 놀랐다. 찬열과의 인연은 조별 과제까지가 전부였다. 얼굴을 보면 어설프게나마 인사를 하긴 했지만, 과제 발표 이후 찬열은 수업에 얼굴을 잘 내비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훈은 별 말 없이 찬열이 부른 술집에 와 앉았다. 직접 듣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앉은 세훈의 표정 없는 얼굴에 찬열은 다짜고짜 술잔을 내밀었다. 세훈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눈썹을 휘었다.

“받아주지, 좀.”

잔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면서, 찬열은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이유야 어쨌건 나왔잖아.”

찬열의 말에 세훈이 느릿느릿 손을 뻗어 잔을 넘겨받았다. 찬열이 멜로디뿐인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주를 따랐다. 가게의 음악과 찬열의 콧노래와 주위의 소음이 섞여들었다. 세훈은 가득 채워진 잔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마시는 대신 테이블 위에 놓았다.

“취하셨어요?”
“아니. 멀쩡한데.”

정말로 취기 없는 목소리였지만 세훈은 눈썹을 뉘였다. 그리고는 그득하게 채워진 잔을 바라보았다. 마실 생각은 없어 보이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찬열은 강요 없이 제가 채운 잔을 입 안으로 훌훌 털어 넣고는 젖은 입술을 닦았다.

“취하고 싶어서 불렀지.”
“…….”
“어차피 너나 나나 김씨 형제한테 물 먹는 거 마찬가지 아냐?”

웃음을 잔뜩 섞은 말에 세훈이 눈만 들어 찬열을 바라보았다. 치켜뜬 눈이 사나웠다. 찬열은 슬쩍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찬열의 커다란 눈이 반쯤 접혀 웃고 있었다. 

“나는 원래 눈치가 되게 없거든.”
“네.”
“그런데 너는 다 보이더라.”

의미 모를 말에 세훈이 흠칫 굳었다. 날 선 표정은 여전히 풀지 않은 채다. 찬열은 점점 재밌다는 듯 웃었다. 공기가 날카로웠다. 한 자리에 앉아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대조적인 표정 때문일까. 찬열은 눈을 내리깔고 빈 잔에 술을 더 채웠다. 

“티 나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다?”
“…….”
“너한테는 같은 냄새가 나거든.”

굳은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있던 세훈이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놓았던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젖은 입술을 핥는 얼굴이 싸늘했다. 







세훈은 연거푸 몇 잔을 더 마셨다. 오히려 입을 다물게 된 것은 찬열이었다. 세훈은 후,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계속해서 잔을 채우는 손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분명 있겠다고는 생각했는데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젖은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말에 찬열은 어이없이 웃었다. 세훈이 제일 먼저 뱉은 말은 ‘언제부터요?’ 였다. 그러니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는 물음이었다. 찬열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처음부터. 쉽게 떨어진 답에 세훈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길게 그늘을 만든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지고 찬열은 세훈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세훈은 잠자코 술을 받고는 저도 찬열의 잔을 채웠다. 허공에서 잔이 쨍하고 부딪쳤다. 최초의 교류였다. 

동시에 술을 삼키고 나자 한숨 섞인 웃음이 뱉어졌다. 이후의 세훈의 말은 모조리 불분명하게 나왔다. 찬열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을 배제한 사실 뿐이었다. 얼결에 고백을 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가장 싫은 거절을 당했다고 했다. 그게 뭐냐고 묻지 않아도 찬열은 답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머리가 아픈 것도 아니면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찬열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아닌 거 아는데도 자꾸 잘 될 거라는 착각이 들지 않냐.”
“전 처음부터 기대 안했어요. 그런 거.”
“거짓말.”
“…….”

세훈은 정곡을 찔린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담배를 꺼냈다. 허락 없이 불을 치익 붙이고는 볼이 패이도록 깊이 빨아들였다. 허연 연기가 자욱했다. 찬열은 비어버린 술병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말없이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세훈이 말했다. 

“맞아요. 거짓말.”

탁한 목소리에 체념조의 웃음이 묻어났다. 세훈은 길고 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으로 이마를 한 번 짚었다. 웃어보려고 입술을 끌어 올렸지만 어색하게 당겨졌다.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세훈의 말은 끝을 맺지 못 했다. 김준면 때문에 속이 답답해서 벌인 자리였지만 정말 속이 답답한 사람은 따로 있는 듯 했다. 찬열은 가볍게 마른 세수를 하고는 물었다.

“그만두려고?”
“모르겠어요.”
“…….”
“형은요.”
“글쎄.”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처럼, 찬열의 눈이 공허해졌다. 아랫입술을 짓씹은 찬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늦은 오후, 종인은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아무 예능 프로그램이나 틀어놓고 눈은 딴 데 둔 지 한참이나 지났다. 준면이 기척 없이 다가와서는 리모컨을 들며 앉았다. 물론 보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허락도 구하지 않고 채널을 마구 돌리는 것은 퍽 준면다운 행동이었다. 배려가 몸에 배인 것 같다가도 이런 식으로 핀트가 어긋나곤 하는 것이 그랬다.

“라면 물 올렸어?”
“응.”
“밥 있는데 왜.”
“그냥. 먹고 싶어서. 형도 먹을래?”

아니이.. 준면이 말을 질질 끌며 느리게 대답했다. 시선은 휙휙 돌려지는 TV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종인은 꿈틀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형.”
“응.”
“제일 친한 친구가 고백하면 어떨 것 같아.”

종인의 물음에 준면은 움찔 놀랐다. 다행인지 그 미미한 기척을 종인은 느끼지 못했다. 준면은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말했다. 

“……당황스럽겠지.”

별로 대단한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던지 종인은 으응,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갔다. 준면은 채널을 돌리던 손을 멈추고 주방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종인은 이미 등을 감춘 뒤였다. 준면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종인의 말에 순간, 뭔가에 관통당한 느낌을 받았다. 

준면은 원래 성격이 진중한 편이었고, 타고난 성정은 그의 연애 성향까지 물들였다. 준면은 제게 오는 사람들을 모두 진지하게 대했으나 이상할 정도로 연애는 짧았다. 결론은 항상 같았다. 소중히 대해주는 것은 알겠으나 사랑 받는 느낌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론이 도출되기까지의 과정을 준면은 이해하지 못 했다. 어쨌거나 준면을 떠난 사람들은 다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들의 대부분은 새 연애에서 준면과 사귀었던 일수를 훌쩍 뛰어넘곤 했다. 연애 앞에서 준면은 매번 공허했다. 사실 준면은 자신이 사랑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준면은 초조함이나 질투, 착각 등의 감정 앞에서 몹시 무뎠다. 의무를 다 하는 것이 사랑일수는 없을까,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종인의 말에 떠오른 것이 찬열의 얼굴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12.




사람 일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백현은 하루가 다르게 실감 중이었다. 먼저 다가가고 치대고 하는 법을 몰라 표출이 어설펐을 거라는 정도는 저도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많이 다친 사람들은 쉽게 속을 내비치지 않지만 한 번 열리면 깊게 기대게 된다. 백현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뭐 도경수를 길들이거나 할 마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할 수 있는 만큼 잘 해주고 잘 지내다보면 타인 앞에 걸어 잠근 저 문도 누군가를 향해 열리지 않겠나. 그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경수는 필요 이상으로 제 눈치를 보았다. 덕분에 그 속을 들춰본 일을 차라리 없던 일로 할 수 있다면 편하겠다 싶기까지 했다. 백현은 강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짐을 챙겨 일어난 경수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 전 시간도 이러더니만. 경수에게 안 된 일일지는 모르지만 백현은 행동이 민첩하고 달리기가 빨랐다. 골이 난 백현이 약간 짜증스럽게 물었다. 

“뭐야. 쌩까자고?”

약간 갈라져 나온 목소리에 경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이내 굳은 얼굴을 했다. 주눅 드는 기색 같은 건 전혀 없었기에 백현은 조금 안심했다. 경수의 목소리는 단정하게 떨어졌다. 

“그런 건 아닌데.”
“근데 왜 자꾸 짜증나게..”

되는대로 내뱉던 백현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곤 제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백현은 딱히 입이 거친 편은 아니었다. 그저 보통 남자들 정도의 수준이었으나 경수의 앞에서는 어쩐지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애들 사귈 때도 이런 생각을 잘 하지 않던 백현이었다. 제동이 걸려 시간에 잠시 틈이 생겼다. 백현은 깨물었던 입술을 놓으며 머리카락을 털었다. 

“미안.”
“아냐.”

경수는 짧게 일갈했다. 복도로 과 사람들이 하나 둘 지나가며 백현과 경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경수는 저를 훔치듯 보는 눈들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경수는 소문을 두려워했다. 사람에 데여본 적 있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사렸다. 경수처럼 원인 모를 적개심에 노출 되어 본 적 있는 사람들은 정도가 더 했다. 형체 없는 그것은 무엇보다 위력적일 때가 있었다. 바로 이런.. 경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이렇게 신경 쓸 거 없다고 말해주려고 했었어.”

뭐? 벙찐 백현의 얼굴에 대고 경수가 어렵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경수의 웃는 얼굴은 꼭 처음 웃어보는 사람의 것처럼 보였다. 

“갈게. 내일 보자.”

그 어색한 웃는 얼굴에 백현은 멀쩡하던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잡지도 못 할 거였지만 경수의 등은 빠르게 멀어졌다. 백현은 허탈하게 숨을 내뱉었다. 손에 든 핸드폰이 징징 귀찮게 울렸다. 확인해보니 자주 가는 술집 이름과 함께 오라는 간결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텅 빈 강의실로 들어가 제 짐을 갈무리해서 나오는 내내 백현은 구겨진 인상을 펴질 못 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꼿꼿한 척을 이렇게 해댈 거였으면 그 짓무른 속을 내보이질 말았어야지. 백현은 꼭 제가 개새끼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고민 때문에 술을 푸는 건 원래 제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건수가 생겼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술집 제일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퍼마신 건지 빈 술병이 줄줄이 놓여있었다. 한 쪽 벽을 가득 메우며 주렁주렁 걸린 소주병뚜껑을 보며 백현은 혀를 찼다. 모르긴 몰라도 저 중 3분의 1은 이 일당이 걸었을 거였다. 

평소 적당히 조절해가며 마시는 편이었던 백현이 앉자마자 소주를 들이키는 것을 보며 다들 의아한 눈초리였다. 누군가 하나는 조유경 때문에 그렇다며, 되지도 않는 설레발을 쳤지만 백현은 그냥 두었다. 에이 씨발. 백현이 중얼거리며 제 팔 안에 머리를 가뒀다. 내뱉어지는 숨에서 싸한 소주냄새가 났다. 

백현이 비운 것만 두 병을 채웠을 무렵이었다. 안주는 동난 지 오래였으나 백현은 잘도 마셨다. 자리에 앉아있던 진욱이 제 가방을 찾았다.  

“가방은 뭐하러?”
“가야지.”
“왜.”

한참 물 올랐구만. 백현의 뒷말은 삼켜졌다.

“막차시간 다 됐잖아. 뭐 시간이 이렇게 빨라.”
“뭐야. 벌써?”

투덜거리듯 내뱉는 말들에 자연스럽게 파장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백현은 인상을 구겼다. 다들 가방을 챙기고 지갑을 꺼내는 와중에 백현은 부러 더 취한 사람처럼 굴었다. 사실 백현의 주량은 이 정도에서 그치진 않는다. 

“너 이 새끼는 요 옆건물 살면서 어딜 내빼는데.”

아까 전부터 계속 핸드폰만 쥐고 있던 승민이 눈만 한 번 들어서 백현을 쳐다보곤 무심하게 내뱉었다. 

“민지, 방에 와있다는데 어떡하냐. 가봐야지.”
“아 씨발.”

가라. 다 가. 승민이 너는 꼭 이민지랑 결혼까지 해라. 백현이 대놓고 빈정대며 짜증을 냈다. 그리고는 제 몫으로 던져진 가방을 뒤져 지갑을 찾았다. 그리고는 만 원짜리 한 장을 던지듯 놓고는 자리에서 제일 먼저 일어났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지독했다. 

“쟤 오늘 왜 저러냐.” 

얼빠진 얼굴로 백현의 마른 등을 쳐다본 승민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어이없다는 듯 뱉어진 말에 진욱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백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머리카락을 마구 털어대며 술집 문턱을 나섰을 뿐이었다. 백현은 제가 괜한 신경질을 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제가 이런 지랄을 부리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닐 테니 다들 눈감아줄 것이다. 백현에게는 편리한 핑계도 있었다. 누구도 제가 도경수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였다. 눈을 감자 날카로운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덜컹, 하고 묵직한 문이 열렸다. 백현은 기숙사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들고 있던 캔을 구겼다. 구겨진 캔은 입구가 좁은 쓰레기통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속이 풀리지 않아 마신 캔맥주는 쓸 데 없는 포만감만 불러왔다. 통금 시간을 넘겨서 들어온 탓에 기숙사 입구는 텅텅 비어있었다. 이런 자잘한 일에도 인맥을 끌어다 쓸 수 있다는 건 여러모로 편리한 일이었다. 백현은 부러 큰 소리로 꺼억하고 트림했다. 그리고 곧장 후회했다. 껄렁하게 굴고 있자니 또 바보가 된 것 같아 백현은 애먼 머리칼만 헤집었다. 아, 짜증나. 

백현이 방에 들어서자 종인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종인은 자지 않는 대신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종인이 코를 약간 씰룩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냄새나나. 공연히 피해보는 룸메이트에게 약간의 미안함이 들 때쯤 종인이 느릿느릿 물었다. 

“뭘 이렇게 마셨어요.”
“그냥. 좀.”

잔소리하는 투는 아니었어서 백현도 대강 대답하고는 풀썩 침대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이불에 한쪽 얼굴이 푹 파묻혔다. 아래로 처진 눈이 몇 번쯤 느리게 껌뻑이다가 이내 감겼다. 종인은 마우스를 쥔 채로 백현을 돌아보고는 물었다. 

“불 끌까요?”
“아니.”

거의 잠든 얼굴에 걸맞게 백현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흘러나왔다. 종인은 하던 게임을 종료하고는 제 일인 양 한숨을 푹 쉬었다. 백현은 엎드려 누워서 듣는 그 한숨소리가 어쩐지 재밌어 눈을 감은 채로 푹 웃었다. 별 게 다 재밌네.. 취했나. 혼곤한 정신을 다잡지 못 하고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그러자 종인은 종전보다 얕게 한숨을 내뱉고는 백현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형 요새 못 먹고 다녀요?”

낮은 목소리는 걱정을 담고 있었다. 종인의 뜬금없는 말에 백현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곧 눈을 가늘게 뜬 백현이 종인을 그대로 쳐다보았다. 

“별로?”
“얼굴이 핼쓱한데요.”

항상 그렇듯 종인은 나른하게 뜬 눈을 하고 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짙은 쌍꺼풀진 눈이 졸린 것처럼 느리게 깜빡였다. 제가 봐온 종인은 매사에 느렸다. 종인의 모든 것이 시간을 붙든 것처럼 움직였다. 백현은 종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피식 웃었다. 정작 말이 아닌 건 제 쪽이 아닌가. 

“그러는 너야말로.”

백현의 말은 함축적이었다. 종인은 눈을 내리깔고는 손바닥으로 느리게 제 한쪽 뺨을 쓸었다. 자각을 끌고 오는 행동이었다. 종인의 손짓이나 표정을 읽은 백현이 떠보듯 물었다.

“무슨 일 있냐.”
“…그런 거 없는데.”

종인은 꼭 다짐처럼 말했다. 

“진짜로요. 불 끌게요.”

묵직하게 내려앉았던 침대 매트리스가 가벼워지고 곧이어 창백하게 빛나던 형광등이 꺼졌다. 주황색 스탠드 불빛이 좁은 면적을 밝혔고 백현의 눈도 다시 감겼다. 사실 내 일도 힘드니까.. 







날이 흐리다는 이유로 아주 저물지 않은 시간부터 술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종인도 그 중 하나였다. 좌식 테이블 두 개를 붙여 앉아 술집을 날려버릴 기세로 떠들어대는 속에서 종인은 좀체 입술을 열지 않았다. 아무 말이나 몇 마디 섞어보다가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늘 이런 패턴이었다. 사실 종인은 낯을 많이 가렸다. 워낙 무심한 얼굴이라 부끄러움은 차분함으로 치환되어 보여지곤 했다. 교수나 선배, 동기 가리지 않고 도마에 올려 토막을 내던 사람들은 빠르게 주제를 전환했다. 익숙하지 않은 게임의 타겟은 주로 종인이 되었다. 종인은 제게로 돌려지는 술잔을 거부나 저항의 기미 없이 들이켰다. 종인이 제 주량을 넘겨 마시고 있다는 것을 무리의 누구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태형의 무리에 속해있는 것은 그저 적응의 문제였다. 학습이라도 하듯 반복되는 움직임에 종인은 느리게 적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세훈이 머릿속에 들어앉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저를 향한 노골적인 무시 같은 것. 종인은 받아본 적 없었다. 저를 좋아한다고 말하던 세훈의 얼굴은 뻔뻔하리만치 태연했다. 완곡한 거절 앞에 세훈은 쉽게 등을 내보였다.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서늘했다. 

이것이 사건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일일까. 세훈은 저를 무시하는 것도 그랬지만, 종인의 오지랖도 끝난 지 오래였다. 한 번 무안을 당하고 나니 두 번은 있을 수 없었다. 세훈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예외의 연속이었다. 종인은 세훈을 이성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멀어지는 것은 견딜 수 없이 싫었다. 속이 답답했다. 

종인이 자리에서 불쑥 일어났다. 누구도 종인의 행동을 의심스럽게 보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가는 모양이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허리를 굽혀 신발끈을 매는 등에 시선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종인은 술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때마침 전화를 받으러 나갔던 유진만이 종인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천막에 가려지지 못했던 머리카락으로 예고 없이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졌다. 유진은 사라지는 종인의 뒷모습에 눈을 둔 채로 급히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밖에 비 온다.”
“아씨, 우산 없는데.”

대화는 자연히 날씨와 기상청에 대한 욕설로 흘렀다. 대개 그런 주제는 제각기 입을 타고 한 마디씩의 욕이 나오면 다른 화제로 돌려지곤 했다. 유진은 그제야 생각난 듯 물었다. 

“근데 김종인 쟤 어디가?”







다음날 퀴즈가 있다는 걸 뒤늦게야 안 찬열은 친하지도 않은 후배의 노트를 빌려야했다. 지희인지 지연인지 이름도 헷갈리는 후배는 찬열이 말을 걸자 얼굴을 붉히며 싫은 기색 없이 노트를 건넸다. 찬열은 제 외모가 주는 편리함을 모르지 않았다. 사실 이런 귀찮은 것까지 챙겨가며 학교생활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나름 고학번인데 재수강 크리티컬을 맞기는 싫었다. 

도서관에서 나왔을 때, 하늘은 불안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찬열은 커다란 눈을 위로 들어 몇 번쯤 깜빡였다. 빗줄기가 가늘게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더 굵어질 게 분명했다. 묘하게 습기가 돌더라니. 찬열은 제 가방에 들어있는 우산을 떠올렸다. 가방을 뒤적이다 손에 우산이 걸렸을 때였다. 저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은 분명 준면이었다. 찬열은 잠시 멈칫 했다.

한때의 찬열은 준면을 예상외의 장소에서 마주할 때마다 이게 내정된 운명은 아닐까, 하고 감상에 젖곤 했었다. 지난 일이었다. 준면은 주로 학교에 오랜 시간 남아있었고, 잔심부름 같은 걸 후배에게 넘길 성정도 못 되는 사람이었다. 제 몸이 고단한 일을 딱히 가리지 않았고, 아마 지금의 걸음도 그 연장선상에 놓인 것일 터였다.

어쨌거나 찬열은 가방 속에서 쥐었던 우산을 놓았다. 그리고 가방을 다시 뒤로 멨다. 1분 1초가 다르게 아주 약간 굵어진 빗줄기 사이로 몸을 내맡긴 찬열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허리를 굽혀 빠르게 준면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짙게 그늘이 진 탓에 준면이 휙 고개를 돌려 찬열을 올려보았다. 준면이 뭐라 입을 뗄 틈을 주지 않고 까딱, 고갯짓을 한 찬열이 말했다. 

“가는 데까지만 씌워줘요.”
“나 본관 가는데.”
“그럼 거기까지요.”

준면은 무슨 소리 하는 거냐는 말을 꾹 참고 찬열을 가만히 올려보았다. 찬열의 자취방은 반대 방향의 쪽문으로 가는 편이 훨씬 빨랐다. 찬열은 제 말을 물릴 생각이 전혀 없는 얼굴로 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웃지 않는 찬열은 조금 낯설었다. 준면은 깜빡이는 찬열의 눈이나 꾹 다물려 다정하지 않은 입술 따위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데려다줄게.”

찬열은 뒤늦게 이러지 말걸, 생각했다. 후배가 우산이 없어 비를 맞고 집에 간다. 준면은 이런 상황을 모른 척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도 자꾸 간과했다. 찬열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찬열은 제가 필요 이상으로 귀찮은 사람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얼쩡거리는 것만으로도 준면에게 저는 충분히 귀찮을 수 있었다. 

“됐어요. 가는 데까지만 가요.” 
“맞고 가면 감기 걸려.”

준면의 덤덤한 말처럼 과연, 빗줄기는 제법 굵게 방울졌다. 새파란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사나워지고 있었다. 찬열은 더 우기는 대신 짤막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준면으로서는 그 편이 좋을 것이다. 

“차 온다.”

급작스럽게 코너를 돈 차체이 등장에 준면이 팔을 뻗어 찬열의 몸을 끌어당겼다. 누가 봐도 체격 차이가 심한 두 사람이었지만, 준면은 종종 형 노릇을 하려 들었다. 이런 식으로. 팔의 각도가 우스울 정도로 꺾어졌다. 어깨를 안았다기보다는 거의 걸친 수준이었다. 들어달라는 말 한 마디를 못해 높이 든 우산부터 우스울 수 있었다. 찬열은 소리 없이 웃었다. 

반면 준면은 약간 눈썹을 구겼다. 손끝에 닿은 찬열의 한쪽 어깨가 푹 젖어있었다. 준면은 눈을 돌려 바깥쪽을 향한 제 어깨를 흘금 쳐다보았다. 미처 피할 수 없었던 빗방울이 튀어있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젖어있진 않았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미안해진 준면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좀 가까이 와.”

그러나 찬열은 간격을 넓히지도, 좁히지도 않은 채 묵묵히 걸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빗속에서 풍기는 준면의 향수 냄새 섞인 체취에 찬열의 가슴이 정신없이 떨리고 있었으므로. 







술집을 나온 종인은 어딘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발길 가는 대로 걸었다. 걸음이 멎은 곳은 세훈의 집 근처였다. 

아무 건물 입구에나 앉은 종인이 잠시 숨을 고르며 호흡했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비에 종인의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다. 물기를 대충 손으로 털어낸 종인은 핸드폰을 꺼냈다. 종인은 원래 숫자의 나열을 쉽게 익히지 못 했다. 길면 길수록 그랬다. 그런 저에게도 전화번호부를 뒤지지 않아도 누를 수 있는 번호가 있었다. 고민의 끝자락에서 누를까 말까를 항상 고민하던 번호였다.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었지만 종인은 술기운을 빌려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뚜르르 하는 신호대기음이 엄청나게 길었다. 이쯤 되면 일부러 받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종인은 끊지 않았다. 잔뜩 떨던 심장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소리의 반복으로 서서히 차분해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신호대기음이 뚝 끊겼다. 덜컥하고는 침묵이 흘렀다. 세훈이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종인은 사실, 전화가 연결될 거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세훈은 야속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세훈아.”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전화를 건 것은 제 쪽인데 장난전화처럼 구는 것은 저 쪽이었다. 종인은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우유는 잘 있어? 아까 들었는데 다음주 철학 휴강될 지도 모른대. 뭐하고 있었어? 지금 비 와. 일기 예보에는 비 온다는 말 없었는데..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을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종인은 한참이나 떠들었고 세훈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작은 숨소리만이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었다. 종인은 문득 이 전화를 받은 것이 세훈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소리 죽여 웃었다. 

“세훈아.”

다시 한 번 부른 이름에도 대꾸는 없었다. 종인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끄집어냈다. 

“보고 싶다.”
“…….”
“너네 집 근천데.. 나올래? 기다릴게.”

거기까지 말했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배터리가 없었던 지 종료화면이 떴다. 종인은 까맣게 꺼진 핸드폰 액정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나올 리 없겠지. 종인이 피식 웃었다. 

골목을 돌아 편의점에 들어갔다.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흘금 보았다. 저녁 9시가 덜 된 시간이었다. 갑자기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숙취해소음료를 살까도 싶었으나 속을 게워내는 데 일조하는 걸 지금 마셔서 하등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이내 그만두었다. 술에 취한 머리는 생각보다 회전이 빨랐으나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눈이 약간 풀린 채로 편의점 안을 휘적거리고 도는 종인을, 아르바이트생은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편의점을 나온 종인의 손에는 물 한 병과 파티용 풍선 한 봉지가 들려있었다. 대체 이걸 왜 샀지. 종인은 뒤늦게야 생각했다. 봤을 땐 이런 걸 다 파네, 하고 집었던 것 같은데 나와 보니 그냥 제가 너무 우스웠다. 빗줄기가 굵어져있었다. 종인은 아까 들어갔던 건물 입구에 앉아 느릿느릿 비닐 포장을 뜯었다. 홀쭉한 풍선은 딱 열 개 들어있었다. 종인은 생각했다. 다 불 때까지 오세훈이 오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모양이 제각각인 풍선은 어떤 것은 잘 불어졌고, 어떤 것은 한참이고 힘겹게 불어야 겨우 부풀었다. 아홉 번째 풍선은 아무리 불어도 도무지 부풀지 않았다. 종인은 부루퉁하게 입술을 풀었다. 그리고는 힘을 있는 대로 주어 불었다. 내내 작게 꿈틀대던 풍선이 팽창했을 때였다. 새까만 우산을 든 세훈이 제 앞을 가리고 섰다. 겨우 부풀었던 풍선이 확 쪼그라들었다. 세훈은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너.. 여기서, 뭐해.”

세훈의 말은 띄엄띄엄하게 이어졌다. 종인은 무슨 일인지 제 눈에 습기가 어려 있음을 느꼈다. 울컥하고 차오르는 것이 뭔지는 저도 몰랐다. 종인은 그저 젖은 눈으로 세훈을 올려다보았을 뿐이다. 세훈은 숨을 길게 내쉬고는 다시 물었다. 

“뭐해. 여기서.”

종인은 제 손에 불지 못 한 아홉 번째 풍선이 쥐어져있음을 깨달았다. 종인은 세훈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안 불어져.”
“…….”
“불어줘.”
“허..”

세훈은 어이없고 허탈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종인이 취했음을 한 눈에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감정은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왜 이렇게 휘둘리는 거지. 세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훈은 곧 우산을 접고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차분하던 머리카락을 헤집고, 아무 것도 없는 바닥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말없이 내밀어진 풍선을 넘겨받았다. 종인이 한참을 물었기 때문에 입구가 종인의 침으로 번들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훈의 동작은 모든 것이 정해진 수순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침이 잔뜩 묻은 그 풍선을 세훈은 거리낌 없이 받아들고 불었다. 종인이 아무리 애써도 좀처럼 부풀지 않던 풍선은 세훈의 입을 타자 금세 부풀었다. 빵빵하게 커진 풍선 끝을 묶어서 종인에게 내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종인은 내밀어진 풍선을 받지 않고 한참이나 세훈을 올려 보았다. 세훈은 눈썹만 한 번 까딱했다가 별 미련 없이 손에 들린 풍선을 내던지듯 놓았다. 

“또 왜.”

그 말투는 어딘가 체념조로 들렸다.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은 듯한 목소리에 종인의 심장이 찡하게 울렸다. 

종인은 정말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사귀자.”
“…….”
“사귀자, 세훈아..”

사귀자, 세훈아.. 

종인의 말에 세훈은 얼어버린 듯 미동도 않고 종인을 내려 보았다. 종인은 내리꽂히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지만 조금 두려워졌다. 말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밤은 몹시 어두웠고 바깥의 가로등은 수시로 점멸했으며 가로로 긴 세훈의 눈은 어딘가 슬퍼보였다. 

세훈은 움직이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주 천천히 깨어났다. 내내 냉랭하던 입술이 약간 끌어올려졌다. 세훈은 곧 무릎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는 종인과 똑바로 눈을 맞추고는 조금 더 힘주어 웃었다. 

“너 나 안 좋아하잖아.”
“…….”
“친구라면서.”

종인이 고개를 두 번 위아래로 끄덕였다. 어린애 같은 고갯짓에 세훈이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우리는 안 되는 거야.”
“…….”
“바라는 게 맞물리질 않잖아.”

종인은 아주 어려운 말을 듣는 것처럼 세훈을 바라보았다. 사실 세훈은 종인이 취중에 저를 찾아온 것을 알고 있었고,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전처럼 기억하지 못한다면 더 좋았다. 밀도로 치자면 종인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순간보다 지금이 더 진지했다. 세훈이 굽혔던 무릎을 펴고 쉽게 일어났다. 

“데려다줄게. 가자.”

세훈의 깔끔한 말에도 종인은 여전히 앉은 채였다. 

“너 안 일어나면 나 그냥 가.”
“가지마.”

가지 말라니. 세훈은 그 말에 더 빠른 체념을 알았다. 앞서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건 이미 배웠다. 세훈은 종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종인아.”

아주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울림이 다정했다. 

“나랑 사귀면..”

종인은 같은 말을 웅얼거리고만 있었다. 세훈은 진심으로 당혹스러웠다. 마음에도 없을 말이 벌써 몇 번째란 말인가. 그것은 하필 제가 원했던 것이고, 이미 내쳐졌던 진심을 회유하는 말이었기에 세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을 내리깔고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핥았다. 종인은 세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 지 다시금 말했다. 

“사귀자.”
“…대체 왜.”
“니가..”

모른 척 하는 거 싫으니까, 하고 종인이 웅얼거렸다. 그리고는 끌어안은 무릎에 얼굴 파묻었다. 세훈은 그 짧은 순간, 속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건 이런 기분일까, 하고 생각했다. 이미 바닥까지 봤다고 생각했는데. 세훈은 짧게 한숨을 뱉고는 종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기분이 몹시 참담했다. 

빗속에서의 세훈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이어졌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멀어지는 걸음에 따라 나온 종인이 제 등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걸음이 엉키는 바람에 거의 엎어지듯 뒤에서 끌어안게 된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종인은 세훈의 목덜미 부근에 얼굴을 묻은 채로 꼼짝도 않고 버티고 있었다. 더운 숨이 피부를 간질였다. 세훈은 할 수 있는 최대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니가 이러면 기대하게 된다고.”
“……응.”
“시험 하지 마.”

조그맣게 울리는 세훈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13.




이미 익숙해서 자주 꾸는 꿈인가 싶은 천장이었다. 시야가 훤해지기도 전에 이 곳이 세훈의 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을 천천히 일으키자 뒷골이 띵하게 울렸다. 종인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짚었다.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둔통이 밀려들었다. 뒤이어 종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약하게 터졌다. 침대에는 꼭 제가 누운 자리만큼 어질러져 있었다. 

방은 조용하지만 저 외에 누군가의 움직임이 빚어내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씽크에 유리가 닿았고 물이 쏟아졌으며 걸음이 끌렸고 계단이 삐걱였다. 종인의 청각은 모든 움직임을 그리고 따라가고 있었다. 곧 계단을 밟고 올라온 세훈이 모습을 보였다. 세훈은 종인 스스로가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뻔뻔함에 혀를 내두를 틈도 주지 않았다.

이르게 아침을 맞았는지 세훈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낮은 천장 아래로 조심스럽게 앉은 세훈이 손을 내밀었다. 하얀 손에는 머그컵이 들려있었다. 종인은 멍한 얼굴로 내밀어진 컵을 받아들었다. 

“좀 괜찮아?”

굼뜬 동작으로 물을 넘기던 종인이 눈을 크게 떴다. 세훈은 길게 시선을 늘여 종인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쌓인 얼굴로 종인을 보던 세훈은 이내 눈을 내리 깔았다. 마주 닿는 눈길이 부담스러운지 손가락만 뚝뚝 꺾어대던 세훈이 한참을 뜸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어제 일, 기억 나?”

종인은 들고 있던 머그컵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손끝에 힘을 주었다. 세훈이 찰나의 떨림을 놓치지 않고 컵을 다시금 받아들었다. 분명 세훈은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이었고, 저 역시 그랬으므로 두 사람의 침묵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몹시 낯설었다. 변화란 무릇 조용하고 그윽했다. 간신히 적신 입술이 금세 말라왔다.







세훈은 제 허리를 끌어안은 종인을 뿌리치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기에 축축하게 젖어든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뱉어진 말 때문인지 몰랐다. 골목은 어두웠고, 어둠 속에서는 오감이 예민해졌다. 물과 흙이 뱉어내는 비린내가 훅 끼쳤다. 세훈은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제 허리를 감은 종인의 손을 부드럽게 풀어냈다. 맞닿은 종인의 손에서도 떨림이 묻어나고 있어, 세훈은 그제야 힘겹게 웃을 수 있었다. 종인 쪽으로 몸을 돌린 세훈이 말했다.

“종인아. 나 봐.”

세훈은 단단하게 종인의 양 어깨를 잡았다. 종인이 아래로 떨어뜨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밤에 잠긴 종인의 얼굴은 비에 젖어있었다. 세훈은 다시 한 번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종인의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세훈은 그 진동을 애써 모른척하며 입을 열었다.

“니가 다시 한 번 말하면 나는 거절 안 해. 그러니까..”

잘 생각해. 
마지막 말은 흐려졌다. 종인의 눈꺼풀이 천천히 깜빡였다. 그저 감아버렸나 싶을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세훈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종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결정이건 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기대를 제 마음대로 쥐락펴락 할 수 없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았다. 흠뻑 젖은 새하얀 얼굴은 어쩌면 우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종인은 좁아지는 시야와 둔하게 구르는 사고로 제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것을 알았다. 그래도 이 말만은 해야 했다. 

“사귀자고..”

세훈은 어쩌지도 못 할, 울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 말을 들었다. 웅얼거리듯 쏟아낸 종인이 어지러운 듯 비틀거렸다. 세훈은 그런 종인의 몸을 당겨 안았다. 식은 몸이 무게를 실어 제게 기대왔다. 세훈은 종인의 어깨에 가는 턱을 얹고는 천천히 등을 쓸었다. 입술 끝을 간신히 끌어올린 세훈이 들리지 않을 대답을 꺼냈다.

“그래.”

어쩌면.. 이건 나한테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세훈의 뜨겁게 데인 속은 이미 외로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무엇도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종인의 몸을 더욱 밀착해 안은 세훈이 숨을 길게 토해냈다. 드문드문한 가로등 불빛에 얼룩진 골목으로는 밤이 깊도록 끈질긴 비가 내렸다.







세수를 하고 나온 종인은 입고 있는 티셔츠가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물얼룩이 진 티셔츠를 내려 보고서야 안 것이었다.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귓가가 홧홧하게 뜨거웠다. 종인은 수건을 내려놓고 바닥에 앉아 세훈의 등을 올려보았다. 우유는 세훈이 선 씽크 근처에 얼쩡거리다가 손짓 한 번에 금세 흥을 잃고 창틀로 뛰어올랐다. 고양이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날랬다. 

이렇게 간단한 거였다니. 어제의 일이 기억나느냐고 물었던 세훈은 종인의 고갯짓 한 번에 희미하게 웃었을 뿐이었다. 세훈은 고리를 엮어놓고도 종속을 잊은 듯 굴었다. 종인은 지금까지 고민한 시간이 바보 같다고, 잠시 생각했다. 

“별 게 없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세훈은 테이블 위에 시리얼 박스와 뜯지 않은 우유 한 팩을 가져다 놓았다. 곧 이어 그릇과 숟가락 두 개를 챙겨와 종인과 제 앞에 놓고는 저도 종인과 꼭 같은 자세로 앉았다. 

“속은 좀 어때?”
“어.. 괜찮아.”
“어제 많이 마셨어?”
“그냥 좀..”

물어오는 세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종인은 안심했다. 사귄다, 라는 명제만으로 제가 알아오던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종인은 제 그릇에 시리얼을 와르르 부었다. 창틀이며 계단을 노닐던 고양이는 어느덧 세훈의 포갠 다리에서 목을 울리고 있었다. 털이 깨끗하게 손질된 하얀 고양이는 어딘가 세훈과 닮아있었다. 종인은 저도 모르게 소리 없이 웃었다.

순차적으로 종인이 우유팩을 뜯었을 때였다. 세훈이 손을 뻗어왔다. 그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짧은 순간 종인이 몸을 떨었다. 지나칠 정도로 놀라버린 종인의 반응에 세훈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하고 갈 곳을 잃었다. 그저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려던 것뿐이었다.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관계를 떠나서 흔히 있어왔던 일이었다. 종인이라고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종인의 반응은 별스럽기까지 했다. 언제라면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타이밍이 나빴다. 세훈은 머쓱한 듯 뻗었던 손으로 제 앞머리칼을 털어냈다.  

아.. 종인은 뒤늦게야 수습하듯 세훈에게 손을 뻗었으나 그 손이야말로 갈 곳을 모르고 있었다. 종인은 이내 손을 거둬냈다. 세훈은 복잡한 얼굴로 옅은 한숨을 쉬었다. 무게를 전이시키지 않으려 입술은 끌어올린 채였으나 달리 웃는 것 같지 않았다. 고양이는 가르릉거리며 세훈의 다리를 갉작대고 있었다. 종인은 사과를 해야 할 지, 변명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렇게나 웅얼거렸다. 

“그러려던 게 아니고 그냥 좀, 놀라서. 어..”

종인은 세훈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방법을 몰랐다. 세훈은 종인의 내리깐 눈가에 잠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고 빠르게 깜빡이는 눈을 보며 세훈은 생각했다. 괜한 짓을 한 걸까.. 그래도 기대나 약간의 욕심은 쉬이 버려지지 않으니까. 세훈은 엷게, 조금은 쓸쓸한 얼굴로 웃었다.

“종인아.”
“응.”
“애쓰지 마.”

괜찮으니까.. 
사실 괜찮지 않아서, 세훈이 해주고 싶었던 말은 온전한 모양새로 끝나지 못했다. 







백현은 강의실 맨 앞줄의 센터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뒤통수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누구나 앞줄을 기피하긴 했지만 이 수업은 유독 심했다. 시야가 유독 좁은 건지 가장 근처에 앉은 한 사람만 타겟으로 잡고 질문 폭격을 쏟아내는 교수의 탓이었다. 백현은 어이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사람을 피해보려는 목적이 빤했다. 발상이 튀어도 저렇게 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매사에 신경이 기민하게 곤두서는 경수는 조심성 없는 걸음의 주인이 백현임을 이미 알았을 지도 몰랐다. 백현은 경수의 빈 옆자리에 시선을 두었지만 적을 두지는 않았다. 부러 두 줄쯤 떨어지고 센터에서 비켜난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작은 머리통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저렇게까지 파르르 떨어대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백현은 강의가 시작된 후로도 힐끔거리며 경수를 보았고, 종래에는 대놓고 시선의 방향을 틀었다. 경수의 옆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비교적 편안해보였다. 그러니까, 제게 희미하게 웃어보이던 얼굴보다야 훨씬 그랬다는 것이다. 단순히 누군가를 곁에 두는 것이 익숙지 않은 걸까. 아니면 단지 그게 저라서 불편한 걸까. 백현은 새삼, 경수의 방식이 무척이나 낡았다고 생각했다. 답답함이 반, 안쓰러움이 반이었다. 그러니까, 왜. 백현은 경수의 덤덤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구부린 제 팔 위로 엎드렸다. 







쉬는 시간이 되자 졸음을 이기지 못 한 사람이나 생리적 현상을 해결해야 할 누구들만이 자리를 비웠다. 백현은 저를 부르는 톤 높은 목소리에 인상을 구기며 의자를 끌었다. 터벅터벅 걸어가 이미 둥그렇게 앉은 얼굴들을 보았다. 다행히도 유경은 없었지만 저를 뺀 조원 네 명중 두 명이 유경의 친구들이었다. 저도 모르게 뒤통수로 손이 갔다. 제 손길에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강의 중 느닷없이 떨어진 팀 과제는 출석부 이름순으로 끊겼다. 기말고사를 코 앞에 두고 대체 과제랍시고 나온 대안에 모두가 인상을 구겼다. 원래 뜬금없는 언행을 일삼는다고 정평이 난 교수긴 했으나 이런 방식은 백현도 좀 짜증이 났다. 그래도 유경의 친구들이면 학점 챙기기는 수월할 터였다. 유경이 알게 모르게 제 친구들에게 날을 세우고 학점을 챙기는 것을 아직은 기억하고 있었다. 내키지 않은 얼굴로 핸드폰 번호를 꾹꾹 찍어주면서도 백현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나 저 새끼랑은 안 한다고.”

크게 울리는 목소리는 선택과는 상관없이 귓가로 내리꽂혔다. 강의실을 메운 대부분은 소리의 근원지로 눈을 돌렸다. 백현도 그 중 하나였다. 듣지 않을 수가 없이 언성을 높인 것은 백현보다 한 학번 위인 선배였다. 곤란한 얼굴의 여 선배가 말 대신 손짓으로 그를 중재했다. 그럼에도 짜증을 숨기지 않고 인상을 험하게 구긴 선배의 얼굴을 본 백현의 눈썹이 슬쩍 휘었다. 

선배의 표적은 다름 아닌 경수였다. 백현은 작년, 경수가 조별 과제에 참여하지 않았던 같은 조의 모 선배의 이름을 프리젠테이션에서 뺐던 일을 떠올렸다. 재수강 과목의 학점마저 가관이었다던 선배는 분명 저기서 언성을 높이는 얼굴과 일치했다. 물론 백현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누구도 경수의 편을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보란 듯이 시비를 붙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백현이 시선의 각도를 약간 비틀었다. 선배의 근처에 선 경수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서있었다. 험한 소리를 들었다고 울음을 터트린다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전개는 없었다. 다만 경수의 순한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도경수, 사과하고 대충 끝내자. 형주 너도 그만해라. 다 지난 일에 무슨.”

그를 중재하는 다른 선배의 얼굴도 피곤한 듯 구겨져있었다. 백현보다 두 학번 위인 선배는 잘 알지는 못했으나 과 내에서 평판이 좋은 축에 속했다. 과제와 후배들을 동시에 이끌어야겠다는 책임감을 지고 팔을 걷은 것만 봐도 그 평판은 수긍이 갔다. 강의실 안의 대부분은 연극이라도 보듯 그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백현도 이미 같은 조의 여자애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들을 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경수를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던 선배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떨어질 사과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더 길게 싸우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역시 저보다 윗사람이 하는 말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백현은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말았다. 경수는 짙은 눈썹을 약간 휘어뜨리고 커다란 눈을 서서히 깜빡이고 있었다. 한참 만에 선배님, 하고 운을 뗀 경수의 말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이 씨발새끼야?”

둥글어지나 싶던 분위기는 단번에 험악해졌다. 욕설이 잇새를 비집고 나오자 둘 사이를 중재해보려던 선배는 못 이기겠다는 듯 이마를 짚더니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누구나 귀찮은 일에 말리기는 싫을 테니까 그런 그를 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은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선배는 호기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방해꾼도 없어졌겠다, 그는 누구도 경수의 편을 들지 못하리라는 뻔한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에 한 번쯤은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가 곧장 경수의 앞에 섰다. 한 뼘은 족히 큰데다 덩치마저 만만찮은 그 앞에서 경수는 주눅 든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이 경수의 자존심이었다. 

“더 씨부려봐. 씹새끼야.”

위협적으로 뇌까리는 말에도 경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똑바로 뜬 눈과 꼿꼿하게 쳐든 고개가 그랬다. 굽히지 않는 고집은 때로 타인의 자존심을 효과적으로 긁어내릴 수 있었다. 경수라고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자존심이라.. 백현이 불편한 듯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다소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머리칼을 털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현은 모두가 지켜볼 뿐인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선배. 백현이 답지 않게 목소리를 깔았다. 

“보는 눈도 많은데 그만하시죠.”

백현은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의 따가움을 알았다. 다시 말해, 백현은 원래 이런 류의 귀찮음에 휘말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백현은 감당할 이유가 제게 있지 않은 모든 상황에의 개입을 꺼렸다. 몹시 예외적인 이 상황은 허무하게도, 다소 긴 쉬는 시간을 가졌던 교수가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들고 모습을 드러내면서 종결되었다. 백현은 자리로 돌아가면서 꽉 눌린 듯한 가슴을 두어 번 내리쳤다. 그러니까, 왜. 







늘어놓은 것도 없는데 자리를 정리하는 속도가 더뎠다.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머리가 늘어가고 있음에도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같은 조인 동기 하나가 메시지 확인하라는 말을 남기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구 여친 일당과 과제를 해야 하는 것은 조금 갑갑한 상황이긴 했지만 그냥 대강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험악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선배도 별 말 없이 자리를 떴다. 그래도 최소한의 무안함을 아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강의실은 평범한 속도로 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백현이 굳이 곁눈질 하지 않아도 저쪽에서 꾸물거리는 것은 경수가 분명했다. 

도의는 아는 놈이군. 백현은 생각했다. 백현이 말없이 가방을 둘러메자 경수가 내리 깔았던 눈을 들었다. 먼저 말을 걸 줄 알았을까. 백현은 무뚝뚝한 얼굴로 강의실을 나갔다. 그럼에도 경수는 두 발짝쯤 떨어져 백현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소리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텅 빈 좁은 복도를 거침없이 걷던 백현이 느닷없이 멈췄다. 그러자 저를 따르던 걸음 소리도 멎었다. 백현이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든 채 몸을 틀었다. 

“야.”

백현이 뱉어낸 것은 딱 한 음절이었음에도 어조는 약간 짜증스럽게 울렸다. 경수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고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짐짓 태연한 체 하는 저 얼굴. 백현은 다시금 속이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경수를 보면 꼭 그랬다. 뭐가 얹힌 것처럼.. 경수의 손에는 가방에 넣고도 남은 책이 무겁게 들려있었다. 

“너 하는 짓 진짜 못 봐주겠다.”

그 말에 험한 소리를 들어내면서도 내내 꿋꿋하던 경수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험악한 분위기의 선배들 앞에서도 그렇게나 담담하더니. 백현은 그 작은 동작까지도 제 속을 뒤집어놓는 것 같아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천장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바닥도 한 번 보았다가 복도 벽까지 쳐다본 백현이 눈을 어쩌질 못하고 이미 엉망인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경수를 쳐다보았다. 경수는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백현에게 그 얼굴은 어쩐지 엄마에게 혼나기 직전의 어린애마냥 애처롭게 보였다. 백현의 입이 연습처럼 달싹이다가 곧 소리를 냈다.

“너, 그냥 나로 해라.”

경수가 잠에서 깬 듯 푸르르 몸을 떨었다. 백현을 보는 눈은 당혹으로 물들어있었다. 백현은 이미 뱉어버린 말의 수습을 앞두고 인상을 쓰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풀리지 않는 것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늘게 구겨진 눈을 바로 뜬 백현이 방금 내쉰 한숨처럼 덧붙였다.

“잘 해줄게.”







관계가 다르게 규정되고 나자 두 사람의 시간은 세훈의 방에서 보다 빈번하게 흘러갔다. 굳이 사귀게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장소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훈이나 종인이나 사람이 우글대는 카페 따위에서 머리를 맞대는 것은 내키지 않아했다. 어쨌거나 몸은 편했으나 마음이 약간 붕 뜬 것처럼 불안했다. 

세훈은 그 날 이후로 종인에게 손끝 하나 대는 일이 없었다. 어깨나 팔 따위의 가벼운 터치는 물론이고, 정말 손끝조차 스치려들지 않았다. 종인은 그때 알았다. 의식적으로 저를 피하는 동작은 배려이면서 동시에 폭력일 수 있었다. 종인은 이따금씩 초조함과 두려움을 느꼈다. 의식이 지배당하는 감각은 생각보다 난폭했다. 

어쨌거나 종인은 길게 누워있었다. 두 발이 벽을 짚었고 길게 뻗은 다리가 사선으로 공중을 갈랐다. 피로하지 않아도 일단 누워있으면 편안했다. 세훈은 한 번도 저를 타박한 적이 없었다. 의미 없이 발을 움직이자 벽지가 쓸리는 소리가 났다. 세훈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말고 앉아 우유의 등허리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털을 결대로 쓸어주면 고양이는 곧 경계를 풀고 얌전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세훈은 손짓을 멈추지 않으며 창밖을 한 번 올려보았다. 가만히 바깥을 응시하던 세훈이 조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 오네.”

종인이 힐끗 고개를 들어 창을 보았다. 정말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는 부슬부슬하고 가늘었다. 종인이 귀찮다는 듯 낮게 말했다.

“그런 말 없었는데.”
“데려다줄게. 가자.”

목소리는 부드럽고 강경했다. 다정하게 털을 쓰다듬던 손을 금세 거둬낸 세훈이 몸을 일으켰다. 날카롭게 목을 한 번 울린 고양이는 미련 없이 의자를 거쳐 책상으로 올라가 앉았다. 종인은 느린 시선으로 세훈을 바라보다가 배를 덮고 있던 담요를 아무렇게나 치워냈다. 몸을 일으켜 앉은 종인은 눌린 뒷머리칼을 쓱쓱 빗었다. 세훈은 이미 일어나 쌀쌀한 밤을 대비하듯 얇은 가디건을 걸쳐 입고 있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내몰리는 것 같아, 종인의 기분이 약간 비틀렸다. 현관에 주저앉아 신발을 신는 얼굴이 무뚝뚝했다. 사실 종인은 조금쯤 서운했다. 밤이 시작되려하면 세훈은 자꾸 가라는 말을 했다. 제게 물어오는 일이 없어졌다. 종인의 기분이 서서히 침잠했다. 젖은 하늘에 붉은 기운이 옅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백현의 저돌적인 말에 경수가 웃음기도 없이 건조하게 뱉어낸 대답이었다. 무뚝뚝한 부정의 말은 거절을 내포하고 있었다. 백현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했던 말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경수는 이제 와서 백현과 모른 척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먼지와 습기가 엉긴 바람이 두 사람 틈으로 정신없이 불어댔다. 

“생각은 좀 해 봤고?”

불분명하게 떨어진 말에 경수는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백현을 올려보았다. 백현은 뻔뻔한 체 하며 성의 없이 제 콧잔등을 쓸어내렸다. 

“내가 낫지 않겠냐.”

그제야 뜻이 가닿았는지 경수는 표정을 확 굳혔다. 눈에 띄게 달라진 표정에 백현은 눈썹을 한 번 까딱했을 뿐이었다. 굳이 동의를 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경수는 유난스럽게도 벽을 치려 들었다. 단호하게 걸음을 멈춘 경수가 또박또박 내뱉었다.

“너 진짜 이러면 나 너랑 못 다녀.”

그러나 백현은 사실 새겨듣지 않았다. 못 들은 척 하며 고개를 뚝뚝 꺾었다. 먼저 몇 걸음쯤 걷다가 뒤를 돌았을 때 벌써 경수의 큰 눈은 뭔지 모를 것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차라리 보지 말 것을. 눈물을 받아줄 사람이 없는 이들은 제대로 울 줄도 모른다. 그리고 굶주렸던 정에 갑자기 휩쓸린 사람들은 쉽게 거절을 할 수 없다. 백현은 제 속까지 찡하게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물릴 생각은 역시 없었다. 충동이면 어떤가. 모든 일이 정해진 수순대로만 가야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쯤 경수는 백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14.




어느새 종강까지 꼭 한 주를 앞두고 있었다. 하루는 길었는데 일주일은 빠르게 갔고 한 달은 그보다 빨랐다. 시간이 가늠할 길 없이 흘렀다.  

갑작스레 떨어진 과제는 예상과 달리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다. 경수는 저를 향한 적개심을 감추지 않는 상대에 적지 않게 곤혹스러워했으며, 동시에 굽히고 들어가야 할 이유를 몰랐다. 이유 없이 사과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 때의 일은 다시 생각해보아도 제 잘못이 아니었다. 한 번 더 충돌하게 된다고 해도 결심은 확고했을 것이다. 그걸 알았던지 백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경수와 조를 바꿨다. 당사자인 경수에게조차 제대로 전하지 않고 일어난 일이었다. 

변백현과 조유경이 사귄 것은 같은 과 사람은 다 알 정도로 큰 소문이었다.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굳이 알려하지 않았던 경수까지 알고 있는 정도면 확성기를 쥐고 터트린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백현에게 번호를 넘겨받고 간 조 모임에서 경수는 몇몇 얼굴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엮을 수 있었다. 경수에게는 그저 조원일 뿐이겠지만 백현에게는 전 여자친구의 친구들일 그녀들은 입을 좀체 다물 줄 몰랐다. 어느 주제에나 잘 떠들었다. 종종 샛길로 빠지는 대화 속에서 경수는 이래서 질렸나.. 하고 가만히 생각했다. 그래도 결과론적인 수치에 있어서는 이쪽이 나았을 텐데. 백현이 속한 조의 발표를 보며 경수가 약간의 미안함을 가진 부분이었다. 

시험을 코앞에 둔 도서관은 사람이 들끓었다. 막차 시간이 되면 그래도 좀 나아질 거니까.. 경수는 빽빽하게 사람이 들어찬 와중에 간신히 열람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서관은 조용하지만 낮은 소음이 빈틈없이 차 있었다. 그래도 공부를 시작하기까지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경수는 쉽게 집중했다. 시험 일정에 맞춰 짰던 계획표를 한 번 훑은 경수는 금세 책 속에 푹 파묻혔다. 고개를 아플 정도로 처박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가는 손가락이 경수가 앉은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경수의 옆에는 백현이 서있었다. 

‘쎌 책 있냐?’

백현이 입모양으로만 물었다. 경수는 백현의 우물거리는 입모양을 한 번에 읽어냈다. 말없이 쌓아둔 책더미에서 찾아 내밀자 백현이 금방 갖다 줄게, 하고는 금세 자리를 떴다. 용건은 간단하게 끝났지만 경수는 백현의 뒷모습을 길게 쳐다보았다. 제가 앉은 1열람실을 벗어나 2열람실로 건너가는 것까지 본 경수가 다시금 펼쳐둔 책을 내려 보았다. 글자가 눈에 곧장 읽히지 않아 들고 있던 샤프로 죽죽 줄을 그었지만 여전했다. 경수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샤프를 내려놓았다. 마른세수를 하는 그 얼굴이 몹시 심각했다.

경수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당연하게도 백현이었다. 

이렇다, 하고 말해본 적은 없지만 백현과는 친구이고 싶었다. 한 집단에 속했다거나 규정하기 어정쩡할 때 엮는 이름 말고 두 사람간의 공감이나 교류로 명명할 수 있는 그런. 

제게 온 계기야 어쨌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드러내지 않는 배려는 받아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라 더 특별했다. 옆 자리에 앉고 밥이나 먹던 때도 내심 더 가까워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타고난 서투름과 경계심 때문에 선뜻 다가서지 못 했을 뿐이었다. 제가 먼저 앞질러가면 돌아설까봐 조금은 두려웠다. 기대를 말아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가슴의 속도는 불공평했다. 지금의 경수는 다른 의미로 두려웠다. 백현이 제게 보이는 노골적인 관심이 언제 끊길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혼자가 되겠지. 머릿속이 찡하게 울렸다. 경수는 답답한 마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공부 잘 안 돼?”

무심하기까지 한 목소리는 백현의 것이었다. 제게 말 붙이는 사람이야 이제 뻔했다. 뭐, 그냥.. 하고 대강 얼버무렸다. 백현은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지 그저 경수를 내려보고만 있었다. 경수가 약간 옆으로 비켜 앉자 백현이 경수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한 사람 정도는 더 들어와 앉을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이 남았다. 자. 백현이 뽑아온 자판기 커피를 건넸다. 경수는 건네받은 종이컵을 양 손으로 감쌌다. 마침 밤바람이 답지 않게 서늘하다 했는데 전해오는 온기가 언 손을 덥혔다. 주변이 적막했다. 두 사람이 앉은 곳은 중도를 반 바퀴쯤 돌아야 나오는 침침한 그늘 안에 자리한 벤치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어진 경수가 가만히 백현을 쳐다보았다. 백현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피식 웃었다.

“왜. 따라온 것 같아서 무섭냐?”
“그냥. 어떻게 왔나 싶어서.”
“책 갖다 주러 갔는데 마침 나오길래.”
“어.”
“그러니까 따라온 거 맞다고. 바보야.”

아.. 경수가 얼빠진 얼굴로 백현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백현이 어이없다는 듯 푹 웃었다. 경수는 손에 들린 커피를 마셨다. 달짝한 맛의 커피는 먹기 좋게 식어 있었다. 한 모금 정도만 담으려던 것이 잘도 넘어갔다. 

“내 생각 하지?”

뻔뻔할 정도로 태연한 어조로 뱉어진 말에 경수가 눈을 크게 뜨고는 백현을 쳐다보았다. 백현은 입 밖으로 나온 말보다 뻔뻔한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치켜들었다. 가로등 불빛도 가난한 어둠 속에서 백현의 얼굴은 희한하게도 밝아보였다. 입꼬리를 한 쪽으로 말아올린 백현이 덧붙였다.

“그러게, 나로 하라니까.”

그리고는 제가 한 말이 제 생각에도 우스운지 눈을 반쯤 접으며 피식 웃었다. 아래로 쳐진 눈매가 유순하게 휘었다. 그런 백현을 보던 경수가 어이없다는 듯 같이 픽 웃었다. 손에 들린 빈 종이컵을 구기며 경수가 중얼거렸다.

“너 되게..”

경수가 말을 고르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백현이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을 끊었다.

“잘생겼다고?”
“아니. 재수 없다고.”

백현과 경수의 입에서 동시에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중간고사 때는 어떻게 자리를 맡았나 싶을 정도로 도서관은 매 시간 꽉 들어차있었다. 아직 1학년이라 요령이 없는 탓도 있었지만 메뚜기 식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공부할 열정까지는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시험 기간이 시작되고 나자 종인과 세훈은 수업이 끝나면 곧장 학식이나 근처의 밥집에서 대충 식사를 해결하고 세훈의 방으로 향했다. 

오늘도 늘 그렇듯, 학관에서 별 맛 안 나는 볶음밥을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나오는 길이었다. 가슴께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여자가 저기요, 하고 세훈에게 말을 붙여왔다. 식상하기까지 한 말에 붙들린 세훈은 학관 입구의 소란함 속에서도 초연한 표정으로 여자를 내려 보았다. 키가 세훈의 입술쯤에나 오는 여자였다. 

“번호 좀 주시면 안돼요?”
“아.”

여자의 수줍고 뻔한 말에 세훈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종인을 돌아보았다. 종인은 약간 졸린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세훈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여자의 접근 앞에 종인은 완전한 타인이나 다름없었다. 종인은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을 뚝뚝 꺾었다. 

“죄송해요.”

세훈이 뱉어낸 말에 여자가 눈썹을 약간 구겼다. 

“여자친구 있으세요?”
“……네.”

간격을 길게 둔 대답에 여자가 무안한 듯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등을 보였다. 세훈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을 떠나 그 대답은 완곡한 거절이었다. 구두 굽 소리가 멀어지고 나자 세훈이 종인을 보며 눈썹을 휘며 슬핏 웃었다.

“미안.”
“뭘.”

종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학관에서 세훈의 집까지의 거리는 제법 먼 편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다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탓에 쭉 돌아서 걷곤 했다. 세훈이 이어폰 한 쪽을 건넸다. 종인이 귀에 그것을 끼우자 시끄럽지 않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람이 많은 길을 벗어나자 노랫소리는 조금 더 명확하게 들렸다. 한국어인지 영어인지 혹은 낯선 이국의 말인지 모를 가사를 흥얼거리는 보컬의 목소리는 잔뜩 취한 것 같았다. 종인은 한참이나 걷다가 조용하게 말했다.  

“한두 번 아닌 거 같던데.”

들으면 듣고, 못 들으면 그걸로 끝인 말이었다. 세훈은 가만히 앞을 보고 있었다. 종인은 그 무덤덤한 반응에 약간 실망했다. 그래서 부러 한 번 더 말했다.

“자주 이래?”

그제야 세훈이 느리게 고개를 돌려 종인을 바라보았다. 이어폰을 나눠 끼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거리는 닿지는 않아도 가까웠다. 귓가로 노랫소리가 부서졌다. 세훈은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불편한 얼굴이었다. 세훈은 난감한 듯 웃었고, 종인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태형에게 들었던 말이 이런 상황의 연장이겠지,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훈은 손을 씻고 바닥에 놓인 빨간 그릇에 사료나 물이 담겨 있는 지를 확인했다. 사료도 물도 아직 넉넉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항상 그렇듯 다리가 낮은 탁상을 펼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종인은 제 가방을 베고 바닥에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공부 하자며.”
“좀 있다가.”

종인이 다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 말을 듣는 척도 안하는 것 같은 반응에 세훈은 그저 어깨만 한 번 으쓱해보였을 뿐이었다. 종인은 여전히 바닥에 누운 채로 세훈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다리를 접고 앉아 책을 펼치는 세훈의 얼굴은 편안해보였다. 종인은 때마침 제 쪽으로 와서 알짱거리고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덥썩 안았다. 그리고는 분홍색 발바닥을 매만졌다. 말랑한 감촉은 언제건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안기는커녕 만지는 것조차 제대로 못 했던 종인은 이제 주인인 세훈보다 더 능숙했다. 

“우유 많이 컸다.”
“응. 많이 컸지.”

세훈이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세훈은 벌써 빈 종이를 메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눈과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종인은 제 가슴을 꾹꾹 눌러 밟는 고양이의 하얀 털을 쓸어내렸다. 손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종인은 우유의 하얀 털을 결대로 쓸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종인은 손짓을 멈추지 않으며 회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 머릿속에 들어찼다. 저를 돌아보는 세훈의 곤란한 표정. 미안, 이라고 사과하던 목소리. 

술김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긴 했지만 종인이 생각 없이 사귀자고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많은 생각과 고민이 뒤따랐고 입으로 뱉어내기까지의 어려움이 분명 남아있었다. 세훈을 놓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이 컸고 결국 이겼다. 친구였던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지면서 뒤따를 변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각오도 있었다. 그런데 세훈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듯 행동했다. 오히려 신경을 쓰는 것은 저 뿐인듯 보였다. 

혹시 후회하나. 해본 적 없는 의심이 머릿속을 스쳤다. 종인의 규칙적이던 손짓이 더뎌지자 냐앙, 하고 날카롭게 목을 울린 고양이가 품을 벗어났다. 눈을 돌려 그 광경을 본 세훈이 슬핏 웃었다. 종인은 괜히 부루퉁한 얼굴로 낮게 말했다.

“왜 웃어.”

세훈이 쥐었던 펜을 놓고 탁상 위로 천천히 엎드렸다. 팔 안에 머리를 기댄 세훈이 한참이나 종인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휘며 말했다. 

“예뻐서.”

듣기 지나치게 간지러운 그 말에 종인의 표정이 뜨악하게 일그러졌다. 퉁퉁한 입술이 어쩔 줄 모르고 벌어졌고, 얼굴은 물론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았다. 시선의 각도가 어그러졌다. 종인은 일으킬 생각이 없었던 몸을 뒤늦게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눌린 뒷머리칼을 대충 털어냈다. 달아오른 얼굴이 민망해 괜히 손부채질을 몇 번 한 종인은 엎드린 세훈을 한 번 내려 보았다가 금세 눈을 피하며 말했다. 

“니가 더 예뻐.”

딴에는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는데 세훈이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며 대놓고 인상을 썼다.

“그런 말 싫은데.”

세훈은 제대로 일어나 앉으면서도 잔뜩 찡그린 표정을 풀지 않았다. 종인은 세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만 깜빡이다가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너도 나한테 그랬잖아.”
“너 진짜 예뻐.”
“그런 말이 어딨어.”

허, 하고 어이없다는 듯 웃는 종인에게 세훈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 밀랍처럼 하얀 얼굴에도 붉은 기가 돌았다. 세훈은 마치 그런 제 얼굴을 감추기라도 하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다시 펜을 쥐었다. 뱉은 말이 민망한 것을 뒤늦게 알았는지 손은 전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다. 








찬열은 몸을 가만히 두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내내 긴 다리를 덜렁덜렁 흔들고 있었다. 춥거나 덥거나 날씨를 가리지 않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대는 그네들도 시험 앞에서는 별 수 없는지 잔디가 깔린 운동장은 휑할 정도로 비어있었다. 이따금씩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몇몇 사람들의 팔에 책이 들린 것을 보며 찬열은 지금이 시험 기간임을 실감하고 있었다. 

귓가에 울리는 노래가 서너 곡쯤 지났을 때, 피곤한 얼굴의 준면이 눈가를 짚으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준면을 발견한 찬열의 커다란 눈이 반쯤 접혔다. 씩 웃으며 팔을 휘휘 젓자 고개를 든 준면이 아, 하고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찬열은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는 가방 앞주머니에 대충 밀어 넣었다. 찬열의 앞에 다가선 준면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웃는다기보다는 참는 것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방금 왔어요.”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찬열의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이 그 증거였다. 준면은 가만히 찬열을 내려다보았고, 찬열은 준면이 저를 내려 보는 구도가 몹시 생경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도 나쁘진 않지만 역시 저를 올려보는 얼굴이 더 좋았다. 찬열은 빈 옆자리를 툭툭 내리쳤다. 앉아요. 그러자 준면이 뭔가 살피는 얼굴로 벤치를 내려다보다가 앉았다. 찬열은 뭔가 생각난 듯 아, 하고 내뱉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아이스티 캔을 툭 따서 건넸다. 아직 차가워서 캔 주변으로 물기가 돌았다. 

“자요.”
“너는?”
“마셨어요.”

고마워. 준면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지금껏 빈속에 주스만 들이붓다가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준면은 담당교수 사무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꼬박 삼십 분 동안 인턴쉽 추천 상담을 받았다. 준면치고는 늦은 일이었지만 그간 워낙 바쁘게 살았다는 것이 변명이라면 변명이었다. 받아든 음료수를 들고만 있을 수는 없어 몇 모금쯤 마셨지만 잘 들어가지 않았다. 찬열은 그런 준면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다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준면이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찬열을 쳐다보았다. 동그랗게 올려 뜬 눈이 제 속도보다 빠르게 깜빡였다.  

“피곤해보여서요.”
“언제는 뭐.. 근데 왜?”
“그냥. 얼굴 보고 싶어서요.”
“실없네.”

새삼스럽다는 듯 준면이 피식 웃었다. 준면은 실없다며 웃었지만 찬열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제가 불러내거나 우연에 기대지 않으면 좀체 볼 일이 없었다. 그래도 작년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졸업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맡은 일이 많아서 그런지, 올해 들어 준면은 늘 바쁘고 늘 피곤한 얼굴이었다. 찬열은 그런 준면이 안쓰러웠고, 그만큼 저 스스로도 안쓰러웠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찬열의 짝사랑은 오래 되었고 그만큼 낡아있었다. 통념만큼 아름답지만은 않은 해묵은 감정은 세월에 따라 질투와 착각, 기대, 사소한 분노를 묻혀갔다. 그렇다고 결코 처음의 형태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왜 아직도 얼굴 보는 것 정도로도 설렐까 싶을 정도로 좋았다. 

완연한 여름을 향해 가는 계절답게 꽤나 더웠다. 준면은 후, 하고 가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거리 달리기를 마치고 숨을 돌리는 얼굴로 멍하니 앞만 보던 준면이 좀 전의 찬열처럼 아, 하고는 메고 있던 가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얇은 파일 하나를 꺼내 건넸다. 

“찾아보니까 있더라. 심교수님 수업 듣지?”

얼결에 파일을 받아들긴 했지만 찬열은 영 모르겠다는 듯 커다란 눈을 굴렸다. 준면이 남은 음료수를 습관적으로 한 모금 더 마시며 덧붙였다.

“반은 매년 같은 문제로 나오니까 봐두라고.”

아.. 찬열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준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친절할 사람이지만 그것이 제게 돌려질 때, 찬열은 어김없이 감동했다. 그래서인지 찬열은 고맙다는 말도 쉽게 꺼내지 못하고 파일을 쥐고만 있었다. 준면은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흘금 쳐다보고는 찬열을 향해 물었다. 

“수업 있지 않아?”
“아, 맞다.”

뒤늦게 깨달은 찬열이 급히 가방을 둘러멨다. 이미 지각이 잦은 수업이었다. 찬열은 바쁜 와중에도 못 전한 말은 꼭 했다. 이거 진짜 고마워요. 손에 든 파일을 흔들어 보이며 찬열이 웃었다. 허둥대는 찬열의 모습을 본 준면이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수업 잘 들어. 찬열의 뒷모습이 사라지고도 준면은 그 자리에 한참이나 앉아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에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준면은 손에 반쯤 내용물이 찬 캔을 들고만 있다가 가방에 든 서류철을 꺼냈다. 때 마침 핸드폰이 진동했다. 

메시지를 확인한 준면의 입가가 웃음으로 당겨졌다. 출석 잘 했다고, 피곤해 보이는데 제발 잘 자고 잘 먹으라고, 시험 끝나면 밥 먹자고 쉴 틈 없이 빼곡하게 보낸 메시지 화면은 정말이지 찬열다웠다. 

간단하게 답장을 보내고 핸드폰을 밀어 넣은 준면은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찾아보니 있다고 둘러댔던 족보는 사실 제게 있던 것이 아니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문득 찬열이 생각났고 딱히 도움 준 일이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일부러 친한 동기에게 부탁해서 찾아달라고 한 것이었다. 모르는 편이 나을 오지랖 넓은 친절에 준면은 실없는 건 제가 아닌가, 하고 픽 웃었다. 

때 이른 여유는 상념과 직결되었다. 준면은 찬열과의 처음을 알고 있었다. 핑계를 붙이자면 술에 취해 생각이 더뎠던 것뿐이었다. 별 다른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나 고등학생 티를 덜 벗은 앳된 얼굴은 기억에 남아있었다. 찬열이 제대한 해의 개강총회에서 그를 몰라본 것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부터 상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찬열의 시작이 언제인지 물어본 일은 없었다. 준면은 받는 것의 이상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찬열에게만은 해당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준면은 꺼낸 서류철을 일 없이 뒤적여보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내도록 정도(正道)를 걸어왔다. 마음이야 아무래도 어떤가. 준면에게 한 번도 1순위인 적 없었던 것이었다. 이번 역시 그럴 것이다. 준면은 인턴쉽은 형식상 어쩔 수 없는 걸로 생각하라며, 입사에 힘을 써주겠노라 호언장담한 교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목으로 넘어가던 음료수는 어딘가 껄끄러운 맛이 났다. 

굳이 교수가 힘을 써주지 않더라도 준면은 제가 2학기면 상황에 의해 학교에 소홀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열심히 살았고, 세월에 대한 보답은 그 정도였다. 이제 찬열을 보는 것은 아마 어려워 질 것이다. 준면은 파일을 갈무리해 넣고는 일어섰다. 시선을 길게 늘여 학교를 쭉 둘러보았다. 준면에게는 이것이 사실상 마지막 학기였고, 벌써 끝을 앞두고 있었다. 









15.




기말고사도 막바지였다. 시험은 다 끝났고 과제 대체 과목 하나만 남겨두고 있었다. 리포트 제출만 끝내고 나면 방을 비울 참이었다. 제출일까지는 시간이 넉넉했기에 여유를 넘어 거의 종강한 기분을 누리는 백현이었다. 

이번 학기는 여러모로 기억에 박혔다. 경수와의 관계는 몹시 느리게 걸음하고 있었다. 사실 제가 뭘 바라고 그러는 지는 백현에게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문제였다. 단순한 흥미나 동정으로 치부하는 것은 비약이었다. 어쨌거나 경수는 분명 제가 겪어온 사람들과는 달랐다. 적응이 더디고 상황은 안타까웠고 방식은 답답했다. 

매사에 노력 없이 살았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따르는 편이었고, 평판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모든 일에 있어 노력 대비 결과도 좋았다. 정체는 불투명할지언정 타인을 향한 감정이 직설적으로 내리꽂히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경수를 생각하면 어쩐지 심장 언저리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백현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떨어뜨리고는 방을 쭉 돌아보았다. 사실 돌고 말 것도 없는 작은 방이었지만 마음 편하게 보낸 한 학기였다. 백현은 입학 때부터 내내 기숙사를 썼는데, 학기마다 별별 유형을 다 만났다. 처음에야 좋을지 몰라도 결국 나이가 어리면 어린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진상이었다. 반면 말수가 적고 매사 무덤덤한 표정의 종인은 꽤 좋은 룸메이트였다. 처음에는 뭐 이렇게 무뚝뚝한 애가 다 있나 싶을 정도였지만 알수록 귀여운 구석도 있었고 대하기도 편했다. 그간의 룸메이트들과는 죄다 연락을 끊고 끊기곤 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짧게 생각했다. 

의자를 빙빙 돌리며 종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언젠가 길에서 마주쳤던 키가 종인만큼이나 크고 희멀건 얼굴을 한 종인의 친구가 떠올랐다. 경수는 그를 두고 ‘쟤야.’ 라고 말했었다. 이제야 그러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갑작스레 호기심이 동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어쨌거나 그는 종인의 친구였고, 제가 봐온 바로는 종인은 친구가 많지 않았다. 곁에 두는 사람이 적은 대신 관계가 깊은 그런 부류. 어차피 뭐든 확률에 의한 도박이 아니겠나 싶어진 백현은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 대기음이 몇 번쯤 울리고 종인이 낮고 멍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백현은 슬리퍼를 벗고 다리를 침대에 걸쳐놓으며 말했다. 

“밥 먹었냐?”
“아뇨.”
“나와라. 밥 사줄게.”
“저 친구랑 있어요.”
“같이 사줄게.”
“저희 내일 시험 하나 남았는데.”
“시험은 원래 평소 실력으로 보는 거야.”

그 말에 종인이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었다. 백현도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밥만 먹고 가서 공부해. 형이 밥 사주고 싶어서 그래. 

“물어보구요.”

종인은 곧장 핸드폰에서 입술을 떨어뜨려 같이 있다는 친구를 향해 물었다. 세훈아. 룸메 형이 밥 사준대. 그때 본 형. 종인의 말을 들은 백현의 입술이 당겨졌다. 주사위는 제 편으로 굴렀다. 이름이 세훈이었구만. 백현은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수화기 너머로 세훈이 그러지 뭐, 하고 대수롭잖게 대꾸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네. 괜찮대요.”
“응. 일곱시에 후문에서 보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전화가 끊겼다. 종인과의 통화를 끝낸 백현은 곧장 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침대에 걸친 다리를 덜덜 떠는 모양새는 어딘가 껄렁하기까지 했다. 경수는 여유를 얼마 주지 않고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라고 말하는 단정한 목소리.

“뭐하냐.”
“그냥.”

경수의 말은 어쩐지 진짜 같았다. 뭘 하든 의미를 두지 않고 그냥, 있을 경수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아 백현은 슬쩍 웃었다. 

“시험 끝났지?”
“인체생리 과제 남았는데.”
“그거 아직 여유 있잖아. 밥 먹자. 나와라.”

조르는 말투인데도 그렇게 들리지 않는 것은 백현이 가진 힘일 테다. 경수는 잠시 뜸을 들였고 백현은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멀지 않아 그래, 하고 경수가 대답했다. 백현은 종인에게 했던 것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답을 돌려주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백현의 부름에 따라 모인 사람들은 제각기 모를 얼굴을 했다. 그 중 경수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짙은 곤란함이었다. 특히나 백현이 조금 늦었기 때문에 그것은 경도를 더했다. 차라리 도망갈까 싶었으나 백현이 등장한 시간의 애매함이 그마저도 차단했다. 

백현이 끌고 간 고기집은 사람으로 종강을 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백현은 상의 없이 큰 소리로 주문을 넣었다. 삼겹살 6인분이랑 참이슬 한 병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벌겋게 얼어붙은 고기와 소주, 서비스 콜라가 따라왔다. 경수는 그 때까지도 아무 말도 없었다. 불판에 불을 올리고 집게를 집어 드는 백현에게 종인이 조금은 곤란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형, 술은 왜 시켜요.”
“내가 먹으려고.”

종인의 물음에 백현이 가벼운 웃음을 섞어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세훈은 콜라를 따더니 세 개의 컵만을 채웠다. 백현은 그 동작을 유심히 보았다. 세훈은 다 알고 있다는 듯 경수를 뺀 나머지에게 컵을 돌렸다. 내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경수가 어렵게 웃어보였다. 세훈 역시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경수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색은 않기로 한 백현은 괜히 익지도 않은 고기를 들춰보았다. 지글지글 익는 고기와 소주병을 놓고 앉은 얼굴들은 영 어색했다. 그 중 태연한 것은 백현 하나였는데, 그 태연함마저 가장으로 보이게 할 만큼 미묘한 분위기가 돌았다.

네 사람 사이의 대화는 드문드문했고 무척이나 겉돌았다. 시험 잘 봤냐, 그 교양 들었다, 등 뻔하디 뻔한 얘기가 오갔다. 백현은 고기를 뒤집으며 세훈과 경수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세훈은 여상한 얼굴이었고, 경수는 어딘가 불편한 얼굴로 이따금씩 눈치라도 보듯 세훈을 쳐다보았다. 느려지는 손을 본 종인이 제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집으며 웃어넘기듯 말했다. 

“신기하게 이렇게 친구고, 또 이렇게 친구네요.”

젓가락을 든 손을 허공에서 연결시키듯 그어 내린 종인이 다시금 고기를 뒤집었다. 그러게, 하고 경수가 어설프게 웃었다. 백현은 들으라는 듯 뻔뻔한 목소리로 말을 되받았다.

“친구 아니야.”

그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순식간에 저를 향했다. 눈들에 놀라움이나 긴장 따위가 읽히는 것 같아 백현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아야했다. 백현은 익은 고기 한 점을 입으로 가져가며 무심히 말했다. 

“우리 사귀는데.”

뱉어진 말에 경수보다 먼저 굳어버린 것은 세훈이었다. 경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지만 백현이 본 것은 세훈이었다. 세훈은 커다랗게 올려 뜬 눈에 입술을 무섭게 굳히고 백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위로 떠오른 세훈의 눈은 서늘한 파장이 이는 듯 했다. 잠시간의 침묵이 오갔다. 종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는 표정으로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백현은 피식 웃으며 세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아뇨.”
“응. 익었네. 먹어라.”

주도권은 백현에게 있었다. 말투는 느긋하기까지 했다. 시끌벅적한 고깃집 안에서 딱 한 테이블만이 심각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종인은 팔뚝에 자잘한 소름이 이는 것 같아 뒤를 돌아 에어컨 온도를 확인했다. 에어컨은 24도에 맞춰져 있었다. 종인은 제 팔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먹는 데만 열중했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을 하며 세훈의 얼굴을 살폈다. 세훈은 싸늘하게 눈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시킨 고기는 거의 다 불판에 올려졌다. 더 시켜줄까? 백현이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백현은 쩝, 하고 혀를 찼다. 생각보다 파장이 컸다. 재밌네. 백현은 곁눈질로 경수의 얼굴을 살폈다. 벌겋게 달아있을 줄 알았더니 의외로 허옇게 질려있었다. 묵묵히 앉아있던 세훈이 테이블 구석으로 밀린 빈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저도 좀 주세요.” 

세훈이 백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백현은 조금 얼떨떨한 듯 소주병을 들었다가 곧 평정을 되찾고 피식 웃으며 술을 따랐다. 백현의 말간 얼굴에 여유가 떠오르면 상대는 대개 긴장했다. 세훈은 그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식사 내내 알게 모르게 반주를 했던 탓에 세훈에게 따라준 잔이 마지막이었다. 세훈은 잔이 채워지자마자 고개를 까딱하고는 단숨에 술을 삼켰다. 

“더 시켜줘?”
“아뇨.”

세훈은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문질렀고, 백현은 태연한 얼굴로 공기밥에 된장찌개까지 시켰다.







경수가 계산을 하려했지만 백현은 강경하게 그 손을 물리쳤다. 세훈과 종인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 백현은 귀찮다는 듯 손짓을 했다. 나가들 있어. 가게도 좁은데. 서있던 세 사람을 단 번에 가게 밖으로 몰아낸 백현이 지갑을 열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카드를 건넨 백현은 박하사탕을 두 개 입 안에 넣고 굴렸다. 한쪽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가게 문턱을 넘은 종인이 힐끔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간. 이제야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경수는 두 사람보다는 늦게 가게 밖으로 나와 어색하게 떨어져 서 있었다.

“잠깐만.”

세훈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선 종인을 향해 속삭이듯 내뱉었다. 그리고는 약간 떨어져 선 경수의 어깨를 짚었다. 경수가 고개를 들어 세훈을 올려보았다. 세훈은 종인에게 뱉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잠깐만. 그리고 세훈은 경수를 이끌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가로등도 없이 시커멓게 그늘진 골목에는 사람은커녕 고양이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진짜야?”

한숨처럼 세훈은 말했다. 경수는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세훈을 올려보았다. 세훈은 무표정한 얼굴에 눈썹을 약간 구기고 저를 내려보고 있었다. 경수는 갑작스럽게 속이 울컥 차오르는 기분이 들어 스스로도 당황했다. 울음이 차는 속을 꽉 눌러 참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세훈의 미간이 심각한 모양으로 구겨졌다.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경수를 내려 보았다. 경수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그냥, 걔가 장난 친 거야. 원래.. 잘 그래.”







“니 친구 어디 갔냐.”
“네?”
“없잖아.”

계산을 하고 나온 백현이 다소 태평한 말투로 물어와 종인은 그제야 아.. 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이번에는 백현이 핸드폰을 들었다. 뭔가를 꾹꾹 누르는 모습을 보다가 종인이 걸음을 뗐다. 경수를 데리고 사라졌던 골목 입구에 서자 두 사람 분의 인영이 보였다. 종인은 자리에 움찔 멈춰섰다.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진지했고, 종인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종인은 부러 태연한 척 물었다.

“뭐해?”
“잠깐만.”

세훈이 짤막하게 끊어 말했다.

“금방 끝나.”

그러면서도 금방 끝나지 않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워낙 표정 변화가 드물어서 웃는 얼굴과 웃지 않는 얼굴의 대비가 심한 편이긴 했다. 그걸 감안해도 지금의 세훈은 무섭도록 서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종인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자코 돌아섰지만 그럼에도 약간 심사가 꼬이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형.”
“오냐.”
“잘 먹었어요.”
“뭘.”

백현은 피식 웃었다.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매에 종인도 엷게 웃었다. 굳이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종인에게도 백현은 좋은 룸메이트였다. 가끔 까탈스러운 면모를 내비치긴 했지만 그건 단지 타고난 성정일 뿐이었다. 사실 제게 맞춰주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나이를 앞세워 되지도 않는 군기 따위를 잡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는데, 백현은 전혀 그렇지 않아 한 학기동안 편히 지냈다.

“내일 시험이라고?”
“네.”
“오늘 안 들어오고?”
“그럴 것 같아요.”
“시험 잘 치고.”

간결한 대화가 오가는 중에 세훈과 경수가 골목을 돌아 나왔다. 잔뜩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세훈이 종인의 곁에 다가섰다. 

“가자.”

묻고 말고 할 여지조차 주지 않은 세훈이 백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백현은 느긋한 태도로 손을 대강 흔들었다. 세훈을 따라 걷는 종인의 속은 어쩐지 잔뜩 얹힌 것 같았다. 







세훈과 종인의 등은 이미 저만치 멀어졌다. 백현은 카드 명세서를 쭉쭉 찢어 쓰레기통에 털어넣었다. 입에 남은 박하사탕을 깨물었다. 백현은 저와 거리를 두고 선 경수를 쳐다보았다. 경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서 있었다. 작은 어깨는 어딘가 처량했다. 백현은 몇 걸음 걸어가 경수의 앞에 섰다. 그리고 가감없이 놀랐다. 자존심이 제일인줄 알았던 경수는 의외로 울고 있었다. 적잖이 당황한 백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맨날 우냐.”

사실 진짜 우는 건 처음보지만 그 말은 백현의 입에서 걸러지지 못하고 흘러나왔다. 백현의 안에서 경수는 이미 너무 많이 울었다. 경수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백현은 뒷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잘 안 피우는데 어쩐지 사고 싶다 했다. 고깃집에서 챙겨 나온 라이터를 몇 번 흔들고 불을 붙였다. 작게 치익, 하는 소리가 났다.

백현이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동안에도 경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백현이 짧게 타들어간 꽁초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발로 비벼 끄는데 경수가 젖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되는 대로 백현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너 미쳤어?”

가리지 않고 날아오는 주먹에 백현이 짧게 인상을 썼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저 정도겠지. 백현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주먹질을 그냥 견디고 서 있었다. 경수의 주먹은 금세 힘을 잃었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잘 때린다. 아파.”

백현이 피식 웃으며 두들겨 맞은 팔뚝을 매만졌다. 경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젖은 얼굴을 하고 백현을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백현이 손을 뻗어 경수의 눈가를 훔쳐내듯 문질렀다. 가느다란 손끝은 닿는 것만으로도 축축하게 젖었다. 

“답답아. 그만 고백해.”

눈을 꾹 내리 감은 경수가 고개를 저었다. 백현은 경수의 눈가를 마저 닦아냈다. 그새 부어오른 눈가가 붉었다. 백현의 손은 경수의 눈가를 지나 뺨을 스치고 입술을 훑어냈다. 백현은 덤덤하게 말했다.

“깨끗하게 차이고 나한테 와.”







집에 들어오고 나면 뭔가 설명이 오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세훈은 입을 무겁게 닫은 채였다. 그렇다고 제가 먼저 말을 걸거나 치대고 싶지도 않아 종인 역시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세훈은 약간 짜증이 묻어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부채질을 하더니 입고 있던 티셔츠를 거침없이 벗었다. 

“나 먼저 씻을게.”

중얼거리듯 내뱉은 세훈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종인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시험을 하나 남기고 밤을 새기로 했던 터였다. 별 소란도 아니었는데 그 짧은 시간만에 머릿속에 시험 생각이 깨끗하게 지워진 듯 했다. 

얼마간의 물 소리가 쏟아졌다. 더운 김과 함께 문을 열고 나온 세훈은 빨래통에 입었던 티셔츠를 처박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종인은 얼굴만큼이나 하얀 세훈의 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말랐지만 넓은 어깨는 단단했다.

종인은 세훈의 너른 등을 보며 지금 제가 품은 것이 질투라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사촌 형을 상대로.. 스스로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종인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종인은 손등으로 제 얼굴을 짚어보았다. 열이 뜨끈하게 올라있었다. 

“안 씻어?”

세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어디건 나갔다 오면 참을성 없이 먼저 씻겠다고 들어가는 것은 종인이었다. 종인은 벌건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느리게 눈만 깜빡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졸려.”
“벌써?”

세훈의 목소리에서 의문이 지워지지 않았다. 세훈은 대수롭지 않은 양, 냉장고를 열었다. 병째로 물을 마시던 세훈이 젖은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마실래?”

종인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훈은 더 이상 뭔가를 묻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종인과 세훈의 관계는 항상 기다림을 전제로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훈은 곧, 공부하던 탁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핸드폰을 들었다. 이거 하면 잘 깨려나. 종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알람을 맞추는 세훈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종인은 문득 세훈을 미치게 하고 싶어졌다.

“세훈아.”
“응.”

세훈이 쳐다보지 않고 대꾸했다. 무심한 대답이지만 종인은 알고 있었다. 세훈이 제가 내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을. 

“키스해줘.”

낮은 목소리가 울리고 세훈이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빤히 응시하는 단정한 눈. 종인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말고 앉은 채로 다시 한 번 말했다. 키스해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종인은 제가 뱉은 말을 물리고 싶어졌다. 이렇게까지 무거운 침묵이 오갈 줄은 몰랐다. 종인이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쯤, 세훈이 아주 느릿한 동작으로 일어섰다. 다가온다. 천천히 다가와 제 옆쪽에 와 앉았다. 종인은 부러 몸을 움직여 벽에 바짝 붙었다. 그러자 세훈이 몸을 기울였다. 깊고 묵직한 한숨을 섞어 말했다. 너..

“뻔뻔해졌구나.”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세훈의 팔이 종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입술이 맞닿았다. 말랑하고 젖은 혀는 빠르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방금 씻고 나온 세훈의 입안에선 싸한 치약냄새가 났다. 때문인지 감기는 혀가 몹시 산뜻했다. 세훈의 키스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부드럽게 감기고 힘 있게 리드했다. 종인은 그저 입을 벌린 채 세훈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혀를 얽는 내내 세훈의 손은 다정하게 종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맞닿은 입술을 떨어뜨린 세훈은 종인의 감은 눈두덩이와 코 끝에도 짧게 입맞췄다. 그리고는 종인의 젖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종인이 주문처럼 반쯤 뜬 눈으로 세훈을 바라보았다. 시선과 숨소리가 맞닿았다. 세훈은 아랫입술만 꾹 깨문 채로 종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못 견디겠다는 듯 다시금 종인의 입술을 빨아당겼다.







세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창밖의 풍경은 어둠을 넘어 새파란 새벽에 잠겨있었다. 시계를 흘긋 보니 새벽 네 시가 넘어있었다. 종인은 이미 잠들어있었다. 낮은 숨소리가 오갔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것까지도 번거롭다며 바닥에 이불을 펼치고 드러누운 종인이었다. 한참을 자다가 종인이 잠들락 말락 할 때쯤 깨어나 종인의 몸을 타고 넘던 고양이는 함께 발치에 잠들어 있었다. 

더워서인지 이불이 두 다리에 엉겨있었다. 세훈은 일어나 에어컨을 켰다. 그리고는 종인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다리에 감긴 이불을 조심스럽게 끌어다 가슴까지 덮어주자 종인이 약간 인상을 찡그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세훈은 가만히 종인의 머리카락을 결대로 쓸어내렸다. 

처음부터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입학식 때 지각을 해서 제일 뒷줄에 섰던 세훈은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꽃샘추위라며 3월의 한파가 끼쳤던 날, 종인은 머플러에 입술까지 묻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고 제 앞줄에 서 있었다. 느릿느릿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얼굴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고 지금이고 세훈의 눈에는 한결같이 예뻤다.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가 아니냐고 물었던 종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기억은 덤덤히 받아들이기에는 괴로웠다.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고도 몸을 사리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각자 원하는 지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이기적인 생각인지 몰라도 다시 한 번 거절을 직면하는 것은 싫었다.

세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종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세훈의 조그만 목소리가 숨소리처럼 흩어졌다. 

“욕심이 생겨.”

쏟아지는 한숨소리마저 얕았다. 세훈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시선은 온전히 종인을 향해 있었다. 

“한 걸음 가까워졌다고 닿는 게 아닌데.”








16.




준면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리번거린다기보다는 훑는다에 가까운 시선의 움직임이었다. 높은 천장에 모던한 인테리어, 부담스럽지 않게 은은한 조명까지 어느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찬열이 앞장 선 곳은 남자 둘이 오기에는 너무 신경 쓴 듯한 캐주얼 다이닝이었다. 준면은 가게 입구에 설 때까지 설마, 했으나 설마는 때때로 사람을 잡았다. 오늘의 타겟은 준면인 모양이었다. 

“뭐 먹을까요? 뭐 좋아해요?”
“알아서..”

의욕적으로 물어오는 찬열의 목소리에 준면이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메뉴판을 넘기는 손짓은 영 성의가 없었다. 반면 건너편의 찬열은 가사가 불분명한 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찬열이 먼저 연락을 해왔었다. 덕분에 시험 잘 봤다고, 밥이라도 한 끼 먹자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마침 준면 저도 시험이 끝난 터였고 별 약속도 없어서 응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준면은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눈에 들어오지 않는 메뉴만 읽어 내리고 있었다.

“형 가리는 거 있어요?”
“다 잘 먹어.”
“그럼 샐러드랑 파스타랑.. 음. 필라프가 좋아요, 피자가 좋아요?”
“너 먹고 싶은 대로.”

무심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찬열이 고개를 들었다. 준면이 메뉴를 고르는데 흥을 잃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준면 역시 제가 뱉은 말의 무성의함에 뒤늦게 놀라 고개를 들었으므로 공중에서 시선이 얽혔다. 준면이 약간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내가 잘 못 골라. 그래서.”

변명처럼 붙여진 말에도 찬열이 알아들었다는 듯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준면은 서버를 불러 이것저것 주문을 하는 찬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준면은 곱상한 외모와 달리 입맛은 보통 남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다이닝이나 브런치 카페 등과는 당연하게도 거리가 멀었다. 준면으로서는 사실 그냥 감자탕이나 먹는 게 더 좋지만 찬열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데 산통을 깨는 것도 아니긴 했다. 더 필요한 것이 있느냐는 서버의 말을 정중히 물린 찬열은 상황에 제법 익숙해보였다. 하긴. 네이비와 브라운으로 신경 써서 편안하게 만든 이 분위기는 찬열의 외모와도 잘 어울렸다. 식전빵을 찢어 발사믹에 담그는 준면을 향해 찬열이 물었다. 

“방학때 뭐해요?”

목소리가 약간 들떠 있는 듯 했다. 바닥을 치도록 낮은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울렸다. 준면은 입에 넣은 빵을 씹어 넘기며 찬열이 제게 기대하는 바가 있음을 알았다. 조금 잔인한가. 준면은 두 가지의 선택지 중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쪽을 택했다. 

“인턴 들어가. 최 교수님 추천으로.”

준면의 말이 끝나고 몇 초간의 정적이 감돌았다. 사실 준면이 S사 인턴 과정을 거치는 것은 과 내에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준면은 이 쨍한 분위기가 새삼스럽다고 생각했다. 정적을 가르고 준비된 음식이 앞에 세팅되었다. 서버의 능숙하게 움직이는 손 너머로 찬열의 얼굴을 빤히 보던 준면이 기어이 짧게 후,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찬열에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찬열이 먼저 물을 몇 모금쯤 들이키고는 말했다. 

“바쁘겠네요.”
“그렇겠지.”

다물린 입술이 시무룩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그렇다고 여기서 제가 동정하고 말고 할 처지는 아니었다. 준면은 부러 태연한 척 샐러드를 휘저었다.

“넌 뭐할 건데.”
“학원 다니고.. 알바나 좀 하겠죠.”

찬열이 쓰게 웃었다. 내내 의욕적이던 모습과 달리 샐러드나 파스타 따위를 뒤적이는 손짓이 건성이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준면은 할 말을 찾지 못해 포크로 스파게티 면만 몇 번째 휘감고 있었다. 찬열은 시선을 다른 데 두고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가게에 깔리는 음악마저 없었더라면 분위기가 꽤나 살벌했을 것이다. 준면은 이제 막 생각난 것처럼, 내내 상기하고 있었던 말을 뱉었다. 

“내일 종강총횐데.”

덤덤하게 뱉어진 말에 찬열이 눈을 들어 준면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준면이 초조한듯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 

“올래?”
“제가 거길 왜 가요.”

아. 준면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응, 하고 말을 맺었다. 딴에는 많이 생각하고 뱉은 말이었는데 찬열은 그저 가볍게 웃는 투로 응수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찬열은 과 활동에 적극적인 편이 아니었고, 학교 자체에 정을 붙이지도 못한 것 같았으니까. 교만일 수 있지만 그를 묶어둘 수 있는 수단은 저 정도였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학기의 마지막인데다 방학은 제게 여유를 주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봐두면 좋을 텐데. 그래도 없는 명분까지 만들어 내는 것은 이기심 같아 내키지 않은 준면은 고개만 끄덕였다. 







시험이 끝났다. 종강이 늦은 편이라 학교는 물론 대학가도 제법 한산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목이 마르다는 종인의 말에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땀이 삐질 나올 만큼 후덥지근한 바깥과 다르게 냉기가 감도는 실내 온도에 반한 종인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훈은 흘금 뒤를 돌아보고는 주문한 음료를 들고 가 종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물론 오래 앉아있을 생각은 없었다. 땀이나 식히고 가려는 게 전부였지만, 곧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고 말았다. 간지러운 음악이 나오는 좁은 카페에 마주 앉아있기는 생각 이상으로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테이크아웃 해온 음료를 쪽쪽 빨아 마시며 향한 곳은 또 세훈의 방이었다. 

이제 이만큼 편한 곳도 없겠다 싶게 익숙했다. 종인은 신발을 벗자마자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바닥에 배를 깔고 납작하게 엎드렸다. 인기척이 나자, 내내 혼자 있었을 고양이가 창틀에서 파드득 뛰어내렸다. 빠른 움직임으로 종인의 엎드린 몸을 타고 넘었다. 세훈은 종인이 엉망으로 벗어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는 손을 씻었다. 그리고 에어컨을 틀었다. 바람이 도는 소리가 울리고 고양이의 사료나 물의 잔여량까지 가늠하고서야 세훈은 앉을 수 있었다. 엎드린 채 핸드폰 게임을 하는 종인의 등을 짚으며 세훈이 물었다. 

“기숙사 방 언제 빼?”
“금요일.”
“모레?”
“오늘 수요일이야?”

종인이 외려 놀랍다는 듯 굴자 세훈이 벽에 걸린 달력과 제 핸드폰 액정을 한 번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 그러네.”

종인도 고개를 틀어 달력을 흘긋 보고는 다시금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찰나에 판가름이 난 건지 종인은 으씨, 죽었다.. 하고 중얼거리며 하던 게임 화면을 종료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고는 머리칼을 털었다. 남은 음료는 얼음이 녹아 탁한 색을 띄고 있었다. 종인은 그것을 마저 쪽쪽 빨았다. 그리고는 뚜껑을 열고 작아진 얼음까지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세훈은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세훈이 습관처럼 손가락을 뚝뚝 꺾으며 물었다. 

“그때 그, 룸메이트 형 있잖아.”
“어.”
“어때?”

지나치게 함축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종인은 그 뒤에 숨은 의미를 곧장 간파했다. 그리고는 눈이 커다랗고 몸집이 작았던 세훈의 사촌형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난 밤의 고기집에서 백현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태평했고 경수는 안절부절 했으며 세훈은 어쩐지 화가 나 보였다. 종인은 아직 그 밤의 이야기를 잘 몰랐다. 저만 라인 밖으로 밀려난 기분이 들어 약간 골이 난 종인이 툭 내뱉었다. 

“백현이 형?”
“응.”
“성격도 좋고 잘 챙겨주고.. 되게 착해.”

사실 그 정도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으나 종인은 제 말을 되물릴 생각이 없었다. 오버를 좀 더 해서 백현을 변호하고 났더니 세훈이 보인 반응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다. 약간 김이 새는 기분이 든 종인은 다시 핸드폰을 찾았다. 몸을 일으킬 때 손이나 발에 치이기라도 한 건지 핸드폰이 저 쪽까지 밀려가 있었다.

“저거 좀 집어줘.”
“핸드폰?”
“응.”

세훈이 제 옆쪽까지 밀려온 종인의 핸드폰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약간 머뭇거리는 손짓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멀지도 않은 거리였지만 종인은 잠자코 기다렸다. 약간 이상한 감이 있다 싶었는데, 세훈은 집어든 핸드폰을 건네는 게 아니라 종인의 옆에 내려놓았다. 

종인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내리깔린 눈은 제 옆에 놓인 핸드폰을 향해있었다. 세훈이 보인 반응에 뭉근하게 화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일었다. 저와의 교류가 입술을 부비는 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종인은 화가 앞서는 지, 서운함이 앞서는 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세훈과 제가 일직선상에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딴에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는데 세훈에게는 그저 스킨쉽의 일환이었다 생각하니 억울하기까지 했다. 이 관계에서 보다 벽이 높고 방어적인 것은 세훈이었다. 

뭉근히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른 종인이 불퉁하게 물었다.

“기분 나빠?”
“뭐가?”

세훈의 눈썹이 위로 약간 꿈틀거렸다. 무슨 소리냐는 듯 물어오는 말에 종인이 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이제 나 안 좋아해?”

침잠한 목소리가 빚어낸 단순하리만치 직설적인 말에 세훈이 입을 꾹 다물고 종인을 바라보았다. 종인의 말은 많은 단계를 생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숨겨진 함의를 읽어낸 시선이었다. 종인 역시 그런 세훈의 곧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이고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종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프도록 물어댄 입술에 피가 몰릴 때쯤이었다. 세훈이 축축한 시선으로 종인을 응시한 채로 말했다. 

“좋아해.”
“그런데 왜.”
“……넌 아니잖아.”

한 박자 느리게 나온 말에 종인이 눈썹을 구겼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종인의 입술은 쉬이 움직이질 못했다. 말이 쉽사리 나오질 않았다. 세훈이 가진 마음의 무게를 제가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비단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깊이나 무게에 대한 책임이 따랐다. 종인의 침묵이 이어지자 세훈은 이 상황이 정말 견디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종인은 천천히 생각한 말을 토해냈다.

“그만하고 싶어?”

책임을 돌리는 말이었다. 전과 달리 잘게 떨리는, 확신 없는 목소리에 세훈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종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포갠 다리 위에 손을 놓고 손가락을 뚝뚝 꺾었다. 세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히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은 속을 누르며, 종인이 중얼거렸다. 

“바보네..”

우리 둘 다. 종인의 남은 말은 목 안으로 삼켜졌다. 세훈의 다물린 입술 안으로도 말이 꾸역꾸역 넘어갔다.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해놓고, 이런 걸로 힘들어하는 내가 제일 싫어.







다 쓴 레포트 검수를 한 번 마친 백현이 기지개를 쭉 폈다. 하드는 물론, USB에도 파일을 옮겨두었다. 오래 앉아있었더니 어깨며 허리가 굳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이미 짐도 거의 싸서 택배로 부쳤고, 내일 아침 이불 정도만 마저 싸서 부치면 정리도 끝이었다. 핸드폰 달력으로 지난 날과 남은 날을 가늠하던 백현이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빠르게 손을 놀렸다. 단조로운 신호대기음이 울렸다. 꼭 세 번 만에 연결되었다. 백현은 인사말을 간단히 생략했다. 

“레포트 냈냐?”

경수는 인사 대신 뱉어진 말에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 찰나의 정적을 깨고 경수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냈지.”

수화기 너머로 걸러지는 목소리가 새삼스럽게도 낮고 편안하고.. 귀로 듣는 것과는 다른 울림으로 전해졌다. 백현은 귀와 어깨로 핸드폰을 지탱하고는 빈 손으로 USB 장치 제거를 하며 말했다. 

“마감 오늘 자정까지 맞지?”
“응.”

딱 묻는 말에 대한 대답만이 이어졌다. 백현은 짧게 딱, 하고 혀를 찼다. 사실 용건 없이 걸어본 전화였기에 다음 말 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백현은 아무 펜이나 주워들고 책상에 펼쳐진 이면지에 낙서를 시작했다. 도경수 이름 석 자만 꼬박 다섯 번을 쓰고 나서야 다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진짜 종강이네. 방학때 뭐 할 거냐.”

백현의 질문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할 법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수는 대답 대신 수화기 너머로도 전해질 만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그만할래?”

목소리는 여전히 편안했지만 내용물은 그리 편치 않았다. 백현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수는 하고 싶은 말을 계속 할 참이었다. 

“나도 이런 거.. 안 해본 사람 아니라서.”
“…….”
“너한테 나 겹쳐보고 이런 거, 별로 좋은 거 아니잖아. 그치.”

마지막 말은 어르고 달래는 말처럼 들렸다. 백현은 잔뜩 뭉뚱그려 형체를 으깬 말로도 경수가 전하려는 뜻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캐치했다. 그러니까 도경수는.. 짝사랑의 꼬리물기 정도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백현이 눈을 내리깔고 입술 끝을 당겼다. 감정의 시초를 읽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싹부터 자르려 드는 것. 두려움의 표출이었다. 백현은 상황에의 이해가 빨랐고, 그것은 관계성에서도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아직이다. 낙서에 금세 질린 백현이 잔뜩 그려 넣은 원 위로 펜을 놓으며 말했다. 

“아직 안 내키나봐?”
“나 너 그런 식으로 본 적 없어.”
“잘 됐네.”

경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못 말릴 쇠고집이다. 백현은 생각했다. 경수의 마음을 모르지 않아서 더 갑갑하고 안쓰러웠다. 그러니까, 일방적인 마음을 알면서 받아주지는 않는 그런 거. 못 참는 거겠지. 제가 뒤를 참지 못해 벌이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기도 하고. 경수가 초조하게 손가락을 말아 쥐고 있다는 것을, 백현은 모르지만 알 것 같았다. 정적에도 제 여유를 끌어당긴 백현이 천천히 말했다.

“나도 아직 너랑 키스하고 싶진 않으니까.”

대꾸할 틈 없이 백현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언제 너한테 나 책임져달라고 했냐.”
“…….”
“나 그냥, 너 방학 때 뭐 할 거냐고 물어봤잖아.”

한참이나 말이 오가지 않았다. 백현은 기다렸고 경수는 입을 다물었다. 무안함이나 창피함 따위가 밀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앞서가지도 말고.. 너무 뒤처지지도 말라니까. 백현은 경수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학습이 아닌 습관의 영역.

경수는 띄엄띄엄하게 말했다. 

“공부 해야지.” 
“무슨 공부.” 

다시금 긴 침묵이 이어지나 싶었더니 의외로 대답은 빠르게 흘러나왔다.

“영어도 하고 이것저것.”
“혼자 하게?”
“학원 다니려고.”
“알아본 데는 있고?” 

심문하듯 이어지는 백현의 질문은 어쩌면 면접 같기도 했다. 경수는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직전의 상황처럼 괜한 날을 세우고 싶지는 않아 차분히 대답했다. 평정은 의외로 금세 찾아들었다.

“YBM 다닐 것 같은데.”
“어디? 강남?”
“어. 아마도.” 

어엉.. 백현이 느리게 말을 끌면서 다시금 펜을 잡았다. YBM 강남을 알아보기도 힘든 필체로 마구 날려 썼다. 경수는 흔히들 하는 너는, 하는 반문조차 쉬이 하지 못했다. 그게 참 답답하면서도 도경수다웠다. 백현은 피식 웃으며 환기하듯 말했다.

“아, 그리고 레포트 보내는 메일 주소 말인데.”
“응.”
“njungha1024 맞냐? 네이버.”
“네이버 말고 한메일.”
“아. 그래.”

어차피 다 알고 있는 거였다. 부러 틀리게 물은 것도 도경수는 모를 테지. 백현이 정리하듯 경수의 이름을 불렀다. 

“도경수.”

기류로 안 건지, 경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바라고 부른 이름이 아니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백현은 제 말이 심각하지 않게 들리게끔 신경쓴 어조로 차분히 말했다.

“주면 그냥 감사히 받아.”
“…….”
“그게 싫으면 모른 척 하고. 끊는다.”







준면은 술집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저를 향한 인사를 대강대강 받으며 한 사람의 얼굴을 찾았다. 한 사람, 한 사람 꼼꼼히 훑었지만 역시나 였다. 찬열이 괜한 말을 할 사람이 아니긴 했지만 역시 없으니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그래도 준면은 이는 감정의 파도를 빠르게 치워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보다 쉬웠다. 준면은 각 테이블을 돌며 후배들의 술을 받고 적당히 어울려주며 다수를 다독였다. 수고했다는 말만 족히 스무 번은 했을 것이다. 사실 수고는 제가 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이것이 제 역할이었다. 

제 동기들이 앉은 술집 제일 안쪽의 룸형 테이블에 앉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했다. 준면은 뜨겁게 달은 얼굴을 손등으로 짚으며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위로 빈 술병과 술잔, 거의 바닥을 보인 안주, 사용한 종이냅킨 따위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준면이 투명한 액체가 그득 담긴 컵을 하나 찾아 입술을 축였다가 이내 인상을 썼다. 물인 줄 알았더니 소주였다. 까슬한 혀로 입술을 축이는데 누군가 물어왔다. 

“최 교수 소개라며?”
“어.”

준면은 대충 대답했다.

“거기 무슨, 최 교수 마누라가 이사급이라고 하지 않았냐.”
“마누라가 아니라 아버지 아니냐?”
“장인 아니고?”
“야. 최 교수가 몇 살인데. 최교수 아버지면 이미 꼬부라졌지.”
“그런가. 야, 한 바퀴 돌리자.”

몇 마디의 허담과 함께 분위기는 준면이 주도하지 않아도 알아서 흘렀다. 짬이 차면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화제를 물었다. 준면은 돌아오는 차례를 거절하지 않고 테이블의 빈 잔을 하나 찾아 들었다. 곧 소주가 콸콸 채워지고 단숨에 넘겨졌다. 입 안으로 달짝한 맛이 돌고 목 안으로는 타는 듯 갈증이 일었다. 

“그럼 다음 학기는 안 나오냐?”
“그렇겠지.”
“이게 거의 끝이네.”
“아쉽냐?”
“새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능청스러운 말이 조금 더 오갔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준면의 동기였다. 마지막 학기에 대한 다소 감상적인 모임이었다. 부러 준면의 얼굴을 챙겨보려 온 이들도 있었다. 자리의 대부분이 교수의 추천으로 쉽게 대기업 인턴 자리를 꿰어 찬 준면을 부러워했다. 교수와의 친밀한 교류는 거의 거래로 비춰지기 쉬웠다. 그런 거래를 꺼리지 않는 대부분은 욕과 추문을 달기 마련이었음에도 준면은 예외였다. 워낙 단정하게만 살았고 대로를 밟아서인지 다들 결과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지나치게 꼿꼿하면 쉽게 부러졌지만 준면은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친절했고, 그것으로 유연함을 대체할 수 있었다. 

“준면 선배.”

대부분이 동기였으나 소수의 후배나 선배가 섞여 있었는데, 지금 준면을 부른 2학년짜리 후배가 그랬다. 발갛게 술이 오른 얼굴을 한 후배가 준면의 옆자리에 힘 빠진 모양새로 털썩 앉았다. 이름을 부르는데도 알콜 냄새를 짙게 달고 온 것을 보면 어려운 학번의 선배들 사이에서 술을 제법 받은 모양이었다. 준면은 옅게 웃으며 짐짓 반가운 체를 했다. 그러자 후배가 기분 좋은 얼굴로 물어왔다. 

“박찬열 선배는 안 오셨어요?”
“응?”

준면은 웃는 얼굴로 눈썹을 휘어뜨렸다. 대뜸 그 이름이 왜 나오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올 이유가 없다고 일갈했던 찬열을 머릿속에서 지워낸 준면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왜?”
“아. 선배도 잘 모르세요? 친하신 줄 알았는데.”

혀가 잘 굴러가지 않는지 흐린 발음의 말이 떨어졌다. 정곡을 찔러오는 말에 준면이 어렵게 웃었다.

“뭐, 대충..”
“선배.”
“응.”
“저.. 진짜 그 선배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러는데 다리 좀 놔주시면 안돼요?”

여 후배의 당찬 발언에 말이 닿는 범위의 사람들은 다들 우워어어, 하는 소란함을 빚어냈다. 듣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섞여들어 뭐래,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준면의 귀에까지 닿았다. 여자로서 쉽지 않은 저돌적인 물밑 작업이었다. 술에 취했기 때문에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알콜이 주는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대학 생활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준면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직접 말해보지.”

그리고는 누군가 가져다놓은 얼음이 띄워진 물잔을 건넸다. 여 후배는 취한 와중에도 조그맣게 감사합니다.. 하며 말을 늘이더니 잔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잔 표면에 잔뜩 어려 있던 물기가 발그레한 뺨으로 옮겨갔다. 

“솔직히 저, 진짜 그러고 싶은데 제가 번호를 몰라요.” 

우는 소리처럼 뱉어진 목소리에 굵직한 목소리들이 다시 한 번 아우성이었다. 그리고는 저마다 한 마디씩 쏟아내기 시작했다. 

“야, 박찬열이랑 친한 거 너밖에 없잖아.”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소개 좀 시켜줘라.”

잘 됐으면 좋겠다! 잘 됐으면 좋겠다! 구식 리듬까지 붙여가며 연창이 이어졌다.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틈에서 준면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머리로만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화를 걸어 너랑 잘해보고 싶은 후배가 있다, 고 말을 전할 수 있었다. 혹은 찬열을 이 자리로 불러내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준면은 다른 쪽으로 잠기고 있었다. 과정보다 주체가 중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은 찬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잔인하지 않은가. 

가만히 생각하던 준면은 이내 피식 웃었다. 배려랍시고 이런 저런 가정 속에 찬열을 놓는 것은 기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방향이 분명한 애정을 받아내고만 있는 자신의 상황이 교만하고도 우습게 여겨졌다.

준면은 일단 눈앞에 놓인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미안. 그 정도로 친하진 않아서.”

아, 정말요? 에이.. 아쉬운 소리가 이어졌지만 의외로 쉽게 화제는 건너갔다. 자리에 없는 타인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준면은 머릿속은 닫고 귀만 열어둔 채로 다시금 생각에 잠겨야 했다. 방금 제 입으로 뱉어낸 말을 찬열이 듣는다면, 어느 쪽에 무게를 두어 받아들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찬열을 생각해서 거절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까, 친하지 않다고 뱉어진 거절의 말이 중요할까. 술에 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17.




기숙사 문을 밀어젖히는 종인의 기분은 약간 찝찝했다. 세훈에게 끝까지 확신어린 대답을 뱉을 수 없었던 제 마음의 잔여물 때문이었다. 저도 온전히 읽어낼 수 없는 감정은 이제는 규정에 달린 것 같았다. 두 가지 선택지만 놓고 본다면 종인은 당연히 세훈을 좋아한다고 단정했겠지만 아직은 제게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세훈이 불분명한 시간을 감내하는 동안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종인은 막연히 생각했다. 확언할 수 있지만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방문을 열자 안에는 백현이 있었다. 학기 내내 두 사람이 썼던 방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종인은 새삼스럽게도 놀랐다. 가방에 뭔가를 쑤셔 넣고 있던 백현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왔냐.”
“네.”
“얼굴도 못 보고 가는 줄 알았네.”

그제야 고개를 돌린 백현이 피식 웃었다. 종인은 그제야 백현이 쓰던 자리에 눈을 둘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이불 따위가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 책장도 비어있고, 책상도 몇 가지 가벼운 물건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방금 한 말도 그렇고, 퇴실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종인은 메고 있던 가방을 침대로 던지듯 내려 놓으며 물었다.

“도와줄 거 없어요?”
“뭘. 너 나갈 때 바닥이나 한 번 쓸고 가라.”

영 심드렁한 말투의 백현은 이제 책상에 널려있던 물건을 하나하나 가방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노트북을 챙겼다. 백팩 하나에 노트북 가방이 단단한 모양새로 꾸려졌다. 백현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먼 편은 아닌데 길에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 기숙사 생활을 한다고 했었다. 종인은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의 백현을 떠올렸다. 가볍게 인상을 찡그리며 성적도 좋으니까, 뭐.. 하고 중얼거렸던 백현은 제 자랑을 해도 그리 재수없어 보이지 않았다. 

“이제 가요?”
“가야지.”

백현이 싱겁다는 듯 웃을락 말락 한 얼굴을 했다. 빵빵한 백팩을 어깨에 멘 백현이 침대에 멀뚱히 앉은 종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형 간다.”

그 말이 어쩐지 뭉클하게 느껴진 종인이 고개를 들어 백현을 올려보았다. 백현이 종인을 내려 보며 씩 웃었다. 형이지만 저보다 키가 꽤 작은 백현이 저를 내려 보는 것은 약간 낯설었다. 사실 나란히 서서 시선을 마주 할 만큼 간지럽지도 못했다. 백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종인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한참 어린 동생에게나 할 법한 손짓이었다. 종인은 어쩐지 애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얌전히 백현을 올려보았다. 

“다음 학기 때 보면 꼭 인사하고.”
“네.”
“방학 잘 보내라.”
“형도요.”

백현은 휘휘 손을 휘젓고는 방문을 닫았다. 

정적이 감돌았다. 백현이 틀어놓고 간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종인의 숨소리가 느리게 엉켰다. 혼자 빈방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금세 치워진 백현의 자리는 휑했다. 종인은 기숙사에 처음 들어오던 날을 떠올렸다. 

연두색 시트가 깔린 침대와 텅 빈 책상과 옷장. 정직한 대칭형의 방은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대부분 2학년 이상의 재학생과 신입생이 한 방을 쓰게 된다는 말을 떠올리며 종인은 바깥쪽 침대와 책상을 골랐다. 나름의 배려였다. 뭘 몰라 그저 간단하게 챙겨온 짐을 느릿느릿 풀고 있는데 현관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백현이 들어왔었다. 인사보다 먼저 캐리어를 방에 들여다 놓고 커다란 짐 박스 두 개를 방에 옮겨다 놓았다. 어쩔 줄 모르고 선 종인에게 불쑥 손을 내밀면서 1학년? 하고 물었던 백현의 까슬한 목소리는 어제처럼 잘도 떠올랐다. 

종인은 다시 한 번 방을 둘러보았다. 정확히는 백현의 자리에 한정한 시선이었다. 다시 처음의 모양새였다. 제 자리는 그득하게 메워져있는데 바로 옆의 자리는 누가 살다 간 흔적도 없었다. 기분이 몹시 오묘했다. 자꾸 감상적인 잡념이 밀려드는 것 같아 종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쌓여있는 제 짐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전, 백현을 통해 주문해서 받은 6호짜리 박스에 옷가지를 하나하나 넣었다. 처음에는 차곡차곡 개어서 쌓았는데 나중에는 그 마저도 귀찮아져 여러 벌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접어 넣었다. 

옷이나 책, 수건 따위의 자질구레한 물건을 모조리 쓸어 넣고 나자 박스가 무겁게 들어찼다. 송장까지 붙여 포장한 짐을 기숙사 로비에 가져다놓고 나자 깜깜한 밤이 되어있었다. 뭘 할 기력도 없이 지쳐버린 종인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이미 더위는 시작됐는데, 이제야 진짜 여름이구나.. 하고.







단 잠을 유영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현실로 끌어올려졌다. 베개 아래에서 센 진동이 울려댔기 때문이었다. 종인은 소리보다 기척에 약했다. 덕분에 저를 깨운 사람의 이름도 확인하지 못하고 감은 눈으로 전화를 받았다. 꽉 잠긴 목으로 한 마디 말도 뱉어내지 못했는데 저 쪽에서 먼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목소리는 준면이었다. 

“지금 출발할 거야. 짐 많아?”

인사 같은 건 가볍게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온다. 인사말로 확인할 필요도 없는 사이니 당연했다. 종인은 납작하게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마구 파묻었다. 차마 이제 일어났다는 말을 못 하겠어서 숨만 삼키다가 느릿느릿 눈을 떴다. 준면은 종용 없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인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아니. 별로..”
“목소리가 왜 그래? 잤어?”
“어.”

솔직한 대답이었지만 그것이 방금 막 일어났다는 신호라는 것까지는 모르는 준면이 태연하게 한 시간 내로 도착할 거라는 말을 전했다. 전화는 맥없이 끊겼다. 종인은 전화를 끊자마자 몸을 일으켜 앉아 머리를 부볐다. 까치집이 생긴 뒷머리를 대충 누르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졸음이 잔뜩 묻은 눈으로 이불부터 개었다.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어제 채우다 만 박스에 이불을 챙겨 넣었다. 세수에 양치만 대충 끝내고 와서 남은 짐을 쌌다. 잠결이라 꼼꼼하지는 못 한 손길이었으나 어차피 차로 가져갈 거니까 별로 상관은 없을 터였다.  

간단한 청소까지 마치고 나자 때 마침 핸드폰 알림음이 짧게 울렸다. 한 시간에서 조금 모자란 시간이 흘러있었다. 당연하게도 또 준면이었다. 1층 로비에 와 있다는 간결한 메시지였다. 뒷말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종인은 까치집이 된 뒷머리칼을 누르다가 결국 모자를 눌러 썼다. 로비에 있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준면은 저를 발견하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진짜 잤나보네. 준면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웃으며 종인의 등을 툭툭 쳤다.

“이게 다야?”
“어. 큰 건 다 택배로 부쳤어.”
“수고했네. 뭐 빠트린 거 없지?”
“어.”

방을 한 번 쓱 둘러본 준면이 이불이 든 박스를 들었다.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희고 가는 팔은 생각보다 쉽게 묵직한 짐을 들어올렸다. 그래도 어딘가 내키지 않은 종인이 준면을 말렸다.

“됐어. 내가 들게.”
“뭘. 넌 저거나 들고 내려와.”

준면이 힐끔 눈짓을 한 곳에는 종인이 싸놓은 노트북 가방과 크로스백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제 할 말을 마친 준면은 곧장 앞장 서 걸었다. 박스 크기가 너무 커서 제 형의 작은 몸에는 약간 버거워보였지만 종인은 긴 말을 붙이지 않았다. 

짐을 싣고 카드키까지 반납하고 조수석에 오르자 준면이 곧장 안전벨트, 하고 일러주었다. 아, 하고 벨트를 채우자 준면이 피식 웃었다. 종인은 때때로 당연한 사실을 잊곤 했다. 에어컨을 미리 틀어놓아 차 안은 시원했다. 종인은 껌 통을 털어 입 안에 몇 개를 한꺼번에 던져 넣었다. 우물우물 껌을 씹고 있으니 준면이 편안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시험은 잘 봤어?”
“그냥 그래.”
“수고했어.”
“수고는 무슨.”
“엄마가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물어보던데. 문자 넣어놔.”

준면의 말에 종인은 느리게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부모님께 전화를 하는 것은 귀찮기도 했고 간지럽기도 해서 잘 하지 않았지만, 문자는 생각날 때마다 보내곤 했다. 답지 않게 이모티콘 따위를 꾹꾹 찍어 누르고 있으면 말로는 못 하는 애교라도 떠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운전하는 내내 준면은 종인에게 가벼운 화두를 던졌다. 주로 학교에 관한 것이었다. 운전할 때 주변이 소란한 것을 싫어하는 준면이지만 종인과의 대화는 낮고 편안했다. 저도 한 번도 집을 나가 산 적이 없는데 한참 어린 동생이 그랬다는 것은 어딘가 묘한 기분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종인을 보며 이제야 안정감을 느끼는 준면이었다. 종인은 핸드폰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불쑥 생각난 듯 물었다. 

“그 형은 잘 있어?” 
“누구?”
“그.. 찬열이 형.”

종인은 핸드폰 게임이라도 하는 지 액정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준면은 종인이 꺼낸 가벼운 말에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두 사람의 정적을 틀어놓은 라디오 소음이 갈랐다. 준면은 굳은 입술을 풀고 천천히 말했다. 

“응. 그런 것 같더라.”

불분명한 말에도 종인은 크게 토를 달지 않았다. 딱히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종인은 졸린 지 크게 하품했다. 나 좀 잘게. 그리고는 시트를 뒤로 젖히고 누웠다. 준면은 틀어둔 라디오 볼륨을 낮추다가 이내 꺼버렸다.

운전하면서 좀체 다른 생각을 하지 못 하는 준면이었지만 자꾸 찬열이 떠올랐다. 요즘 들어 부쩍 제게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다들 준면에게서 찬열을 찾았다. 이유는 알 것도 같았으나 딱히.. 각별난 사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제게서 엿보여지는 그림자 중 일부가 찬열이라고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묘하게 울렸다. 

제가 가진 자질 중 하나는 감정에 관계없이 만인에게 공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준면은 항상 이성을 앞세웠다.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것이 중했다. 어릴 적부터 그래왔고, 그것이 누구나에게 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딱 찬열에 한해서만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없다니. 준면은 제게 당연한 듯 쌓여오던 일련의 감정이 사실은 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경수는 모든 일에 있어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에 안정을 느꼈다. 평일 낮 시간에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강남역에서 인파를 따라 걷다보니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데스크에 서서 등록하러 왔다고 말하자 매니저로 보이는 여자가 보는 것만으로도 더운 블랙 정장 차림을 하고서 더우시죠, 하고 살갑게 물어왔다. 대충 웃어 보인 경수에게 이거 작성 한 번 해주시구요, 하고 한 통의 서류가 내밀어졌다. 계좌라도 만드는 것처럼 형광펜이 그어진 항목에 성실하게 답을 채워 넣고 있을 때였다.

“시험도 봐요?”

어딘가 가볍게 던져지는 어투는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경수는 마지막 항목을 채워 넣으며 들리는 목소리에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데스크의 다른 직원과 사담 같은 대화를 몇 마디 하는 얼굴을 흘끔 올려보았을 때, 경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경수의 커진 눈에 화답이라도 하듯 상대 역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하이.” 

저를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는 것은 백현이었다. 백현은 데스크에 팔을 기대고 허리를 숙인 다소 껄렁한 자세로 손짓했다.

“얘랑 같은 시간대로 등록할게요.”
“같이 등록하시게요? 친구분이세요?” 

상냥한 물음에 백현이 경수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어떻게 수강증을 끊었는지 과정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카드를 내밀고 서명한 기억조차 없었는데 손에는 영수증이 꾸깃하게 접힌 채 들려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백현이 곧장 따라 탔다. 문이 오롯이 닫히자마자 경수가 백현을 향해 물었다.

“너 여기 어떻게 왔어.”

약간은 뾰족하게 뱉어진 말에 백현이 턱을 당기고 눈을 올려 뜬 얼굴로 풉, 하고 웃었다. 소리 죽인 웃음에 경수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고집스럽게 닫힌 입술을 바라보던 백현이 대단히 재밌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말했다. 

“너네 집에 찾아온 것도 아닌데 되게 놀란다, 너.”
“…….”
“나도 공부 좀 하려고.”

공부, 에 힘을 실어 말하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태연자약해 경수는 조금 더 깊게 인상을 썼다. 백현은 어쩐지 오고 싶더라니, 하는 말을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제 감도 아직은 쓸 만 하다고 생각하며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시원하게 내리꽂히는 음악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경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어 나가버렸다. 백현이 입꼬리를 당기며 픽 웃었다. 저럴 줄 알았다니까. 







가족이 다 같이 모인 밥상은 어쩐지 오랜만이었다. 종인은 이 분위기가 몇 개월 만에 낯설어졌음을 느끼며 숟가락을 놀렸다. 김치찌개라고 문자까지 넣었으나 저녁상에 오른 것은 해물탕이었다. 그래도 집밥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종인은 충분히 담아준 밥을 비워내고 있었다. 나가 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이 집밥이었다. 그런 속을 아는 건지, 맞은편에 앉은 종인의 어머니는 몇 개월이나마 나가 살다온 아들이 못내 안쓰러워 게살을 발라내 종인의 밥에 얹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출근은 언제부터라고?”
“7월 첫째 주요.”

종인은 준면의 깔끔한 대답에서야 대화의 흐름을 읽었다. 차에서 얼핏 들었던 인턴쉽 얘기 중인 모양이었다. 되지도 않는 젓가락질로 게를 들쑤시고 있으니 어머니가 다시금 발라낸 게살을 종인의 밥그릇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종인이 푹푹 들쑤신 게를 본인 그릇으로 옮겨갔다. 식사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것은 종인 하나인듯 했다. 아버지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약간은 못마땅한 어조로 물었다.

“잘 할 수 있겠냐?”

그 말에 준면은 그냥 푹 웃기만 했다. 종인은 숟가락을 쭉 빨며 옆에 앉은 준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냄비 안으로 시선을 틀었다. 어머니가 국자를 들어 아버지와 준면, 종인의 국그릇에 차례로 게나 조개 등을 퍼올려 담았다. 그리고는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아버지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화제를 돌렸다. 

“못 할 건 또 뭐예요. 국 식어요.”

크흠, 하는 헛기침과 숟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준면은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국물만 떠먹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조금 의외이긴 했다. 종인이 떠올린 것은 아버지가 품은 의구심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종인 역시도 준면이 졸업을 하면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엔지니어링 관련 회사는 어딘가 준면과 안 어울리긴 하지만, 왜 인지 모르게 어릴 때부터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면 준면은 항상 자기 일은 알아서 했고, 알게 모르게 고집도 센 편이었다. 제 의견을 관철하는 것도 분명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 뒤에 내린 결정이니까 가능한 것일 테다. 거기까지 생각하며 종인은 남은 밥을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방에 들어가 가져온 짐이라도 정리할 참이었는데 곧장 불려나갔다. 깎아놓은 과일을 가리키는 손짓에 종인은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몇 주씩 거르긴 했지만 집에 안 온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아주 온 기분과는 확연히 달랐다. 종인은 소파에 풀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버지와 준면은 심각한 얼굴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종인은 영 흥미가 없어 깎아놓은 키위를 집어 먹었다. 몇 번 우물거릴 틈도 없이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입 안에 따가울 정도로 신 맛이 돌았다. 으.. 인상을 쓰고 있는데 준면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은 닫지 않았지만 준면은 이미 안으로 쏙 들어간 채다. 종인은 고개를 돌려 저 쪽의 방을 물끄러미 보다가 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먹고 들어가.”

어머니가 종인을 잡았다. 종인은 전처럼 인상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너무 셔.”

그리고는 타박이 꽂히기 전에 준면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들어서자 준면이 어쩐 일이냐는 듯 눈썹을 한 번 들어 올리며 웃었다. 종인은 슬라이딩하듯 준면의 침대에 길게 엎드렸다. 베개를 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침대에서는 준면의 냄새가 났다. 향수 같기도 하고 샴푸 같기도 한 산뜻한 냄새. 종인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준면은 등을 보이고 단정하게 앉아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지잉, 하는 팬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종인은 준면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형.”
“응.”
“이제 안 힘들어?”

조금은 뜬금없는 말에 준면이 의자를 약간 틀어 몸을 돌렸다. 종인이 누운 침대 가장자리에 와서 앉은 준면이 무슨 소리냐는 듯 종인을 내려보았다. 종인은 눈만 들어 준면을 올려보며 느릿느릿 설명을 덧붙였다.

“맨날 학교에 살고 술 먹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종인은 뭔가 더 말해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제 말이 어리광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민망해져 끌어안은 베개에 얼굴을 반씩이나 파묻어버리자 준면이 귀엽다는 듯 종인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손길이 부드러웠다.

“그런 거 갖고 힘들면 안 되는 거지.”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뱉어내는 대답에 종인이 으응, 하고 웅얼거렸다. 준면은 키만 해도 저보다 작았고, 곱상하니 어려 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형이냐는 질문이 종인에게 돌려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만 해도 정말 그래보이나 싶었는데. 새삼 형은 형이구나, 느끼는 종인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오래 방을 비웠다. 간간히 들러도 주말 정도나 보낸 게 전부였다. 내내 어머니의 손을 탔기로 먼지 없이 깨끗한 방은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아주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괜히 책장 앞에 서서 고등학교 때 쓰던 책을 꺼내서 넘겨보기도 하고, 많이 읽었던 책도 한 번 넘겨보았다. 과거를 기억하는 매끈한 종잇장이 감기는 느낌이 조금은 생경했다. 종인의 성격이나 저를 감싼 습관 등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같은 자리에 남아있었으므로 제게서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세훈이었다. 

종인은 펼쳤던 책을 다시금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해야 할 일을 찾아내고 가져다놓기만 한 짐을 천천히 풀었다. 박스를 꽉 채웠던 침구는 이미 어머니가 꺼내간 뒤였다. 남은 짐은 기껏해야 모자나 몇 권의 책, 세면도구 정도였다. 제 자리를 찾아 물건을 정리하고 노트북까지 꺼내 연결해두고 나자 금세 할 일도 없어졌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운 시선에 엉겨서 그런가. 십수년간 제 방이었던 이 곳은 어쩐지 남의 방 같기도 했다. 최근의 몇 개월에 있어 종인의 방은 지금의 자리나 작은 기숙사 방보다 세훈의 방에 가까웠다. 창이 꽤나 크고 해가 잘 드는 복층 룸을 떠올렸다. 털이 하얀 고양이가 창가로 뛰어오르곤 하는 조용한 방. 지금쯤 세훈은 뭘 하고 있을까. 종인은 핑핑 돌던 의자를 발끝으로 멈춰 세우고는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신호대기음이 몇 번쯤 울렸다. 종인의 혀끝이 긴장하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았던 풍경을 머리가 기억하고 있었다. 확신을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종인은 그래도 가슴보다 말을 앞세우지 못한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만 약간의 두려움이 수반되었을 뿐이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세훈의 목소리는 들뜨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그대로였다. 종인은 괜히 주먹을 말았다 폈다 하며 말했다.

“나야.”
“어.”

세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종인은 눈을 길게 내리감고 세훈의 방을 그려보았다. 세훈은 빛이 들이치건, 어둠이 장악하건 블라인드를 잘 내리지 않았다. 커다란 창으로 까만 밤이 드리웠을 것이다. 나른하게 늘어져 앉은 세훈과 포갠 다리 위로 몸을 눕혔을 우유를 떠올리며 종인이 옅게 웃었다. 

“뭐해?”
“씻었어.”
“응.”
“너는?”
“밥 먹고 형이랑 좀 놀다가 방 들어 왔어. 밥 먹었어?”

잠깐만, 하고 세훈이 말을 끊었다. 뭔가 넘어지는 소리로 추측되는 잡음이 섞였다. 곧 세훈이 다시 전화를 받으며 가볍게 투덜거렸다. 우유가 물통 엎었어. 드물게 애처럼 뱉어진 말에 종인이 소리 낮춰 웃었다. 세훈이 낮은 숨소리와 함께 물어왔다.

“집에 가니까 좋겠네.”
“내 방 아닌 거 같아.”
“뭔 지 알 것 같다, 그런 거.”

목소리는 드문드문하게 이어졌다. 세훈이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는 말했다.

“학교에서 토익반 신청 받더라. 방학 때 하는 거.”
“아, 응. 하게?”
“어차피 집에 갈 것도 아니고 해서. 같이 할래?”
“그럴까. 언제부터?”
“다음주부터 8월 초까지 하던가.”
“응. 그러지, 뭐.”

종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계획이랄 것도 없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노느니 공부라도 한다고 하면 어머니도 그 편을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넌 집에 안 가? 종인이 느리게 물었더니 세훈은 그냥 웃었다. 두 사람에게는 아직 하지 않은 이야기가 많았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많았고, 알아온 시간보다는 알아야 할 시간이 많았다. 종인은 그 여유를 짐짓 기대하고 있었다. 

수화기를 붙들고도 긴 말은 오가지 않았다. 그저 떨어져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도 말이 많지는 않았다. 보이는 것을 나누지 않아도 같은 것을 공유하는 것처럼 편안했다. 세훈의 작은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건너오는 것을 들으며 종인은 생각했다.

보고 싶다고.








18.




세훈이 이름을 올려둔 토익 반에 출석한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일주일에 3일간 수업을 하는 클래스가 아닌 5일짜리에 이름을 올린 것은 종인의 동의 없는 결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왜 그랬냐고 물을 이유도 없었다. 뭐라도 핑계 삼아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종인에게도 유효한 것이었다. 학교까지는 통학하기에 귀찮은 거리이긴 했지만 집에서 빈둥대는 편보다야 뭐라도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종인은 제 앞과 뒤의 사람 수를 대강이나마 헤아려보았다. 첫 날이라고 의욕적으로 머릿수를 채웠던 그네들은 벌써 듬성듬성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어차피 기한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갈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종인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도 강의 내용과는 멀리 떨어진 것이었다. 종인은 흘긋 옆을 바라보았다. 세훈은 등을 곧게 펴고 무뚝뚝한 얼굴로 강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종인이 무료한 얼굴로 펜을 굴리며 시선을 치워냈다.

“다시 고3 된 거 같아.”

백 단위 수의 단어 암기 숙제를 받고 강의실을 나서면서 종인이 중얼거렸다. 제일 먼저 밖으로 빠져나온 탓에 복도가 조용했다. 추울 정도로 에어컨을 세게 틀었던 강의실과 바깥의 온도 차이가 심해 종인이 어깨를 약간 떨었다. 

“재미없지.”

세훈의 말에 종인은 그 얼굴을 바로 보았다. 눈썹을 약간 구긴 얼굴은 곤란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종인은 푹 웃고 말았다.

“이걸 뭐 재밌으려고 했나.”
“집도 멀고 귀찮잖아.”
“괜찮아.”

입술을 당겨 웃은 종인이 건물 밖으로 나가자마자 덥네, 하고 중얼거렸다. 조그만 목소리가 그러게.. 하고 동의를 덮었다. 어물어물 미안해하는 건 확실히 의외의 반응이라 좀 귀엽기도 하고. 

주 5일 꼬박을 학교에 나오고 있으니 뺏기는 시간은 짧을지언정 학기 중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학교가 조용했다. 계절학기 수강생이나 이런 저런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캠퍼스를 채우긴 했지만 학기 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종인은 오히려 이 한가함이 좋았다. 

두 시간 반짜리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오가는 동안 종인은 왕복 두 시간을 전철에서 보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길에서 보내는 시간을 아까워하게 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쯤의 외박을 정해진 수순처럼 두게 되었다. 밤이 되면 저를 돌려보내곤 했던 세훈도 이제는 그리 강경하게 굴지만은 않았다. 

“진짜 덥다.”

세훈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종인이 혀를 쭉 빼고 숨을 몰아쉬었다. 손부채질은 의미 없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세훈은 열심히 베어 먹던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한 입까지 해치우고 빈 막대를 물고 있었다. 세훈은 확실히 종인에 비해 더위에 강했다. 방에 발을 들이자마자 종인은 화장실로 들어갔고, 세훈은 에어컨 온도를 조절하고 혼자 있었을 고양이의 사료 따위를 챙겼다. 그것은 당연한 절차나 매뉴얼처럼 이어졌다.

습기 찬 화장실에서 세훈이 나왔을 때, 먼저 씻은 종인은 바닥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누워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돌아 공기가 제법 찼는데도 종인은 거의 죽은 듯 납작한 모양새였다. 세훈은 젖은 머리칼을 털어낸 뒤에 바닥 저 멀리에 널려있는 쿠션을 하나 끌어다가 종인의 근처에 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종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보다 못한 세훈이 쿠션을 다시 주워들고 종인의 앞에 가 앉았다.

“머리 들어봐.”

그러자 종인이 그제야 꾸물거리고 움직였다. 머리를 드는가 싶더니 종인은 세훈의 마른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는 편안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세훈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다리를 낮췄다. 종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 

“세훈아.”
“응.”
“더워.. 집에 가기 싫다.”

실없이 이어지는 종인의 말에, 세훈이 낮게 웃었다. 그리고는 종인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겨주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라면 안에 내포하고 있을 숨은 뜻부터 먼저 닿았을 테지만, 종인의 입을 탔으므로 그것은 단지 현상학적인 사실이었다. 세훈의 손길은 부드럽고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더위에 지친 종인이 금세 얕은 잠에 빠졌다. 손 끝으로 옮겨온 물기가 간지러웠다.







기어이 경수를 따라 같은 클래스에 등록한 백현은 의도야 어쨌건 열심이었다. 경수는 눈을 들어 제 앞에 앉은 백현을 바라보았다. 문제 풀이 해설을 달고 있는 무표정한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그 안에 몰입해있었다. 기민하게 날을 세웠던 제가 오히려 바보로 느껴질 정도로 백현은 성실하게 공부했다. 원래 껄렁한 애가 아닌 건 알았지만. 

두 번째 수업이 끝나고 나자 백현은 자연스럽게 경수의 책상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벌써 가방을 다 챙겨 메고는 당연한 것을 읊듯 말했다.

“스터디 신청할 거지?”

경수는 그런 백현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는데.”
“왜?”

백현은 이상한 대답이라도 들은 양 눈썹을 치떴다. 공부를 하려던 것은 맞는데 경수는 딱히 스터디라던가, 하는 완전한 타인과 엮이는 모임에 소속되고 싶지는 않았다. 애써 불편할 이유는 없었다. 여러모로 혼자가 편했다. 

“꼭 해야 되는 것도 아닌데.”
“혼자하면 늘 것도 안 늘어. 같이 하지?”

나오는 길에 데스크에 선 백현은 스터디 신청서를 두 장 받아 한 장은 경수에게 내밀었다. 얼결에 신청서 제출까지 마치고 나왔다. 다음 날에 그룹 편성이 되었고 당연하게도 백현과 경수는 한데 엮였다. 딱히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혼자라면 생각조차 안했을 거였다. 

스터디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은 없었다. 정규 수업 한 시간쯤 전후로 모여서 간단히 단어 시험이나 보고 서로 질문 받는 정도로 그쳤다. 그것만으로 뭔가 쌓인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으나 이 정도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낭비라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백현은 그 모임 내에서도 분위기를 주도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주무를 수 있는 센스가 백현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모임 시간이나 불분명한 룰은 백현에 의해 확실시 되었다. 백현은 명확하지 않은 것을 참고 보는 성격이 못 되었고, 의견을 관철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수업 후에 스터디를 마치고 짐을 챙기는 경수의 뒤로 목소리가 꽂혔다. 

“둘이 친구예요?”
“응. 같은 학교.”

경수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백현이 선수쳐 대답했다. 여자의 대답이 아아, 하고 늘어졌다. 언제 말을 놓았는지 꼬리가 짧았다. 백현은 제게 돌려지는 몇 마디에 편하게 응수하더니 금세 농을 걸었다.

“너 얘한테 관심 있냐.”
“아, 오빠 뭐예요.”
“왜. 경수 잘생겼잖아.”

놀리듯 이어지는 말에 경수의 귓가가 벌겋게 달았다.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이고 가방이나 정리하고 있었지만 들리는 말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주체가 백현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움이 더 했다. 경수는 어물쩡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먼저 스터디룸 밖으로 나와 버렸다. 엘리베이터가 몹시 느리게 움직였다. 그 속도를 이긴 백현이 경수의 뒤에 서서 그 뺨에 아이스티 캔을 갖다 댔다. 경수가 움찔 놀라며 뒤를 돌자 씩 웃으며 자, 하고 캔을 건넨다. 방금 뽑았는지 물기도 덜 맺힌 캔이 시원했다. 

“고마워.”
“인사는 지희한테 하고.”

경수가 의아하다는 듯 백현을 쳐다보았다. 백현은 아이스티를 목에 거의 털어 넣고는 입술을 닦았다. 

“걔가 뽑아주던데. 너랑 먹으라고.”

그리고는 다 마셨는지 캔을 구겼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캔을 가만히 내려 보던 경수가 묵묵히 캔을 땄다. 말랐던 입이 순식간에 달아졌다. 이상할 것도 없는데 기분이 영 이상했다. 지독하게 느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러고 보니 백현은 더 이상 제게 조르지 않았다. 







어디에 말 한 적도, 그럴 일도 없었지만 준면은 따로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해봤자 한 학기동안 했던 과 사무실 아르바이트가 다였다. 그 마저도 시간을 뺏기는 기분에 한 학기만 채우고 그만뒀다. 일이라고 해봐야 화분에 물이나 주고 전임 교수 사무실이나 들락거리던 것이 다였다. 

준면은 뒷목을 두드리다가 이내 목을 뚝뚝 꺾었다. 살벌한 소리가 났다. 인턴사원으로 입사한 지 열흘 가량이 지났다. 제게 맡겨지는 간단한 자료조사나 리스트업 따위를 위해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시간은 준면에게 약간의 회의를 가져다주었다. 준면은 아래를 밟아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도 간과하고 있던 것이었다. 때문에 본인이 소속된 단체에 큰 영향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약간의 충격이 뒤따랐다. 

딱히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쌓이는 스트레스가 준면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미 주어진 선택지를 물렸던 준면에게 있어 자존심 역시 중했지만 어쩐지 머릿속이 극에 달해 있었다.

퇴근을 한 시간 앞두고 준면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찬열이었다. 준면은 액정을 메운 이름에 잠시 긴장했다. 받을 지 말 지를 고민하던 준면이 이내 핸드폰을 손에 쥐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찬열은 인사도 없이 대뜸 말했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목소리가 웅웅 울려서 들렸다. 

“뭐해요?”
“일하지.”
“아, 맞다. 그럴 시간이네. 전화 괜찮아요?”
“길게만 안 하면.”

찬열이 들릴 듯 말듯 한 소리로 픽 웃었다. 얼마 간의 틈만을 주고 찬열이 곧장 물어왔다.

“퇴근하고 뭐해요? 약속 있어요?”
“아니.”
“만날래요?”

돌려말하는 법 없는 정직한 물음이었다. 준면의 손은 초조한 듯 탕비실 안의 종이컵을 구기고 있었다. 잠시 선택지를 저울질 하던 준면이 대답했다.

“그래.”

의외로 흔쾌히 떨어진 대답에 찬열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 광화문 교보쯤에서 볼래요? 괜찮아요?”

찬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준면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전화임을 깨닫고 응, 하고 대답했다.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마침 회사 근처를 대는 것이 어디서 들은 게 있는 듯 싶었다. 

“몇 시가 좋아요? 7시?”
“넌 언제가 좋은데.”
“형 괜찮을 때요. 그냥 와서 연락해요. 근처예요.”
“알았어.”
“이따 봐요.”

웃음을 섞은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준면은 구겼던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준면이 핸드폰을 뒤지기 전에 찬열이 뒤에서 나타나 제 어깨를 짚었다. 눈에 띄기 쉬운 것은 오히려 키가 훌쩍 큰 찬열이었는데, 찬열은 저를 잘도 찾아냈다. 준면은 머쓱하게 웃었다. 찬열의 티셔츠나 청바지, 컨버스는 준면의 반듯한 정장 차림과 썩 어울리지는 않았다. 위아래로 준면을 쭉 훑어본 찬열이 눈을 접어 웃었다.

“금방 왔네요.”
“뭐..”
“저녁 전이죠? 뭐 좀 먹을까요?”

약간 들뜬 목소리였지만 준면은 입술을 물며 고개를 저었다. 음식 생각을 하니 어쩐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계절을 타는 준면은 여름이면 유독 입이 짧아지곤 했다. 단호한 거절의 표현에 찬열이 더 묻는 대신 준면의 얼굴을 살폈다. 하얀 얼굴은 피로에 물들어있긴 했지만 아픈 기색은 없었기에 찬열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은 낮이 길었다. 더운 바람이나마 슬슬 불어오기 시작해 다행이었다. 커피라도 마시겠냐고 물었으나 준면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하루 종일 앉아 속으로 집어넣은 게 커피였다. 카페인이 몸에 퇴적층처럼 쌓이는 기분이었다. 종일 머리 위에서 돌던 에어컨 바람도 머리가 아파 싫었다. 좀 걷자. 준면이 짤막하게 끊어 말했다. 

“발 안 아파요?”

한동안 말없이 이어지는 걸음에 찬열이 꺼낸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좀 다리가 아픈가. 준면은 그제야 제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두를 신은 발이 딱딱한 것도 같았다. 

“그러지 말고 좀 앉아요. 해도 곧 떨어질 텐데. 뭐라도 마실래요?”
“에어컨 바람 싫은데.”
“편의점이라도 갔다 와요. 이러다 완전 익겠네.”

회유에 따라 들어간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사서 나왔다. 광장 구석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낮과 밤의 경계쯤으로 하늘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쪽에서 솟아대는 분수의 물줄기와 그 안에서 뛰고 뒹구는 어린아이들이 여름을 실감케 했다. 찬열은 맥주 캔을 따며 말했다. 

“좀 제대로 된 거 사줄 수 있는데 왜요.”

준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방을 옆에 세워두고는 맥주를 몇 모금쯤 마신 준면이 목에 맺히는 탄산에 약간 인상을 썼다가 풀었다.

“날씨 좋잖아.”
“날씨가 무슨 상관이에요.”

찬열이 어이없다는 듯 푹 웃었다.

“아무렇게나 만든 안주도 싫고 담배냄새랑 에어컨 바람 정신없는 것도 싫어서.”

차분한 말이 이어졌다. 고개를 젖히고 맥주를 마시는 준면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 있던 찬열이 곧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형 담배 끊었어요?”

커진 눈에는 제가 모를 수 있는 사실에 대한 의심이 담겨 있었다. 애초에 많이 피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찬열은 그 짧은 시간동안 빠르게 되짚었다. 준면은 그보다는 느리게 대답했다.

“아니.”

그리고 다시 시선을 틀어 제 앞에 눈을 두었다. 해가 지는 시간이라 나온 건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걷고 또 앉아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열심히 걷는 사람도 있고,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도 있고, 가족도 연인도 있었다.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덩어리를 눈에 담은 준면이 덧붙여 말했다.

“남이 피우는 담배 냄새는 맡기 싫잖아.”

말에 틈이 벌어졌다. 일이 힘드냐고 묻고 싶은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찬열은 말을 쉬었다. 준면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근데 너 나 여기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고?”

그 말에 외려 찬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여기서 일해요?”

떨어진 말을 완전히 줍지 못한 준면이 눈썹을 한 번 들었다. 찬열이 말을 이었다.

“저 학원이 이 근처라서. 집도 가깝고.”
“아.”
“뭐예요. 알고 말한 줄 알았나보네. 그런 거 아니에요.”

찬열이 손사레를 치며 웃었다. 딴에는 뒷조사 같은 거 하는 거 아니라고, 겁먹지 말라고 웃으면서 한 말이었다. 그 반응에 준면은 이유 모를 섭섭함 따위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꺾인 기대에는 항상 자조가 뒤따랐다. 준면은 입을 꾹 다물고 미약하게 부는 더운 바람만 맞고 있었다. 찬열이 침묵을 두지 못하고 말했다.

“회사가 어디에요?”
“역에서 한 5분 걸리나.”
“어. 진짜 가깝네.”

남은 맥주를 다 털어 넣은 준면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짚었다. 약간 열이 오르는 것 같은데 더워서 그런 건지, 빈속에 털어 넣은 맥주 때문인지 몰랐다. 찬열은 준면의 손에 들린 빈 맥주 캔을 받아들었다.

“저 이 근처에서 알바도 해요. 오픈.”

준면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무슨 뜻이냐는 듯 저를 쳐다보는 눈에 찬열이 씩 웃었다.

“일곱 시에 문 열거든요. 놀러오면 커피 줄게요.”







며칠 뒤, 준면은 찬열이 일한다는 카페를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기라며 위치까지 가르쳐주었던 것이 발단이었다. 그냥 해 본 말이려나, 하면서도 준면은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카페는 역 근처 빌딩에 목을 놓고 있었다. 러시아워를 못 견디고 전철로 출퇴근을 했기에 오히려 찾아내기는 쉬웠다. 문을 밀고 들어섰으나 찬열은 보이지 않고 도어벨만 요란하게 짤랑댔다. 준면이 포스까지 가지도 못 하고 문가에 서서 주위만 쭉 훑고 있을 때, 도어벨 소리 때문인지 찬열이 나왔다. 준면을 발견하고 눈을 커다랗게 뜬 찬열이 말했다.

“어, 진짜 왔네요.”
“그냥 해 본 말이면 가고.”
“그런 거 아닌데.”

찬열은 눈을 구기고 웃었다. 눈가에 잡히는 주름이 선하게 휘었다. 준면은 포스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고, 찬열은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요.”

그리고는 다시 스텝 룸으로 들어갔다. 찬열이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나자 준면도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회사까지는 멀지 않았고, 평소보다 일찍 나온 덕에 시간도 여유가 있었다. 출근 시간대에는 5분이 30분을 바꾸기도 했다. 준면은 가만히 턱을 괴고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가게는 크지 않은 규모에 군더더기 없이 최소한의 것만 두고 있었다. 그나저나 프랜차이즈도 아닌데 오픈이 일렀다. 인근 회사 때문에 그런가. 

준면이 헛생각을 하며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찬열이 다시 모습을 내비쳤다.

“뭐 마실래요?”

말과 동시에 찬열이 싱크에 물을 틀어 손을 씻었기에 준면은 잠시 기다려야했다. 물 소리가 끊기고 나자 준면이 조용히 말했다. 

“너 만들기 쉬운 걸로.”
“아침은 먹었어요?”

준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보니 얼굴이 좀 헬쓱한 것 같기도 했다. 찬열이 약간 눈썹 구기고 웃었다. 유니폼까지는 없는 건지, 찬열은 폴로셔츠 차림에 랩스커트를 두르고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등을 보고 준면이 물었다.

“바빠?”
“안 바빠요.”

음. 준면은 입을 한 일자로 만들었다. 아닌 것 같은데. 준면은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여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찬열이 슬리브까지 끼운 음료잔을 내밀었다. 뚜껑을 열 필요도 없이 달큰한 냄새가 났다. 많이 뜨겁지 않은 음료는 연한 노란 색을 띄고 있었다. 아마 준면의 속이 비어있는 걸 알고 한 최대한의 배려였을 것이다. 준면은 피식 웃으며 잔을 받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자주 와요.”
“그래. 수고해라.”

찬열이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서 있다가 준면을 불렀다. 

“형.”

낮게 울린 목소리에 준면이 고개를 틀었다. 

“정장 잘 어울려요. 멋있네.”

그리고는 코까지 찡긋하며 활짝 웃어 보였다. 준면은 대답 없이 입술을 당겨 씩 웃었다. 









19.




빈 시간이 늘어갈수록 세훈은 종인의, 종인은 세훈이 가진 과거의 시간을 짚는데 골몰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혹은 훨씬 전의 시간은 사이의 교감을 높이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하게 충족되었다. 제법 성실하게 들었던 토익 수업 같은 것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할당된 기한의 반쯤 지나 있었다. 수업을 처음으로 빠졌는데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때는 의미 있었다.

“여자친구는?”

종인이 몸을 뒤집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에 던져진 질문이었다. 세훈은 길게 엎드린 채로 눈만 들어 종인을 올려보았다. 제습에 맞춰 틀어놓은 에어컨이 얕은 바람을 만들고 있었다. 세훈의 긴 눈이 몇 번쯤 깜빡였다. 종인은 문장을 다듬어 다시 한 번 물었다.

“학교 다닐 때 여자친구 있었어?”
“남중, 남고였는데.”

세훈이 더 물을 필요가 없다는 듯 말을 끊어냈다. 그리고는 나른하게 눕혔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질문을 되돌렸다.

“너는?”
“나?”
“응.”

제가 궁금해서 물었던 것이었는데 표적이 금세 바뀌었기다. 종인은 약간 당황했다. 

“그냥. 몇 번.”
“몇 번?”

짧은 말은 여러 의미로 들렸다. 단순히 횟수를 묻는 것 같기도 했고, 몇 번이나? 라고 추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종인은 뭐라고 대답할 지 입 안에서 고르던 말을 삼키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땠어?”

세훈은 기대하는 바가 있는 듯 물어왔다. 반응은 실망으로 굳어져 있다는 것을 종인은 예상했다. 종인의 학창시절 연애는 평범했다.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고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사귀다가 헤어지고 말고도 없이 어영부영 끝나는 고등학생의 연애. 손이나 한 번 잡아볼까 말까한 그런. 그 흐린 모양새 그대로였다. 

“잘 기억 안 나는데.”

어영부영한 말에 종인을 보는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종인이 띄엄띄엄하게 말을 덮었다.

“진짜야. 그냥.. 같은 반이다가 사귀고 뭐 그런 거. 별 거 없었어.”

어쩐지 변명처럼 덧붙여진 말에 세훈은 으응, 하고 콧소리 내듯 답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몸을 눕혔다. 길게 드러누운 세훈의 얼굴은 어딘가 침통해보였다. 

“진짜 별 거 아닌데.” 
“아, 응.”
“화났어?”
“아니.”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종인이 드물게 조바심을 냈다. 답지 않게 세훈의 흰 뺨을 쿡 찌른 것이 그 방증이었다. 나름대로 풀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는데 세훈은 고개를 홱 돌렸을 뿐이었다. 종인은 세훈의 굳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반듯한 이마와 각 잡힌 눈썹이 드러난 얼굴. 종인은 초조함을 담아 말했다.

“키스하자.”
“싫어.”

망설임 없이 뱉어진 답에 종인은 당황했다. 세훈은 종인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표정 없는 얼굴은 사소한 화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훈은 벽인지 어딘지 모를 곳을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 속도만큼이나 느리게 입을 연 세훈이 말했다. 

“나는?”
“어?”

지나치게 짧게 던져진 말에 종인이 되물었다. 세훈의 시선은 여전히 종인에게서 비켜난 곳을 향해있었다.

“별 거 아니라고..”

세훈은 제 말을 마무리하지 못 했다. 그리고는 길게 뜸을 들였다. 종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종인은 세훈이 뱉어내는 불안을 읽고 있었다. 세훈은 미래의 시간을 짚었다. 제가 별 거 아닌 무엇으로 흐르게 될.. 세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키스하는 친구 같은 건 싫어.”

종인은 저를 보지 않는 세훈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위로 뜨인 눈동자와 꾹 다물린 입술은 고집스러워 보였다. 종인은 세훈이 뱉어낸 말의 깊이나 무게를 가늠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관계의 규정은 의미가 없었으므로. 종인은 천천히 물었다.

“그럼 뭘 하고 싶은데.”
“말 안 해.”
“해봐.”

세훈이 얇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상황은 세훈을 달래듯 이어졌다. 과정에서 처음으로 세훈이 아이처럼 보였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의 침묵은 심장을 빠르게 내달리게 만들었다. 자잘한 긴장이 부피를 늘려가고 있었다. 종인은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고, 세훈은 입술이 벌개지도록 물고 씹었다. 세훈이 한참 만에 눈을 들어 종인을 보았다. 그리고 뱉어낸 말은

“만져도 돼?”

종인을 당황시키기 충분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종인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이는 종인을 힐끔 쳐다본 세훈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뒷머리칼을 마구 털었다. 아, 진짜.. 세훈의 입술에서 불퉁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말 안 한다니까.”

조금은 실망한 투였다. 종인의 시선이 세훈의 움직임을 따랐다. 세훈의 귀 뒤부터 목덜미까지가 새빨갛게 달아있었다. 종인은 일어나는 세훈의 팔을 잡았다. 반사적인 행동으로 세훈이 고개를 돌려 종인을 내려 보았다. 눈이 맞닿았다. 세훈은 혼자만 정답을 틀린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뻣뻣한 얼굴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종인은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제게 있어 세훈은 어떤 의미가 되었나.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은 그것들은 짧은 시간, 저를 잘도 바꾸어 놓았다. 세훈은 벌겋게 달은 제 귓가를 쓸어내리다가 흘긋 종인을 보았다. 시선이 닿았다. 세훈의 불안한 눈을 마주하며 종인은 긍정의 의미를 담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일 시간은 제게 충분했다. 이제 순서를 돌릴 차례였다. 시간이 멈춘 듯 세훈의 움직임도 일순 멎었다. 그리고 곧장 해빙처럼 세훈의 얼굴이 다가왔다.







닫힌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는 급박하게 움직였다. 세훈이 틀어쥔 종인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과 달리 급하고 서툰 움직임에 종인이 달래듯 세훈의 등을 끌어안았다. 세훈의 템포는 따라가기 벅찼다. 세훈은 제 것과 종인의 혀를 얽으며 종인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빠르게 영역을 침범한 손은 차가웠고, 그 손에 만져지자 허리 부근이 긴장하듯 경직되었다. 종인은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는 느낌에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세훈은 종인의 아랫입술을 빨고 다시금 젖은 점막을 혀끝으로 느끼며 종인의 티셔츠를 말아 올렸다. 차가운 실내 공기에 노출된 피부로 잔 소름이 끼쳤다.

입술이 느리게 떨어졌지만 세훈의 손은 여전히 종인의 등과 허리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어깨에 기댄 가는 턱이 움찔거렸다. 닿아오는 손도 차갑고, 공기도 차가웠다. 종인은 세훈의 등을 느슨하게 안았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세훈의 가슴께에 순서를 모르는 손을 뻗었다. 종인의 손이 닿자 세훈이 순간, 움찔 놀라며 숨을 몰아쉬었다. 옷 아래로 만져지는 가슴은 단단했다. 

“세훈아..”

종인이 뱉어낸 이름에 끈질긴 어린 짐승처럼 제게 엉기던 세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몰아쉬는 숨에 종인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세훈의 놀란 몸과 반응이 신기하고 기분을 들뜨게 했다. 종인은 좀 더 대담하게 손을 옮겼다. 티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세훈의 가슴과 허리를 천천히 매만지자 처음처럼은 아니지만 세훈이 조금씩 몸을 떨었다. 천천히 귓가를 쓸어주자 세훈이 반쯤 뜬 나른한 눈으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신호였다. 

종인은 거의 벗겨진 티셔츠를 던지듯 벗었고 세훈도 제 몸을 덮은 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몸을 밀착해 서로를 안았다. 맞닿은 체온이 달라 속이 찌르르 울려 왔다. 정신 나간 것처럼 깊게 입을 맞췄다. 세훈의 손은 종인의 등과 허리를 간질이듯 섬세하게 더듬었다. 종인 역시 지지 않고 세훈의 몸을 만졌다. 하얀 피부는 부드럽게 손에 감겼다.

선을 따라 아랫입술을 덧그려 핥은 세훈이 입술을 떨어뜨렸다. 망설임 없이 종인의 목덜미로 자리를 옮긴 세훈의 입술과 혀는 보다 섬세하게 움직였다. 종인의 발가락 끝이 긴장으로 오므라들었다. 세훈은 혀를 내어 움푹한 쇄골을 핥으며 종인의 어깨를 밀어 눕혔다. 순순히 몸을 눕힌 종인의 유두를 입에 머금은 세훈이 혀끝으로 솟아오른 돌기를 눌렀다. 낯선 감각에 종인의 허리가 움찔 튕겨 올랐다. 제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실리자 세훈은 반대편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탄탄한 배 위까지 입술을 찍어 누른 세훈이 서서히 내려와 종인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내렸다. 부끄러움이 밀려들었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이 존재했다. 종인의 다리를 천천히 잡아 벌린 세훈은 반쯤 솟은 종인의 것을 입에 담았다. 입안을 압박해 빨아 당기는 힘에 종인의 아랫배로 힘이 들어갔다. 종인보다 체온이 낮은 세훈이지만 입 안은 축축하고 뜨거웠다. 혀로 기둥을 핥는 소리가 질척하게 울렸다. 종인의 것이 팽창할수록 허벅지가 가늘게 경련했다. 종인의 성기가 사정감을 간신히 참을 수 있을 정도로 꼿꼿하게 솟아오르자 세훈이 떨어져 나와 제 입술을 핥았다. 종인을 반쯤 뜬 눈으로 내려 보던 세훈이 입을 열었다.  

“해도 돼?”

세훈의 찡그린 눈가와 벌어진 입술을 올려보며 종인이 천천히 고개 끄덕였다.

“아플지도 몰라.”

뒤늦은 망설임에 종인이 조급하게 세훈의 목에 팔을 감고 끌어당겼다. 

“괜찮아.”
“나중에 못 한다고 해도 안 그만둬.”
“알았으니까..”

빨리, 하는 말이 입 안으로 먹혀들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키스는 입술을 먹어치우듯 이어지고 있었다. 세훈은 손가락을 세워 종인이 뒤를 더듬었다. 이전보다 배는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망설이듯 골을 더듬던 세훈이 손가락을 넣었다. 그러자 종인이 참지 못하고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아!”

당황한 것은 세훈 뿐만이 아니었다. 종인도 적잖이 당황했지만, 세훈은 곧장 매트리스 바깥으로 손을 뻗었다. 잡히는 대로 집어올린 것은 다행스럽게도 핸드크림이었다. 손바닥 가득 묽은 크림을 짜낸 세훈이 조급하게 뒤를 재차 파고들었다. 처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진입했지만 이물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종인은 흡,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끄지 못 한 에어컨 바람이 방을 돌았지만 종인의 등은 흠뻑 젖어 있었다. 세훈은 종인이 숨을 몰아쉬거나 인상을 구길 때마다 습한 눈으로 종인을 안타깝게 내려 보았다. 그러면서도 손가락 개수를 천천히 늘려서 안을 휘젓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종인 역시도 멈추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젖은 점막이 움찔거리며 손가락을 조여 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안을 풀어주는데 종인이 순간, 소리조차 못 내고 몸을 크게 떨었다. 아픔을 참는 것처럼 구긴 눈가와 입술에 세훈이 놀란 눈을 했다.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세훈은 가늘게 뜬 눈으로 종인을 내려 보았다. 종인은 제가 보인 반응에 뒤늦게 입술을 사려 물었다. 혹시나 하고 한 번 더 그 곳을 자극하자 종인이 참지 못하고 울듯 신음했다.

“아… 흐윽…….”

종인의 것이라기엔 높게 터진 소리에 몇 번쯤 세훈의 손이 같은 궤적을 그렸다. 종인은 매순간 허리를 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종인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을 때, 세훈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제 것을 꺼냈다. 아플 정도로 크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삽입 초반부터 종인은 숨을 크게 헐떡이며 세훈을 조르듯 당겨 안았다. 아랫배를 둔탁한 뭔가로 얻어맞은 듯 아팠다. 점성 있는 크림과 점막이 흡착해 찰박거리며 낯 뜨거운 소리가 났다. 세훈의 성기는 유연하게 안을 파고들었고, 동시에 아랫입술이 벌어졌다. 무언가에 몰두하면 벌어지곤 하는 아랫입술은 발간 속을 내비치고 있었다. 종인은 세훈의 마르고 단단한 몸을 좀 더 깊게 당겨 안았다. 그리고는 내밀어진 아랫입술을 빨았다. 미간을 구기고 입술을 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안을 파고드는 세훈의 성기도 경도를 더했다. 

“종인아..”
“아, 아으…….”
“너, 진짜 예뻐.”

끊어질 듯한 신음에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럼에도 종인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찡그렸다. 세훈 역시 잔뜩 구겨진 미간에 벌어진 입술을 어쩌지 못하고 거의 되는 대로 중얼거렸다. 

“진짜.. 미칠 것 같아.”
“너무, 뜨거워..”
“좋아해. 진짜로.. 종인아..”

탄식처럼 이름을 부른 세훈이 속도를 올렸다. 가는 턱을 타고 땀이 흘렀다. 거의 눈을 감을 듯 내리 깔고 종인을 보는 눈과 구겨진 눈썹은 불안정한 모양이었다.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종인의 다리가 중심 없이 흔들리다가 세훈의 허리에 감겼다. 더 깊게 조여오는 감각에 세훈은 누군가 머릿속을 주무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종인의 내벽이 움츠러들었다가 저를 깊게 받아들이는 그 움직임은 미치도록 황홀했다. 이성만으로 감당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저를 휘감는 쾌감에 세훈이 고개를 젖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종인을 내려 보는 그 시선이 서늘하면서도 몹시도 진득했다. 

눈빛이 저를 쥐고 흔드는 것 같아, 종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질끈 내리 감은 종인의 이마로 마를 틈 없는 땀방울이 흘렀다. 세훈은 종인의 깨물린 아랫입술을 보다가 제 손가락으로 젖은 입 안을 헤집었다. 

“입술 다쳐.”

아프면 대신 깨물라는 뜻이었는데, 의외로 종인은 들어온 긴 손가락을 핥고 빨았다. 예민해진 몸이 손 끝에도 반응했다. 종인이 눈을 내리감고 손가락을 깊게 빨자, 참지 못한 세훈은 손가락을 꺼내고 그 위로 제 입술을 묻었다. 밀려들어온 혀는 파도처럼 움직였다. 젖은 손가락으로 종인의 떨리는 눈가를 쓰다듬으며 깊게 입 맞췄다. 안으로 파고든 성기가 내부를 간지럽혔다. 종인과 혀를 얽으면서도 세훈의 손은 성기를 향해 있었다. 사정 직전까지 부푼 성기를 쓸어 올리자 세훈의 무게 아래에서도 종인이 몸을 뒤틀었다. 수음이 얼마 가지 못해 종인은 참지 못하고 사정했다. 선단 너머로 정액이 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안으로 뜨거운 것이 쏟아졌다. 세훈과 종인의 입술을 비집고 가쁜 숨이 터졌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

종인이 숨을 잔뜩 섞어 중얼거렸다. 몸이 녹녹하게 풀리며 물에 잠기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선잠에서 깬 세훈은 엎드린 채로 깊게 잠든 종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얕은 숨을 내쉬는 얼굴은 평온해보였다. 세훈은 머리카락이라도 쓸어 넘겨줄까 하다가 이내 손을 거둬냈다. 혹시라도 깰까 싶어서였다.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고양이가 훌쩍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훈은 뜻이 통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쉿.. 하고 중얼거렸다.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들여다보기만 한 지가 한참이었다. 종인이 느리게 눈을 떴다. 짙게 쌍꺼풀 진 눈이 반만 뜨여서 깜빡였다. 다시 내리감기길 기다렸으나 종인은 졸린 눈을 감지 않았다. 세훈은 소리 낮춰 물었다.

“왜?”
“목말라.”

잔뜩 가라앉은 말에 세훈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물을 가지러가는 세훈의 뒷모습을 보던 종인의 입술을 비집고 잠긴 웃음이 터졌다. 두 사람 다 뭐 하나 걸친 것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종인은 눈을 꾹 감고 베개에 얼굴을 반씩이나 파묻은 채로 소리 죽여 웃었다. 

“왜 웃어?”
“그냥.”

대답과 함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운 종인이 만연한 웃음을 거두며 세훈의 손에 들린 컵을 건네받았다. 목이 탔는지 물 한 컵을 거의 다 비워낸 종인이 바닥에 컵을 두었다.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낸 종인이 다시금 엎드려 누우며 중얼거렸다. 너..

“되게 크더라.”

일부러 불분명하게 말했는데도 세훈이 놀란 눈을 치워내며 고개를 틀었다. 잠시 정적이 일었다. 종인은 부러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부채질 하며 큼큼거리던 세훈이 물었다. 

“많이 아팠어?”
“그럼 안 아플까.”

세훈이 민망한 듯 사방으로 눈을 두었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종인이 바람 빠지듯이 웃으며 베개에 얼굴 한쪽을 깊게 묻었다. 세훈을 올려보는 잠이 묻은 눈이 감기듯 휘었다.

“엄청 심각하네.”

장난스럽기까지 한 말이 떨어지고, 그제야 세훈이 종인을 바로 보았다. 아마 두 번이 없을까봐 그런 거겠지. 종인은 남은 순서는 모두 세훈에게 주고 싶었다. 두 번, 세 번, 그리고 그 이상의 선택을 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훈은 이미 많이 저를 기다렸다. 이제는 제 차례라고 여겼다. 출발이나 그 크기는 다르다 해도 방향만은 같아졌으니까. 눈이 닿은 것도 잠시, 세훈은 곧장 눈을 내리깔았다. 종인은 단정하게 등을 세우고 앉아 손가락만 뚝뚝 꺾어대는 세훈을 가만히 올려보았다. 내리깐 눈과 꾹 다물린 작은 입술은 어딘가 초조해보였다. 종인은 이불을 약간 아래로 끌어내리며 몸을 뒤집었다. 

“세훈아.”

낮은 부름에 세훈이 다시 종인을 보았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시선이 길게 이어졌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세훈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종인은 입술을 당겨 웃으며 물었다.

“키스할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훈이 종인의 어깨를 밀어 눕히며 입술을 갈랐다. 









20.




날이 더웠다. 굳이 몸을 부딪지 않더라도 다가오는 새까만 머리통만 봐도 짜증이 이는 날씨였다. 십몇 년만의 폭염이라는 뉴스를 들은 기억이 났다. 경수는 구겨지는 인상을 어쩌지 못하고 애꿎은 옷자락만 펄럭이고 있었다. 더워.. 푹푹 찌는 더위 속에 학원은 차라리 반가웠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축축한 냉기가 돌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제일 처음으로 본 것은 백현의 뒷모습이었다. 카라티에 커다란 백팩을 멘,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차림의 백현은 데스크에 팔을 괴고 몸을 기대고 있었다. 강의실로 들어갈 지, 인사라도 먼저 하는 것이 우선일지 재고 있는데, 백현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이런 식으로 자주 휴강 돼요?”

백현의 말에 새까만 정장 차림의 실장은 아니라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백현은 만족스런 대답을 들을 때까지 데스크에 기대고 있을 기세였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명쾌하지 않은 어떤 것을 참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경수는 백현의 뒷모습을 가만 쳐다보다가 가서 등을 툭툭 두드렸다. 백현이 빠르게 뒤를 휙 돌아보았다. 반응이 남다르게 빨랐다.

“어. 왔네.”
“오늘 휴강이래?”
“어. 그렇다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요구한 답이 떨어지기 전, 경수는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보았다. 바깥은 한참 더울 시간이었다. 제가 올 때도 미치도록 더웠고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밤도 더운 요즘이었다. 그렇다고해서 더위를 핑계로 버티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휴강된 강의가 다시 재개될 일은 없을 것이다. 시간은 끌지 않는 편이 좋았다. 백현 역시도 그냥 오기를 부려본 것인지, 데스크에 늘어트렸던 몸을 곧장 일으켜 세웠다. 아니. 대답 역시 깔끔하게 떨어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백현은 거울을 보며 건드리나 마나인 앞머리칼을 정리하고 있었다. 경수는 모양을 바꾸는 숫자만 바라보았다. 어색한 정적이 돌기 전에 백현이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집에 갈 거야?”

백현이 물었다. 경수는 다시 한 번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계획 같은 것은 없었기에 대답이 더뎠다. 틈을 참지 않은 백현이 미끼를 던졌다.

“오늘 되게 덥지 않냐.”
“응. 덥더라.”

예상과 달리 현상만을 놓은 대답에 백현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생긴 건 꽤나 살갑게 생겨서는 벽이 높고 견고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많이 허물어지지 않았나, 백현은 생각해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경수는 곧장 내렸다. 따르는 백현의 걸음이 느리다는 것을 알고서야 느리게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쏟아질 듯 커다란 눈을 하고. 백현은 알수록 참 답다고 생각하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어차피 공부하러 나온 거, 같이 하고 갈래?”

경수의 짙은 눈썹이 무슨 뜻이냐는 듯, 까딱하고 움직였다. 







학원에서 멀지 않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이미 주문한 빙수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운 뒤였다. 에어컨 바람이 빵빵한데다 얼음까지 속에 밀어 넣은 탓에 몸으로 한기까지 돌았다. 빈 그릇과 트레이를 치우자마자 경수는 가방을 뒤적였다. 가져온 책은 모조리 꺼내 늘어놓은 백현과 달리 경수는 책 한 권에 노트 한 면만 펼쳐놓고 있었다. 백현이 펜을 휙휙 돌렸다. 사실 백현의 인내심은 얼마 못 가 바닥났다. 틀어놓은 음악도 꽤나 시끄러웠는데, 그 음악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카페의 소음은 대단했다. 평일 낮에 무슨 사람이 이렇게나 많지. 백현이 짧게 혀를 찼다. 그래도 열심히 들여다보려던 책에서 아예 눈을 떼버린 백현은 굴리던 펜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턱을 괴고 마주 앉은 경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으나 경수는 책에 완전히 파묻힌 채였다. 도무지 고개를 들 생각을 않는 것 같았다. 백현은 지루함에 테이블을 손끝으로 툭툭 치다가 툭 내뱉었다.

“재밌냐.”

무심히 떨어진 말에 경수가 눈을 들었지만 그게 다였다. 딱 눈만 들어서 백현을 올려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눈보다 손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랐다. 잘 들어오지 않는 어떤 것을 머릿속에 구겨 넣기 위해서 행하는 가장 성실한 방법이었다. 경수가 꾸준히 손을 놀리며 대꾸했다.

“재밌어서 하겠냐.”

경수의 손은 바삐 움직였다. 날려 쓰는 글씨가 종이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백현은 넓게 펼쳐놓은 제 책을 하나하나 덮었다. 착착 덮인 책을 하나로 쌓은 백현은 경수를 바로 보며 물었다. 

“재밌어서 하는 건 없어?”

그 말에 경수가 다시 눈을 들었다. 까만 눈동자가 그제야 백현을 직시했다. 백현은 고개에 이어 손을 뚝뚝 꺾으며 물었다.

“너 뭐 좋아해?”

백현의 뜬금없는 말에 경수가 쥐었던 펜을 몇 번 고쳐 잡다가 이내 내려놓았다. 백현은 이제 말해보라는 듯 까딱, 턱짓을 해보였다. 경수는 당황스러운 듯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놓으며 대답했다.

“뜬금없네.”
“궁금해서. 뭐 좋아해? 너도 궁금하면 나도 말하고.”

경수가 느릿하게 턱을 괴었다. 뒤늦게야 안 사실이지만 경수는 때로, 무안할 정도로 사람을 빤히 보곤 했다. 백현이 그 눈을 마주하는 것이 약간 부담스럽다고 느낄 때쯤, 경수가 새까만 구슬 같은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기 시작했다. 구르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백현은 한쪽으로 올라간 입술을 어쩌지 못하고 경수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한참을 다른 어딘가를 보며 생각하던 경수의 입술이 순순히 열렸다.

“낮잠 자는 거 좋아해. 영화 보는 것도 좋고..”

사실 뜬금없는 요구를 한 것은 맞았으니까, 쓸 데 없는 고집을 좀 부릴 줄 알았는데. 경수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을 꺼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 같지만 백현은 그 속에서 하나의 패턴을 읽어냈다. 경수의 대답은 일상에서 평범하게 영위하는 것들이지만 죄다 혼자 할 수 있다는 공통분모로 엮여있었다. 백현은 으음.. 하고 말을 끄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더 말해보라는 신호로 들었는지, 경수는 다시금 눈을 굴리며 말을 골라냈다. 







“의외네. 이런 걸 다 좋아하고.”

백현이 후,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뜨거운 햇빛과 어지럽게 도는 기구들은 백현의 속을 약간 뒤집어놓았다. 경수는 던져진 말에 쑥스럽게 웃으면서도 좋은 티를 감추지 않았다. 적어도 백현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활짝 휘는 눈과 웃는 입매가 선했다. 백현은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호흡을 크게 했다. 

몇 시간 전, 경수가 한 대답은 확실히 의외였다. 한참을 더 생각하던 경수는 놀이기구 타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예상외의 대답에 백현이 그만 푹 웃었다. 경수는 뭐가 우습냐는 얼굴로 백현을 보았고, 그제야 백현은 그 말이 딴에는 고심해서 뱉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백현은 습관처럼 손끝으로 테이블을 타닥타닥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갈래?”
“어딜?”
“좋아한다며. 타러 가자.”

대수롭지 않게 뱉어진 말에 경수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백현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다 쉽게 꽂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현은 쌓아둔 책을 하나하나 가방에 밀어 넣으며 다시금 말했다. 

“마침 잠실 근처잖아. 가자.”

제가 늘어놓은 펜 한 자루까지도 가방에 쓸어 넣은 백현이 마지막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일어섰다. 경수는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백현을 올려보았다. 무슨.. 애가 이렇게 즉흥적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수를 보며 백현이 손짓했다.

“안 챙기고 뭐해. 가자니까?”

당연한 수순처럼 말하는 백현을 따라 어정쩡하게 일어나고 만 것에 반쯤은 경수의 의지가 아니었다. 백현이 창구에서 자유이용권 두 장을 끊어올 때까지 경수는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조차 지우지 못하고 서 있었다. 백현은 끊어온 자유이용권 한 장을 경수에게 내밀며 씩 웃었다. 이따 밥 사라. 능청스러운 말이 지극히 변백현다웠다.

어영부영 들어온 놀이공원은 기록적인 폭염 때문인지 사람이 이례적으로 적었다. 실내는 그래도 좀 북적이는 맛이 있었으나 실외는 기억에 비하자면 텅 비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백현도 다른 누구와 왔더라면 실외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실내에서 기구를 몇 개쯤 탄 경수가 자연스럽게 걸음을 바깥으로 옮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깥의 날씨는 더운 정도를 넘어 뜨거웠으나, 경수의 얼굴에는 싫은 기색이 없었다. 기구 하나를 탈 때마다 소리를 엄청나게 질러대고 잘 웃고 잘 놀랐다. 백현이 알던 경수와 지금 사이에는 꽤나 큰 간극이 있었다.

“시원한 거 좀 먹을래?”

더운 와중에도 기어이 자이로드롭까지 탄 경수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물어왔다. 사실 약간 지친 백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경수가 기꺼이 걸음을 옮겼다. 그새를 못 견딘 백현은 그늘로 들어가 땀을 식혔다. 기구 주위의 온도가 40도를 웃돈다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백현은 혀를 내둘렀다. 덥긴 되게 덥네.. 백현이 중얼거리며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손이 축축하게 젖는다. 으.. 싫은 소리가 터지기 무섭게 콘 아이스크림 두 개를 들고 온 경수가 백현에게 한 개를 내밀었다. 받아든 아이스크림은 그새를 못 견디고 형태가 약간 무너진 채였다. 백현이 약간 녹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가득 물었다. 경수는 정말이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즐거운 얼굴이었다. 동그란 이마에 땀방울을 매달고도.

백현이 그만 픽 웃으며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냐.”

그러자 경수가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다말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이내 활짝 눈을 접으며 민망한 듯 웃었다. 백현은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더 크게 물었다. 처음에는 그 도경수와 제가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다. 백현은 경수의 옆얼굴을 흘긋 보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역시, 깊이 알아서 나쁜 사람은 없었다. 







원래 찬열은 여름보다는 겨울을 좋아했으나 요즘은 달랐다. 이 정도라면 여름도 나쁘지 않다고, 아니, 좋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모두가 지옥같은 더위라며 혀를 내둘렀지만, 찬열은 이 여름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계절에 대한 감각까지 바꾸는 것은 역시 준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준면과는 오히려 학교에 있을 때보다 자주 만났다. 약속을 따로 잡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편이 더 좋다고, 찬열은 생각했다. 준면은 출근 전에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에 꼬박꼬박 들렀다. 목이 목인지라, 오픈이 이른 편이었지만 사실상 손님은 많지 않을 시간대였다. 준면은 항상 그 처음을 끊었다. 오가는 말이 별 것 아니더라도 준면이 습관처럼 제 얼굴을 보고 가는 것이, 찬열은 좋았다.

일상적으로 카페에 들러 음료를 건네받던 어느 날엔가 준면이 물었다.

“아침은 먹고 일해?”

얼결에 고개를 저었더니 준면이 불편한 얼굴로 약간 인상을 구겼다. 다음날부터 준면은 꼭 뭐라도 하나 들고 오지 않으면 안 될 사람처럼 굴었다. 먹고 해. 준면이 하는 말은 담백하면서도 강경했다. 정작 수능날도 챙겨먹지 않았던 아침밥을 이제와 챙기는 것은 사실 저답지는 않았다. 그래도 걱정해주는 것이 좋아, 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뻔한 인사에 준면은 입술을 당겨 부드럽게 웃곤 했다.

학원이 끝나는 시간과 준면의 퇴근 시간이 마침 비슷했기에 하루에 두 번씩 만날 때도 있었다. 행동반경이 읽히는 것은 찬열에게 퍽 편리한 일이었다. 아침에야 꼬박꼬박 보았고 퇴근하고도 연락을 하면 준면은 기꺼이 찬열을 만났다. 

짤랑하고 도어벨이 울리고 준면은 금세 찬열을 발견해냈다. 사실 발견이랄 것도 없이 작은 가게였으나 찬열은 씩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준면의 퇴근 시간보다 찬열의 학원이 끝난 시간이 더 빨랐기에 가능한 기다림이었다. 준면은 찬열의 맞은편에 앉으며 가볍게 퉁을 놓았다.

“환자도 아닌데 무슨 죽이야.”

학원 수업이 일찍 끝났다며, 찬열이 준면을 불러낸 곳은 다름 아닌 죽집이었다. 근처에 크고 작은 병원을 두고 있는 탓에 죽집에 들르는 대부분의 손님은 포장을 해갔고, 앉아있는 손님은 준면과 찬열이 다였다. 찬열은 웃는 낯으로 준면의 앞에 차가운 매실차를 밀어주었다.

“환자만 죽 먹어요? 밖에 더울 텐데 좀 마셔요.”

찬열의 말에 준면이 느릿하게 컵을 들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사실 굳이 죽집에 온 것도 다 준면 때문이었다. 지난 시간을 굳이 더듬지 않아도, 찬열은 준면이 여름을 제법 심하게 타는 것을 알았다. 입맛이 없다는 말을 들은 횟수만도 꽤나 쌓였다. 모르는 게 이상했다. 신경 쓴 보람이 있게 준면은 그간 먹은 어떤 것보다 수저를 잦은 횟수로 놀리고 있었다. 준면이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찬열이 생각난 듯 물었다.

“형, 주말에 시간 괜찮아요?”
“주말?”

되묻는 말에 찬열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약속 있어요?”
“아니.”
“그럼 만날래요?”

준면이 물잔을 든 채로 눈을 크게 떴다. 입술을 축이면서도 준면은 의아한 눈을 하고 있었다. 찬열이 액정 위로 손을 몇 번쯤 움직이다가 핸드폰을 준면 쪽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영화 봐요. 나 이거 보고 싶은데 같이 볼 사람이 없네.”

내밀어진 게 뭔가 했더니 핸드폰 액정 가득하게 영화 포스터를 띄워놓았다. 지하철역이며 TV며 온 천지에서 광고를 크게 내보내던 영화였다. 준면도 여기저기서 스치듯 예고편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핸드폰을 다시 되돌려주며 준면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쉽게 떨어진 대답에 찬열이 커다란 눈을 활짝 접으며 웃었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미련 없이 내려놓은 찬열이 들뜬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예매는 몇 시로 할지, 어디서 만날 지를 떠들기 시작했다. 준면의 입가에 차분한 미소가 걸렸다. 꼭 말 잘 듣는 리트리버 같네. 물론 생각한 바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세훈은 바닥에 축 늘어져있는 종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종인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돌아와 샤워만 하고 꿈쩍도 않고 누워만 있었다. 날은 점점 더워지며 종인을 괴롭혔다. 세훈은 비교적 더위를 덜 타는 편이었으나 종인은 더위를 엄청나게 탔다. 쏟아지듯 흩어진 머리카락이 귀찮지도 않은 지 종인은 손끝 하나 까딱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세훈은 아무렇게나 던져진 두 개의 가방을 구석으로 치우고서야 앉았다. 

방금 씻은 몸이지만 김이 올라올 것처럼 금세 더워졌다. 위로부터 도는 바람이 제게 닿고서야 숨통이 트였다. 종인을 학교로 불러낼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던 토익 수업도 이제 몇 번 남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와 다르게 길다고 느꼈던 방학도 훌쩍 짧아져있었다. 세훈은 종인의 감은 눈을 내려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영영 감겨있을 것 같던 종인의 눈이 느리게 뜨였다. 시선이 얽혔다. 종인의 반쯤 뜬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세훈은 어쩐지 갈증이 난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핥았다. 수 차례의 시발점은 닮아있었다. 

몸을 일으킨 세훈은 늘어져 누운 종인의 위로 올라타듯 앉았다. 천천히 허리를 낮추고 입술을 물었다. 입술로 입술을 물면 말랑하고 축축해 기분이 좋았다.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자 종인의 반쯤 뜬 눈이 보였다. 세훈이 웃으며 입술을 떨어뜨리려 하자 이번에는 종인이 조급하게 목을 끌어당겼다. 세훈은 신호처럼 밀어 넣은 혀를 얽으며 티셔츠를 끌어올렸다. 파고드는 손은 그새 배움을 체득해 능숙하게 움직였다. 손끝이 허리를 집요하게 더듬자 종인이 잠이 묻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간지러워..”
“아직도 더워?”
“아니..”
“그럼 해도 돼?”

장난스러워도 좋을 말을, 세훈은 진지하게도 뱉어냈다. 허리께를 더듬던 손은 이제 판판한 가슴팍을 문지르고 있었다. 허리를 저리게 하는 감각에 발끝까지 오므린 종인이 반도 못 뜬 눈을 다시금 내리 감으며 웃었다. 

“뭐 그런 걸 묻고 그래.”

한 번 하고 나니 두 번은 쉬웠다. 다음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미친 것처럼 몰두할 때도 있었지만 극히 적은 횟수였고, 보통은 가벼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지금처럼. 

사실 세훈은 삽입보다 애무에 공을 들였다. 종인이 가진 모든 것이 좋아죽겠다는 듯 일일이 입을 맞추고 혀를 놀리곤 했다. 시간을 길게 들인 애무에 종인은 허리를 뒤틀며 숨을 몰아쉬었다. 탄력 있게 감기는 종인의 허벅지를 잡아 벌린 세훈이 젤을 흠뻑 짜냈다. 긴 손가락을 밀어 넣고 길을 내면서도 세훈은 종인이 느끼는 지점을 정확히 찾아냈다. 손끝의 섬세한 움직임에 종인이 어깨를 떨며 신음했다. 

“이걸로, 이렇게 좋아하면..”
“으응…”
“아무래도, 기분이… 좀…”

젖은 점막이 달라붙는 느낌에 세훈이 말끝을 흐렸다. 인상을 찡그린 세훈의 가는 턱을 타고 땀방울이 떨어졌다. 두 사람의 섹스는 여름이 주는 감각과 닮아있었다. 충분히 넓힌 아래로 발기한 성기를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하자 종인이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종인아..”
“아, 아흐으…….”
“천천히, 천천히 숨 쉬어.”

세훈의 달래는 말에도 종인은 꽉 막힌 숨을 토하지도 못하고 인상을 구겼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이물감은 종인의 머릿속을 쥐고 흔들었다. 세훈은 신음하는 종인에게 다시금 진하게 입을 맞추며 끝까지 깊게 삽입했다.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안이 쿵쿵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종인이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아래로 눈을 내리깐 세훈이 제 위에서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헐떡이고 있었다. 갈증이 인 듯한 세훈의 표정을 보면 종인은 외려 제가 쾌감 속에 놓이곤 했다.







“기분 좋아?”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길게 엎드려있던 세훈이 눈썹을 들며 종인을 보았다. 무슨 말이냐는 듯 반문하는 표정에 종인이 덧붙였다.

“위에서 하는 거.”

무심하게 꺼낸 말에 세훈이 미간을 약간 구겼다. 종인은 느리게 눈을 감으며 베개에 더 깊게 얼굴을 묻었다. 파묻힌 입술이 가뜩이나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더 흐리게 뭉갰다. 

“궁금해..”

눈을 감으니 매미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귀 옆에서 우는 것처럼 쨍쨍한 소리였다. 종인은 몽롱한 느낌에도 천천히 눈을 뜨고 세훈을 보았다. 세훈은 이제 대놓고 인상을 구긴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종인은 조금 웃었다. 이럴 때의 세훈은 정말 애 같다.

길게 늘어졌던 몸을 뒤집어 앉은 종인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쓱쓱 빗어 정리했다. 허리가 찡하게 울리는 느낌에 주먹을 가볍게 쥐고 허리를 두드렸다. 시작부터 당연한 수순처럼 아래에 놓였기에 한 번 물어본 것 뿐이었다. 선택권이 제게 돌려졌어도 고르지 못했을 것 같아,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훈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해 본 말인데. 

종인이 위에서 해보고 싶다는 걸로 알아들었는지, 세훈은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뭐라 대답도 못 하는 심각한 얼굴이 귀엽다고 생각해버린 종인은 터지는 웃음을 눌러 참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보기 드문 것이어서 좀 더 놀려볼까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종인은 세훈의 앞에 마주 앉아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종인의 입가에 머금은 웃음이 터질 듯 말 듯 장난스러웠다. 뚱한 표정으로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는 세훈에게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간 종인이 무뚝뚝한 모양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맞댔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그냥 해 본 말이야.” 

종인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가늘게 접힌 눈꼬리가 선했다. 흘긋거리며 종인을 바라보던 세훈이 무안한 듯 큼큼, 헛기침을 했다. 세훈은 곧 제 다리를 가볍게 두어 번 쳤고, 종인은 세훈의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길게 늘어진 채로 세훈을 올려보았다. 금세 경계심이나 긴장이 없는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종인은 그런 세훈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보며 가볍게 웃었다. 거리가 가까워올수록 세훈이 좋았다. 









21.




8월이 시작된 지 열흘이 지났다. 시간을 더듬어 봐도 남는 것이 잘 없는데 토익 수업은 며칠 전으로 끝이 났다. 출석에의 의무가 사라졌는데도 해방감보다는 아쉬움이 감돌았다. 역까지 종인을 데려다주던 세훈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터였다. 개강까지 얼마나 남았지. 종인은 침대에 길게 드러누워 핸드폰 달력을 확인했다. 대충 2주 정도가 남아있었다. 종인은 몸을 뒤집었다. 차라리 학교 다니고 싶다. 종인은 생각했다. 할 일 하나 없는 집은 심심했다. 그동안 빈 시간을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따라갈 걸 그랬나.

올 여름은 장마랄 것 없이 우기가 짧았고, 날은 타는 듯 더웠다. 종인의 부모님은 약간 늦은 휴가를 떠났다. 가족 휴가라고 내놓은 장소와 날짜에 준면은 곤란한 웃음과 함께 난색을 표했다. 갔다 오면 이래저래 정신없을 것 같아요. 일도 그렇고. 준면의 말에 부모님의 시선은 자연히 종인을 향했다. 종인 역시 별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갈래요. 어머니는 조금 아쉬운 기색을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예정되었던 날짜에 부모님은 집을 비웠고, 그게 오늘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꼬박꼬박 따라갔던 휴가였다. 사실 보충수업에 빠질 명분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기꺼이 따라나섰던 것인데, 이제는 굳이 따라갈 이유가 없었다. 오랜 시간 차 속에 틀어박혀 꽉꽉 막히는 도로에 놓여있는 건 머리가 아팠다. 앞이고 뒤고 벗어날 방법 없는 길은 항상 종인을 지치게 했다. 게다가 이 여름에는 산이고 바다고 어딜 가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종인은 무기력하게 늘어진 몸을 굴렸다. 선풍기 바람을 조절하고는 다시금 몸을 뒤집었다. 안 가길 잘 한 것 같은데 엄청 심심하네.. 종인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몇 번의 터치로 이미 질리도록 한 버블 슈터 화면을 띄웠다. 느릿느릿 깜빡이는 눈과 달리 손끝은 빠르게 움직였다. 거의 기계적인 동작으로 게임에 골몰해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하며 화면을 전환했다. 세훈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습관적으로 말하기도 전에 세훈이 먼저 운을 뗐다.

“뭐해?”
“그냥. 누워있어.”

정말 그냥 누워있던 것을 증명하듯 가라앉은 목소리에 세훈이 픽 웃었다.

“자고 있던 건 아니지?”
“응.”

종인은 질질 끄는 대답과 함께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금 보았다. 벌써 열두 시가 넘어 있었다. 목소리 사이의 간극이 길어지자 세훈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심심해서 전화했어. 혼자 있어?”

음. 준면이 집에 있던가. 종인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놓으며 뉘였던 몸을 일으켰다. 잘 알지 못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 떨어졌으므로 종인은 대답을 미뤘다. 그리고는 물어온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종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약간 갈라져 나왔다.

“오늘 무슨 요일이야?”
“토요일.”

건너편에서 세훈이 낮게 웃었다.

“진짜 감 없네, 김종인. 너 내내 잠만 잤지?”
“아니거든. 넌 뭐해?”

놀리는 듯한 말에 약간 발끈한 종인이 툭 내뱉으며 준면의 방문에 대고 성의 없는 노크를 했다. 노크를 했다고 딱히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바로 문고리를 잡았다. 한 식구로서 노크를 하는 것은 안에 사람이 있건 말건 문을 열겠다는 신호 정도로 그쳤다. 방문을 열자 준면은 옷장 문을 열어둔 채, 가방에 뭔가를 쑤셔 넣고 있었다. 잠깐만. 종인은 수화기에 대고 빠르게 말한 뒤, 준면을 향해 물었다. 

“어디 가?”
“워크샵. 갑자기 이러네.”
“언제 와?”
“가 봐야 알지. 내일 저녁쯤 오려나.”
“잘 갔다 와.”

종인은 빈 손을 대충 두어 번 휘젓고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찾아낸 답을 전달했다.

“형 있는데 나간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갈라졌다. 종인은 방으로 들어가기 전,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우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데 세훈이 뭐라 중얼거리듯 말했다. 물을 마시는 통에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수강신청 얘기였던 것 같았다. 종인은 으음.. 하고 말을 미루다가 생각난 듯 물었다. 

“놀러 올래?”







종인에게는 제법 태연한 척 말했지만 준면은 예상 밖의 전개에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찬열과의 약속까지 꼭 한 시간이 남기고 걸려온 전화는 준면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워크샵 장소를 알리는 전화는 지나치게 급작스러웠다. 말이 돌던 것은 알고 있었는데, 제 위치가 인턴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생각지도 않았다. 갑작스럽게 장소를 통보받고 나자 얼떨떨해졌다. 

뭐 이런 일이 다 있나도 싶었지만 어차피 1박 2일인 워크샵이었다. 문제는 찬열과의 약속이었다. 준면은 간단히 짐을 꾸리면서도 내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찬열은 받지 않았다.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 멘트만 십 수번이었다. 설마 벌써 나가있는 건 아니겠지. 약속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려던 말과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두는 것으로 처치는 마무리 되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하필 그 시각, 찬열이 이미 약속장소에 나가 있던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때마침 배터리가 나간 핸드폰은 일을 부풀렸다. 예상 범위 바깥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찬열은 까맣게 몰랐다. 준면이 상사격인 직원을 제 차에 태우고 용인으로 향하고 있을 때, 찬열은 제 손목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대감은 불안으로 변질되었다. 이럴 사람이 아닌데. 약속 시간을 한참이나 넘긴 시간에 찬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지만 이미 배터리는 나간 채였다. 왜 하필.. 공중전화라던가 하는 것은 이미 유물이 되어 길에서 사라진 채였다. 익명의 누군가에게 핸드폰을 빌린다는 선택지도 있었으나 불행히도 바꾼 지 얼마 안 되는 준면의 핸드폰 번호를 몰랐다. 혹시 제가 자리를 떴을 때 올까봐, 찬열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시간을 보냈다. 손목을 들여다보는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날이 몹시 더웠다. 어디 들어가 있을까 싶기도 했는데, 그러다 혹시라도 못 볼까 싶은 마음에 그러지도 못 했다. 찬열이 굳은 입술을 꾹 다물고 이마를 훔쳤다. 시간이 느리게, 또 빠르게 제멋대로 흘렀다.







용인의 어느 콘도 세미나실에 눌러 앉아 회의록이나 써내려가면서도, 준면의 정신은 다른데 팔려있었다. 그칠 기세를 모르고 이어지는 아이디어 회의 끝에 간신히 숨 돌릴 틈이 왔을 때, 건너편에 앉았던 누군가가 와서 물었다. 준면씨,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네. 준면은 어렵게 웃으며 아니라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인적이 드문 복도까지 나온 준면은 계속해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전화를 다시금 걸어보았지만 받지를 않아서 메시지를 연이어 보냈다. 하지만 이 전의 것도 확인되지 않은 채였다. 준면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졌다. 

주어진 시간 내내 담배 한 대 피우지 못 하고 핸드폰만 쥐고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준면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흘긋 시선을 내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찬열이었다. 준면은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었다. 다행히도 전 시간에 순번이 돌려졌으므로 회의록은 다른 인턴에게로 넘겨져 있었다. 준면은 조용히 의자를 끌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끊길까 싶어 전화를 곧장 받았으나 준면의 입술은 굳어버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여보세요, 하는 흔한 말조차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손끝이 저렸다. 

건너편의 찬열은 어느 건물의 복도에 서 있었다. 때문에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린 지 꼬박 두 시간이 지나고서야 찬열은 자리를 떴다. 미련하게도 찬열은 자리를 떠나면서도 불안해했다. 아무 카페에나 들어가 충전을 맡기면서 찬열은 입술을 물었다. 머릿속을 저리게 하는 짜증이 그저 더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그치질 않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머리를 식힌 찬열은 맡겨둔 핸드폰을 찾아 가게를 나섰다. 전원을 켜자 수십 건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이 준면의 것이었다.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순번이 밀렸다는 이유로 화를 내기에 이미 찬열은 지쳐있었다. 

양 쪽 다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 침묵이 감돌았다. 곧이어 준면이 참지 못하고 흘린 한숨이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그제야 찬열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지친 기색을 품고 있었다.

“전화 했었네요. 배터리가 나가서 몰랐어요.”
“…….”
“핸드폰 이제 봤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찬열은 제 등을 벽에 기댔다. 얇은 티셔츠를 타고 벽의 냉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준면은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말이 쉬이 나오질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찬열이 조금 웃는 투로 말했다.

“연락 없어서 걱정했겠네. 맞죠?”

제 생각의 반경을 읽은 말에 준면이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다행인지 찬열은 제게 틈을 길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미안하단 말은 안 할게요. 저 괜찮아요.”

사과의 말에 대한 언급에 준면이 미간을 구기고 눈을 내리깔았다. 찬열이 앞서 말을 차단한 것은 준면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잘라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준면은 그 사실을 알았다. 밀려버린 순번에 있어 준면은 어떻게 말해야할 지를 몰랐다. 뒤늦게 제 미련함을 탓했다. 급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대고 메시지를 잔뜩 보내두었으나, 정작 연결이 되었을 때 할 말에 대해서는 생각한 바가 없었다. 

네가 중요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 마저도 지나친 것 같아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 머리까지 아팠다. 그래도 역시 할 수 있는 건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그러나 찬열은 다시 한 번 제 할말을 했다.

“형.”
“……응.”
“저 피곤해서 그러는데.. 먼저 끊을게요.”
“찬열아.”

한참 만에 뱉어낸 이름에 찬열이 한숨처럼 웃었다.

“전화 할게요.”

준면의 대답은 상관없다는 듯 전화는 곧장 끊겼다.







길 설명을 유독 대충한다 했더니, 세훈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본 것은 종인이었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있던 종인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제게 걸어오는 종인이 지나치게 편한 차림이라, 세훈은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종인이 약간 인상을 쓰고 물었다.

“왜 웃어.”
“너 자다 나왔지.”
“만나자마자 갈구냐.”
“아니. 귀엽다고.”

손을 뻗어 종인의 뺨을 푹 찌른 세훈이 눈을 재밌다는 듯 활짝 휘었다. 낯간지러운 소릴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하는 통에 외려 종인의 귀가 달아올랐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매미가 울었다. 파고드는 울음소리는 거슬리다가 이내 당연한 소음처럼 자리를 잡았다. 종인의 목소리가 드문드문하게 들렸다. 부모님은 휴가 가셨고, 형은 워크샵 가서 내일 저녁에나 온다고 했다. 종인의 집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는 세훈은 알게 모르게 약간 긴장했다. 친구 집이 비었다고 놀러간 적은 당연히 많았지만 이번에는 기분이 꽤나 미묘했다. 

오토락을 풀고 들어선 집은 여느 평범한 집과 다를 게 없었으나, 세훈은 처음 보는 어떤 것을 대하듯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종인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고, 세훈은 천천히 걸음을 뗐다. 장식장 위에 늘어선 사진이 눈에 띄었다. 언젠가 얼굴을 본 적 있는 준면의 사진이나 부모님의 사진은 많았으나 종인의 사진은 거의 없었다. 몇 년 전쯤 찍었을 가족사진이 유일했다.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지만 좀 더 작고 젖살이 남은 얼굴을, 세훈은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 사진에 눈을 고정하고 있는데, 종인이 다가와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런 거 보지 말고 일루 와.”

종인의 말에도 세훈은 제가 만족할 만큼 사진을 눈에 담은 후에야 종인의 옆에 가 앉았다. 소파에 눕듯 몸을 기댄 종인이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휙휙 돌렸다. 채널을 한 바퀴 쭉 돌려보지만 이 시간대는 영 볼만한 게 없었다. 종인이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물다가 말했다.

“영화 볼래?”
“응, 뭐.”

세훈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종인은 준면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이번에도 세훈은 낯선 어떤 것에 대한 신기함을 담은 시선으로 주위를 쭉 한 번 둘러보았다. 

“니 방이야?”
“아니. 형 방. 뭐 볼래?”

턱짓으로 책장을 가리킨 종인이 물어왔다. 빼곡하게 들어찬 DVD들을 눈으로 살피던 세훈이 십 년은 족히 지난 멜로 영화 하나를 골라냈다. 

“이거 봤어?”
“아니.”
“그럼 이거 보자.”

종인은 사실 영화야 아무래도 좋았으므로 세훈이 고른 영화를 틀었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중반쯤 흘렀을 때, 종인은 거의 졸고 있었다. 그럴 만 했다. 종인은 저를 꼼짝 못 하게 묶어두었으면서도 잔잔하게만 이어지는 영화를 잘 견디지 못 했다.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다가 이내 감겼다. 규칙적으로 내뱉는 숨소리에 세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종인은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세훈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으로 종인의 뺨을 감쌌다. 어두운 피부색이 세훈의 하얀 손등과 대조적이었다. 세훈은 종인의 감은 눈가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더듬었다. 짙은 쌍꺼풀 선이나 도톰한 애교살을 따라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눈가를 꼼꼼히 쓸던 세훈의 손이 입술로 옮겨갔을 때, 종인이 눈을 약간 찡그렸다. 으음.. 하고 목 안으로 앓는 소릴 내던 종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종인이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깬 탓에 가까이 가져간 얼굴이나 손을 치워내지 못한 세훈이 일순 경직되었다. 종인의 눈이 두어 번쯤 깜빡이고서야 세훈이 어색하게 손을 치워냈다.

“깼네.”

손만큼 어색하게 떨어진 말에 종인이 뒤늦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이리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란히 앉은 탓에 시선이 옆으로 비틀린 데다 덜 뜨인 눈이 나른하고 여유로웠다. 습관적으로 윗입술을 한 번 핥은 세훈이 종인의 어깨를 밀었다. 종인의 몸은 힘이 잔뜩 실린 손에 순순히 따라갔다. 종인을 완전히 아래로 밀어 눕힌 뒤, 몸을 타고 올라앉은 세훈이 후, 하고 길게 숨을 토해냈다. 내리깐 눈이 선득한 빛을 내며 종인을 향해있었다. 세훈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입을 맞출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훈의 혀는 종인의 목덜미를 핥아 올렸다. 할짝대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너 때문에 진짜…”

세훈은 여전히 목덜미에 입술을 거의 붙인 채로 말했다. 목소리가 잔뜩 뭉개졌다. 종인은 간지러움에 한쪽 눈가를 찡그렸고, 세훈은 가늘게 숨을 토해냈다.  

“……미치겠어.”

애닳은 목소리에 종인이 입술 끝을 당겨 웃었다. 그리고는 세훈의 몸을 껴안고 티셔츠 위로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바보냐.”

종인의 조근조근한 목소리에 세훈이 푹 웃었다. 그리고는 종인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다가 귓불을 깨물었다. 아아! 갑작스럽게 타고 오는 찌릿함에 종인이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고, 세훈은 벌어진 입술 새로 곧장 파고들었다. 







틀어놓은 영화를 뒷전으로 하고 몸을 부빈 세훈과 종인에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한참만에 고개를 든 세훈은 깜깜해진 바깥에 한 번 놀라고, 시간을 확인한 뒤 또 한 번 놀랐다. 

“너랑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

작게 중얼거린 세훈은 종인의 코 끝에 입술을 가볍게 맞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좁은 소파에서 한참이나 뭉갠 탓에 몸이 구겨진 것 같았다. 세훈은 어깨를 몇 번쯤 돌리고는 목을 뚝뚝 꺾었다. 종인은 세훈보다는 훨씬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세훈을 올려보았다. 세훈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핥고는 가야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시간이 벌써 막차 시간에 닿아있었다.

가만히 시선을 들어 올려 세훈을 보던 종인이 물었다. 

“바빠?”
“아니?”

던져진 말에 세훈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휘며 반문했다. 종인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자고 가.”

여상한 어조에 세훈이 한참동안 종인의 무표정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종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세훈을 올려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한참이나 웃던 세훈이 한쪽으로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리고는 턱을 약간 쳐들고 종인을 내려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 말은 좀 섹시하게 해.”

잠시간 세훈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가늠하던 종인이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세훈은 쿡쿡 웃으며 완전 둔하네 하고 중얼거렸고, 종인은 세훈을 향해 손에 잡히는 쿠션을 집어던졌다. 세훈은 던져진 쿠션을 가뿐하게 잡아챘다.

“와. 오세훈 진짜 변태네.”

종인이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들으란 듯 외쳤다. 그 말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세훈이 다시 소파에 앉아 쿠션을 내려놓고 종인의 팔을 잡았다. 뒤로 물러나던 종인의 팔을 당긴 세훈이 닫혀있던 종인의 입술을 갈랐다. 어. 나 변태 맞나봐. 







준면은 피곤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전화 할게요. 마지막으로 남긴 말과 달리 준면의 핸드폰은 워크샵이 끝나도록 내내 잠잠했다. 한 번 진동이 길게 울려 긴장했으나 그저 광고 전화였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나니 잔뜩 굳었던 것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준면의 생각은 먼저 걸어볼까, 까지 미쳤으나 제가 한 짓이 있어 차마 그러질 못 했다. 신경질적으로 뺨과 턱을 쓸어내리는 하얀 얼굴이 피로로 물들어 있었다. 

겉으로는 꼿꼿하고 태연한 척 하지만, 준면은 사람에게 잘 다치는 성격이었다.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는 영역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찬열이 은연중에 툭툭 말을 던질 때도 알게 모르게 속은 따끔거렸다. 제가 입히는 상처가 더 클 걸 알아서 내색은 안 했다. 그렇지만 이런 적은 없었는데. 속이 꽉 막히고 눌린 것처럼 답답했다. 그러게 왜.. 지난 시간에 후회해도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제게 있어 찬열이 어디까지 침투해있는지도 모른 채, 준면은 핸드폰만 놓았다 쥐었다를 반복했다. 









22.




“자.”

제 앞에 내밀어진 캔에 눈을 들자 경수가 서 있었다. 안 받냐는 듯 다시금 캔을 내미는 손 때문에 얼결에 캔을 건네받았다. 고마워. 씩 웃은 백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경수가 더운지 혀를 길게 빼고 숨을 들이쉬다가 제 것으로 뽑아온 음료수를 땄다. 단 맛을 느끼지도 못하게끔 빠르게 아이스티를 들이킨 경수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물었다. 

“숙제 했어?”
“어. 해보니까 존나 많던데.”
“그래서 오늘 안 나올까 했어.”

책이며 파일 따위를 착착 꺼내놓은 경수가 의자에 가방을 걸었다. 백현은 빈 캔을 구기며 의아한 듯 물었다.

“숙제하기 싫어서?”
“어.”
“와. 도경수 양아치 다 됐네.”

놀리는 투로 말하며 백현이 제 팔을 베고 책상에 엎드렸다. 백현의 말에 절로 피식 웃은 경수는 시계를 한 번 보고 고개를 틀다가 백현의 약간은 그을린 팔뚝을 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은 기억은 경수를 웃게 했다. 엄청난 더위에도 백현은 타박이나 싫은 기색 없이 제게 맞춰주었다. 백현 역시도 충분히 재밌어하는 것처럼 굴었으나, 그것이 배려임을 경수는 모르지 않았다. 그 행동에 대해 미안함을 갖는 것보다는 고마움을 남기는 것이 제게도, 백현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감정을 기반으로 경수는 백현을 전보다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제가 이만한 배려를 받아본 일이 있던가. 꼭 그것뿐이 아니더라도 백현은 제게 있어 행운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가르고 보자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부턴가 백현은 제게 전처럼 부담스럽게 구는 것을 그만 두었다. 사이에 남은 것은 편한 친구로서의 교류 정도로 보아도 무방했다. 경수도 전의 이상기류에 대해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백현의 속은 저로서 알기 힘든 것이었으나 오히려 이 정도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이상적일지도 몰랐다. 같이 학원을 다니고, 평범하게 밥을 먹고 전철역에서 헤어지는 정도. 딱 그 정도의 간섭이 편했다. 다만, 약간의 잔여물은 해소되지 않은 채였다. 술 먹고 잘린 기억이 이런 걸까. 감정적으로는 백현이 들어찼는데, 머릿속에서 생각할 여지를 싹 몰아낸 듯한 느낌이 들어, 약간의 찝찝함이 남은 상태였다. 

아무려면 어떤가. 경수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다. 친구라고 말해도 좋은 거겠지. 경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좁은 침대에 몸을 꼭 붙이고 누운 두 사람은 잠에서 깨고도 한참을 누워있었다. 마주 댄 얼굴의 거리가 가까웠다. 끼우듯 놓은 두 개의 베개가 무색했다. 먼저 깬 쪽은 종인이었으나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세훈이었다.

“잘 잤어?”

방금 막 일어나서인지 목소리가 가라앉아 묘하게 울렸다. 종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쌍꺼풀이 평소보다 진하게 오른 종인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밤새도록 핥고 빤 탓에 부어오른 듯한 입술에 세훈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커튼 새로 들어오는 햇빛이 선연한 낮의 기운을 담고 있었다.

한참 만에 세훈이 머리를 들었다. 종인의 코앞으로 위치를 옮겨간 세훈이 종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찍어 눌렀다. 그리고 혼자 소리죽여 웃었다. 그 웃음에 종인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일어나려는 몸짓을 했다. 세훈이 그런 종인의 허리를 안고 당기는 바람에 자세가 엉성해졌다. 같은 방향으로 누워 세훈이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세훈이 종인의 어깨에 가는 턱을 얹으며 속삭였다.

“어디 가.”
“씻고 올래.”
“왜?”
“…….”
“자고 일어났더니.. 김종인도 변태 다 됐네.”

웃음을 잔뜩 머금은 목소리에 종인의 얼굴로 열이 확 끼쳤다. 세훈의 팔을 풀어내려 몸을 뒤틀어보지만 전해오는 악력이 더 셌다. 종인은 민망해죽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씨. 그런 거 아니야.”
“니가 무슨 생각 하는 지 다 알아. 바보야.”
“…….”
“돌아봐.”
“…키스할거지.”

종인의 웅얼거림에 세훈이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어깨에 턱을 괸 채라 귓가에 웃음소리가 크게 흩어졌다. 세훈은 천천히 몸을 떨어뜨렸다. 팔에 힘을 푼 세훈은 종인이 움직일 틈을 주지 않고 자세를 바꿨다. 몸을 일으키고 허리를 굽혀 종인의 코 앞에 제 얼굴을 가져다댔다. 빠르게 일어난 변화에 종인이 눈을 크게 떴다. 가벼운 불안을 담은 눈에 세훈이 제 긴 눈을 휘었다. 그리고는 전처럼 입술을 가볍게 맞댔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쫄았지.”
“아, 진짜.”

어이없다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뜬 종인이 세훈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이건 사기야. 눈도 제대로 못 뜨고 화장실로 향하며 종인이 중얼거렸다. 뒤따르는 세훈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끊임없이 웃음을 흘려대고 있었다. 







다시금 침대에 늘어져 가벼운 스킨쉽을 하던 세훈과 종인을 깨운 것은 오토락이 해제되는 소리였다. 형인가봐. 보고 올게. 종인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갔다. 현관에 서 있는 것은 의외로 종인의 어머니였다. 

“엄마.”
“아들. 잘 있었어?”
“왜 벌써 와?”

의문과 당혹감이 담겨 다소 뚱하게 뱉어진 말이었지만 종인의 어머니는 현관에 세워둔 쇼핑백을 드느라 어조야 아무래도 좋은 듯 보였다. 

“날씨가 갑자기 흐려져서 비행기 안 뜰지도 모른다길래 바로 올라왔어. 재수도 없지. 종인아, 이거 좀 받아봐.”

내려가자마자 올라오느라 휴가는 엉망이었을 텐데, 그새 어머니는 뭔가 바리바리 사들고 온 모양이었다. 현관에 수북한 쇼핑백을 넘겨받은 종인이 물었다. 아빠는? 사우나 간다더라. 니네 아부지 사우나에 환장하시잖아. 쇼핑백 안을 흘금 들여다본 종인이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납작한 상자들에 찍힌 글자가 끔찍했다. 백련초, 선인장.. 이런 걸 누가 먹지. 종인이 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뭘 이렇게 사왔대.”
“준면이 좀 먹일까 싶어서 이것저것 사다보니 많아졌네. 근데 준면이는?”
“회사에서 뭐 간다던데..”
“응. 밥은 잘 챙겨 먹었고?”

어머니의 뒤를 따라 주방까지 가서야 쇼핑백을 내려놓은 종인이 대충 으응.. 하고 대답했다. 점심도 안 먹었지? 다 안다는 듯 묻는 어머니의 말에 종인은 입을 다물었다. 말할 타이밍을 재던 종인이 친구가 와 있다고 운을 떼려던 차에 세훈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낯선 인영에 눈을 크게 떠보이는 어머니에게 세훈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단정하게 인사했다. 어머니는 곧장 반색을 했다. 준면이나 종인, 둘 다 학교 다니는 내내 친구를 집에 데려온 횟수가 극히 적었기에, 대학생이나 된 아들이 집에 데려와 놀 정도의 친구를 만든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종인에게서 기어이 점심을 안 먹었다는 확인을 받아낸 어머니는 금세 식사 준비를 했다. 

“밥도 안 먹고 뭐 했어, 이 시간까지.”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어.”
“잘한다. 방학이라고 막 놀지.”

의자를 끌며 앉은 종인에게 가볍게 퉁을 놓은 어머니가 세훈을 향해 미안한 듯 눈썹을 뉘며 말했다. 

“반찬이 없어서 어떡하지. 급한 대로 한다고 했는데.”
“아니에요. 저 김치찌개 좋아해요.”
“이름이 세훈이랬나?”
“네. 세훈이요.”

마냥 뻣뻣하게 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눈을 접어 사르르 웃는다. 종인은 그런 세훈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어떻게, 남자애가 이쁘게도 생겼네.”

지나치게 솔직한 감상에 세훈이 어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그런 말을 해. 종인의 타박에 종인의 어머니는 아들 같아서 그렇지, 하고는 뒤늦게 숟가락을 들었다. 그제야 세훈도 숟가락을 들었다. 종인은 먼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든 손이 조금은 무안하다고 생각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하는 인사도 빼놓지 않고 평소보다 의욕적으로 먹는 세훈의 모습은 종인에게도 좀 낯설었다. 어머니가 물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잠시 떴을 때, 종인이 세훈을 향해 소리 낮춰 말했다.

“너 왜 이렇게 내숭 떠냐.”
“잘 보여서 나쁠 거 없잖아.”

태연하게 뱉어지는 말에 종인이 허.. 하고 실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훈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몰랐는데 너 어머니 닮았구나.”
“그렇다고들 하더라. 난 잘 모르겠는데.”
“미인이시네.”

입꼬리를 한 쪽으로 말며 피식 웃은 세훈이 한쪽 볼이 미어지도록 밥을 밀어 넣고 씹었다. 종인의 입에서 다시금 어이없다는 듯 실소가 터졌다.







매일 아침 들르던 카페에 발길을 끊었다. 타의, 아니 상황에 의해 끊겼다고 봐도 무방했다. 차마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도 있지만 처음 맛 본 후회가 너무 진했다. 찬열이 그 때의 기다림에 어떤 의미를 두었는지는 몰랐다. 다만 준면 스스로가 감정에 휩쓸렸다. 죄책감이라면 너무 무겁고 미안함이라면 너무 가벼웠다. 사이의 어떤 것을 규정하기 어려웠다. 규정도 어려운 그것은 준면의 머릿속을 쥐고 흔들었다. 

출근을 위해 역을 지날 때마다 자연히 눈이 갔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시선을 치워냈다. 저 안에 찬열이 있다고 생각하면 한숨이 났다. 인간관계에 있어 직구만 알았던 준면에게는 제법 큰 국면이었다. 신경이 쓰여 죽을 것 같은데도 먼저 다가설 수가 없다. 갑갑했다. 속이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준면은 스스로에게 끝도 없는 질문을 던져보았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깊이 돌아본 적 없던 질문이었다. 찬열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되짚어 내릴수록 준면은 스스로의 잔인한 태도를 절감했다. 기대를 준 것이 나쁜가. 적어도 찬열에게는 나빴다. 처음부터 끊임없이 문을 두드렸던 찬열이었다. 언제 열릴지 모르는 문 앞을 지키는 심정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이런 기분이었나. 

준면은 책상 한 구석에 던져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 한다는 말 이후로 그 어떤 것도 전달되지 않았을 때, 준면은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뇌를 주무르는 무거운 감각에 고개를 숙이며. 그러나 그 인내심은 일주일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옥상에는 몇몇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날이 뜨겁고 햇빛이 따가워 준면은 인상을 구겼다. 처음에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조차 괜한 눈치가 보여 쉽지 않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새하얀 얼굴을 잔뜩 구긴 준면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난간에 올려두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매번 찾아내고 누르고 하는 것이 번거로워 아예 단축번호를 등록했다. 요 며칠, 귀에 못 박히도록 들은 허밍처럼 이어지는 컬러링이 들렸다. 심심하지 말라고 설정해놨나. 준면은 답지 않게 투박한 손가락으로 난간을 툭툭 두드렸다. 

사실, 준면은 자신의 깨진 인내심에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찬열의 질긴 마음에 대해 순수하게 감탄했다. 핀치에 몰린 스스로는 생각보다 한계가 짧고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딱히 완벽을 꿈꾼 적은 없었으나 그에 가깝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물론 어릴 때의 일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마저도 교만이었다. 

한 번이 어렵지, 누르기 시작한 번호는 거의 습관적으로 손이 갔다. 인이 박힌 컬러링이 안내양의 멘트로 넘어가면 다시금 전화를 거는 것을 반복했다. 언젠가 정작 전화를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지를 고민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만두었다. 그건 받았을 때 생각하기로 한 준면이었다. 일단은 닿고 싶었다. 뭐든.

“받으라고.. 좀.”

손목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한 준면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기대는 종종 꺾였지만 순간을 견디는 것은 매번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걸었던 전화도 불통이었다. 준면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칼을 헤집었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보니 제가 올라올 때 보았던 자리의 뒷모습들은 죄 바뀌어있었다. 이런 식으로 눈치 보는 것도 싫은데. 그러나 자리에 앉아서도 시시때때로 핸드폰을 확인할 저 자신을 알고 있었다. 준면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으로 흔들리는 것은 처음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공평하게 친절한 성격이었으므로 대개의 타인들 역시도 준면을 그렇게 대했다. 한 사람에게만 몰리는 감정은 첫 걸음이 버거웠다. 찬열 하나로 일상이 흔들리고, 일상을 넘어 제가 걸어온 길, 그 지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짜증나.. 준면은 눈을 내리감으며 쏟아진 앞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개강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시간이 잘도 흘렀다. 학교라도 가는 게 낫겠다 싶었지만 막상 이 여유가 끝난다는 건 좀 아쉬웠다. 놀러오라는 세훈의 말에 답지 않게 부지런을 떨고 일찍 일어난 종인이었다. 현관에 앉아 컨버스 끈을 다시 매고 있을 때였다. 현관 앞까지 기척도 없이 걸어온 종인의 어머니가 묵직한 뭔가를 툭 내려놓았다.

“이거.”
“아, 깜짝이야.”

종인이 뒤늦게 진저리를 쳤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피식 웃은 종인의 어머니가 다시금 새겨 말했다. 이거 세훈이 갖다 줘. 종인은 신발끈을 매다 말고 뒤를 흘금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올려보았다. 

“이게 뭐야?”
“과일 좀 쌌어. 가서 같이 먹으라고.”

싹싹하게 군 것이 효과가 있었던지, 그 날 세훈이 돌아가고도 어머니는 한참이나 세훈을 주제로 두고 이야기했다. 이것저것 묻는 말에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살살 웃으며 조근조근 대답하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얼굴도 이쁜 게 말도 어쩜 그렇게 이쁘게 하냐는 어머니의 말에 종인은 표정관리를 하느라 애써야 했다. 아무리 봐도.. 속았어. 종인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가져다놓은 봉투를 한 번 들었다가 곧장 내려놓았다.

“뭐야.. 무거운데.”
“어차피 학교 가는 거잖아. 형한테 태워달라고 좀 해.”

종인이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형 있어? 그리고는 몸을 안쪽으로 길게 기울였다. 저 멀리 소파에 익숙한 머리통이 삐죽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종인이 소리를 키워 물었다.

“형 회사 안 갔어?”
“응.”
“쉬는 날이야?”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안 좋다더라. 그렇잖아도 아침에 병원 갔다 왔어.”

어머니의 설명에 종인의 미간이 걱정으로 약간 구겨졌다. 다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준면이 더 빨랐다. 평소보다 조금 피곤한 얼굴의 준면이 현관으로 걸어 나왔다.

“어디 가?”
“학교. 형 괜찮아?”
“응. 멀쩡해.”

준면이야 뒤따르는 질문을 끊어내듯 짧게 일갈했지만, 종인의 미간은 조금 더 깊게 구겨졌다. 준면이 계절을 타느라 밥도 잘 못 넘기는 건 어차피 매년 있어왔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워낙 스스로를 컨트롤하는데 익숙한 터라 가족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털곤 했다.  어머니가 넘기기 좋은 음식을 챙겨주는 정도에 그쳐도 준면은 뭐든 알아서 했다. 보기에는 허약체질 같아보여도 알고 보면 종인보다 더한 강골이었다. 그런데 병원까지 갔다 왔다니. 드문 일이었기에 종인으로서는 마음이 쓰였다. 준면은 그런 종인의 기색을 읽었는지 부러 옅게 웃으며 물었다.

“학교 태워다줘?”
“아냐. 택시 타고 갈게.”

종인의 거절에도 준면은 현관에 놓인 겹겹이 싸인 봉투를 한 번 들어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말했다.

“무겁네. 데려다줄게.”
“됐어.”
“나가는 김에 바람 좀 쐬고 오게. 가자.”

그리고는 금세 키를 찾아서 신발을 꿰어 신었다. 묵직한 봉투까지 이미 챙겨든 뒤였다. 종인은 얼떨떨하게 준면의 뒤를 따라나섰다.  







“세훈이? 맞나..”

앞만 보고 운전만 하던 준면이 느리게 운을 뗐다. 종인은 한참 몰입하던 핸드폰 게임 화면에서 눈을 뗐다. 운전하면서 좀체 말이 없는 준면인지라 종인은 낯설다는 듯 준면의 얼굴을 흘금 살피고 대답했다.

“응.”
“친해?”

뜻 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종인은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친하다는 말이 주는 보통의 뉘앙스와는 다르지만.. 그렇게 말해도 좋겠지. 잠시 생각하던 종인이 대답했다. 

“응.”
“보기 좋네.”

혼잣말처럼 감상을 말한 준면의 얼굴은 약간 까칠해보였다. 종인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숙이고 다시 플레이 화면을 켰다. 준면 역시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입가에 습관적인 옅은 웃음만 띄우고 있었다.

“여기서 어디로 가면 돼?”

정신을 빼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세훈의 집 근처에 와 있었다. 차가 들어가면 나오기가 영 사나운 골목이었다. 종인은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여기서 내릴게.”
“왜. 더 들어가지.”
“금방 가. 내릴래.”
“그래, 그럼.”
“응. 고마워.”

종인이 웃음을 섞어 말하자 준면이 뭘, 하고 피식 웃었다. 힘 빠지게 웃는 얼굴을 보니 종인은 제 속까지도 쓰린 것 같았다. 

“얼른 들어가서 쉬어.”
“어. 잘 놀고 와.”

손을 대충 휘휘 저은 종인이 이내 등을 보였다. 준면은 그런 종인의 등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좀체 닮은 구석이 없어 같이 다녀도 남으로 보는 일이 많았고, 형제라고 해도 종인 쪽을 형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저보다 키도 훌쩍 크고 어깨도 크지만 그래도 제 눈에는 여전히 애처럼 보였다. 겉만 저렇지, 종인의 속이 말랑하고 무르다는 것, 적어도 준면에게는 훤히 보였다. 시간이 주는 간극인가. 준면은 짧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복잡한 자취촌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입보다 훨씬 사나운 길을 돌며 준면은 언젠가 찬열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모르는 척 하는 거죠. 당시에는 세훈을 말하는 것으로 들었고, 사실이 그럴 테지만 이제와 그 말은 준면을 향했다. 제가 떠올린 말임에도 준면은 울컥 하고 치밀어오르는 어떤 것을 참지 못했다. 학교에 오니 찬열에 대한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깨문 입술에 피가 몰렸다. 그래. 모른 척 했어. 알면 귀찮아지니까. 비겁함에 따른 인정은 때로 가혹했다. 갓길에 차를 세운 준면이 못 견디겠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뺨을 한참이나 쓸어내리다가 이내 운전대에 팔을 괴고 고개를 처박았다. 있어온 적 없던 자기혐오가 전신을 휘감았다. 늘 어정쩡하게 거리를 두었던 제 행동이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찬열과 연락이 끊긴지 2주를 채워가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우스운 건 알지만, 찬열이 보고 싶었다.









23.




세훈의 집 오토락은 이제 제 집의 것만큼이나 손에 익었다. 여섯 자리 숫자를 입력하고 나자 찰칵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세훈이 무심한 목소리로 왔어? 하고 물어왔다. 종인은 현관에 앉아 몸을 길게 늘여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세훈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영화라도 보는 모양이지. 세훈은 본 영화를 계속 돌려보는 취미가 있었다. 포갠 다리 사이에 앉아있던 고양이가 인기척에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현관에 앉아 신발을 벗는 종인의 앞까지 와서 몸을 발랑 뒤집었다. 종인은 새하얀 배를 내놓은 고양이를 흘금 보고는 웃었다.

“우유는 무슨, 개가 다 됐네.”

어느새 현관 앞까지 나온 세훈 역시 피식 웃으며 고양이를 내려다보곤 말했다.

“얘 나한테도 안 이러는데. 밖에 덥지?”
“별로. 형이 태워다줬어.”
“아, 진짜?”

별로 놀랍진 않은 말투로 그런다. 끈을 꽉 묶었던 탓에 신발을 벗는데 시간이 걸렸다. 종인이 이제야 신발을 벗어던지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세훈은 허리를 굽혀 처음보다 몸집이 꽤 커진 고양이를 두 팔로 안아 올렸다.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는 고양이의 흰 털을 쓰다듬으며 세훈이 눈짓을 했다.

“그건 뭐야?”

세훈의 시선은 종인의 손에 들린 봉투를 향해있었다. 무겁겠네. 세훈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종인은 퉁퉁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다시금 안으로 말았다. 손에 든 봉투는 냉장고 앞에 툭 내려놓았다. 방 안으로 들어와 펴놓은 이불 위에 드러누운 종인이 그제야 대답했다. 

“엄마가 너 갖다 주래.”
“어머님이?”

얇은 입술에서 나오는 어머님 소리가 꽤나 자연스러웠다. 종인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반문했다.

“우리 엄만데.”
“누가 뭐래.”

실없는 소릴 들었다는 듯 세훈이 피식 웃었다. 털을 실컷 쓰다듬어주고는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자 가볍게 타닥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어린 짐승들은 다 그런지, 세훈의 고양이는 주로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관찰자의 시선을 보내곤 했다. 종인은 고양이가 그리는 궤적을 그대로 눈으로 훑으며 툭 내뱉었다.

“엄마가 너 되게 좋아해.”

종인의 무심한 목소리에 세훈이 눈을 돌려 종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길게 끌며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세훈의 눈에 종인은 늘 귀엽게 보였으나 이런 때, 그 정도는 배가 되었다. 엷게 희석된 질투를 슬쩍 내비칠 때. 

세훈은 걸음을 옮겨 종인이 내려놓은 봉투를 열었다. 꼼꼼하게 싼 과일이 몇 종류쯤 들어있었다. 남자애들이라고 부러 먹기 편한 것을 골라 넣었을 종인의 어머니가 고스란히 그려져 세훈은 웃었다. 어쩐지 형과 닮지 않았다고는 생각했는데, 종인의 외모는 어머니를 꼭 닮아있었다. 

그새 길게 드러누운 종인을 돌아보며 세훈이 물었다.

“씻어갈까? 먹을래?”

머리만 낮게 들어 올려 세훈을 본 종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료한 시선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금 쳐다본다. 습관적으로 게임이라도 하고 있는 거겠지. 세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커다란 보울을 꺼냈다. 스무 살 남자애 자취방에는 없을 법한 물건이었다. 세훈으로써는 처음 사용하는 이런 류의 주방용품은 경수가 사다가 채워둔 것이었다. 사실 세훈이 생각 없이 사용하는 많은 물건들이 경수의 손을 탔다. 세훈은 그 원인을 그저 경수의 꼼꼼함으로 돌리고 있었다. 

보울에 포도나 방울토마토 따위를 한꺼번에 담고 흐르는 물을 한참이고 틀어놓았다. 대충 문지르는 시늉이나 하던 세훈이 아래로 물기를 털었다. 낮은 탁상에 툭 올려두자 드러누워 있던 종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부비고는 무릎걸음으로 와 탁상 앞에 앉았다. 그러자 세훈이 방울토마토 하나를 집어 들고는 종인의 입가에 가져다댔다. 종인이 눈만 아래로 깔아 내밀어진 손을 내려 보았다. 세훈이 입을 열었다.

“아.”

길게 끄는 발음이 종인의 입술이 벌어질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인은 다소 굼뜨게 입을 벌리고 입술에 닿을락말락한 방울토마토를 물었다. 그제야 세훈이 씩 웃으며 제 입에도 포도를 까 넣었다. 한참을 손을 움직이고 입을 우물거리기만 하던 종인이 말했다.

“토마토에 설탕 치면 맛있는데.”
“어. 근데 이렇게 작은 건 그렇게 안 먹지 않나.”
“별론가?”
“글쎄. 일단 설탕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실없는 소리나 주고받으며 커다란 보울을 가득 채운 과일을 먹어치웠다. 말수를 줄이고 먹기만 할 뿐인데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껍질만 남기고 그릇을 텅 비운 세훈과 종인은 이내 배가 부르다며 너나 할 것 없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배불러.”
“응.”
“너네 집만 오면 왜 이렇게 눕게 되냐.”

종인의 투정 같은 말이 지나고 세훈이 생각난 듯 아, 하고 소릴 냈다. 

“너 오면 치킨 시키려고 했는데.”
“이따 먹자.”
“그런 말이 나오냐.”

세훈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어머니한테 감사하다고 꼭 전해드려. 세훈의 말에 종인이 치, 하고 중얼댔다. 니가 울 엄마 아들 해. 그 불퉁한 목소리에 세훈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낯간지럽지만 종인은 알면 알수록 귀여운 면이 있었다. 본인은 알려나. 혼자 입술을 당기고 웃는데, 종인이 몸을 뒤집었다. 

“뭐가 웃겨.”

뚱하니 무표정한 얼굴로 세훈을 내려다본 종인이 머리를 기울여 세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쪽하고 간지럽게 입술이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세훈이 눈을 올려 뜨고 종인을 보았다. 종인의 입술은 여전히 일자로 닫혀있었다. 입맞춤이 거짓말인 것처럼 무뚝뚝한 모양을 한 입술. 세훈이 눈을 몇 번쯤 깜빡이며 종인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기다림을 품고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인은 다시 한 번 가볍게 입술을 맞대왔다. 가볍게 닿는 입술에, 세훈은 종인의 머리를 끌어안고 닫힌 입술 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세훈이는 요즘 뭐 한다던?”

어.. 방금 막 퍼 넣은 밥을 씹지도 못하고, 경수가 우물거렸다. 내색은 안해도 약간은 서운한 듯한 어머니의 얼굴에서 애써 눈을 치워내고는 대답했다.

“공부한다는 것 같던데..”
“얼굴 본 지가 꽤 돼서.. 밥은 잘 챙겨먹나 모르겠다.”
“…….”
“이따가 한 번 가볼까 싶네.”
“그냥 제가 갈게요.”

주소를 모르는 어머니가 날도 더운데 헤매는 것보다야 제가 가는 편이 나았기에, 경수는 역할을 자처했다. 혼자 사는 애가 끼니나 챙기겠느냐며 걱정을 하는 통에 손에 반찬까지 묵직하게 들린 채였다. 

날이 저물어 가는데도 시커먼 아스팔트로 지열이 뜨겁게 올랐다. 경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습관적으로 입술을 핥는 것은 세훈에게서 옮아온 것이었다. 떠올려보면 세훈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 때의 고깃집에서였다. 세훈이 경수의 집에 오지 않은 지는 그보다 오래 된 일이고, 제가 세훈을 찾은 적도 없었다. 의식적으로 챙기는 사이가 아닌 탓에 몰랐다. 애초에 기대 없이 싹 튼 마음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잊고 지낼 수 있나 싶어, 경수는 새삼스레 낮은 충격에 잠겼다. 

몇 년 동안 변변한 친구 하나 없이 대학생활을 했다. 먼저 연락을 하는 살가운 성격씩이나 되질 못했기에 중고등학교 친구들과도 자주 만나지는 못 했다. 지금보다 어린 때의 경수는 사람이란 무릇 다가오는 존재인 줄만 알았다. 고착된 상념은 경험으로 깨졌다. 몇 년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경수는 혼자라는 것은 선호와 비선호의 영역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당연하게 감내할 수 있었다. 다만 외로운 마음이 곪아가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하필 마음에 담은 것은 세훈이었다. 자각했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꺼낼 수 없는 마음은 깊어갈수록 위로보다는 아픔으로 남았다.

상처의 유무조차 잊어갈 무렵, 나타난 것이 백현이었다. 불쑥 나타난 백현은 저로써는 불가능할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익숙지 않은 그 방법이 다른 상처를 낳을 줄 알고 몸을 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두려움은 덜 아문 상처 위로 소독약을 붓는 과정쯤이었을 것이다. 노력 없이 돌아오는 손길과 관심에도 경수는 내내 두려워했다. 시간에 의해 학습된 연상이었다. 그래도 끈질긴 마음에 따라 닫힌 문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아마 잘 된 거겠지.. 경수는 생각했다. 속이 싸하게 아파오는 기분도 들었지만, 이 정도가 좋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걸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경수의 집과 세훈의 자취방은 거리가 꽤나 가까웠다. 그래서 세훈도 기꺼이 경수의 집에 종종 들러 챙겨주는 밥을 먹고 경수와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이마저도 먼 일이 된 것 같아 경수의 입술에서 쓴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여섯 자리의 오토락을 해제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많이 눌러본 것은 아니지만 손에 익은 숫자였다. 생일 일자로 비밀번호를 설정하는 것은 요즘 같은 때에 놀랍도록 단순한 발상이었지만 지극히 세훈다웠다. 

“세후…ㄴ….”

오랜만에 발을 들인 집이었지만, 반가움을 담은 차분한 인사는 입 안에서 삼켜졌다.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 했다. 

바닥에 납작하게 몸을 마주 댄 두 인영에 경수의 걸음이 멎었다. 바닥에 드러누운 것은 세훈이었고, 그 위로 몸을 밀착하고 엎드린 것은 종인이 분명했다. 까맣고 반질거리는 머리카락으로 덮인 뒤통수가 세훈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쪽하고 입술을 부딪는 소리가 낯 뜨겁게 울렸다. 경수의 손끝이 뻣뻣하게 굳었다. 세훈의 손이 종인의 티셔츠를 거의 걷어 올리고 등이나 허리를 쓸어내리고 있던 것도 운이 나빴다. 

종인이 눈을 들어 경수를 바라본 것은 빠르게 일어난 일이지만, 경수에게 그 시간은 영원처럼 아득하게 그려졌다. 종인의 커다란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져 틈을 만들었다. 그것이 당황스러움을 표출하는 기제라는 것을, 경수가 알 리 없었다. 종인의 움직임에 세훈도 고개를 틀었다. 경수와 눈이 마주쳤다. 세훈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안면근육을 많이 쓰지 않아도 드러나는 당혹감이 세훈의 하얀 얼굴을 뒤덮었다. 경수는 그제야 멀뚱히 서있던 제 몸을 틀었다. 신발을 꿰어신자마자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머릿속의 속도를 몸의 속도가 이겨내지 못해 걸음이 비틀렸다. 







밤마저 뜨거운 여름이었지만 경수의 몸은 덜덜 떨렸다. 머릿속은 계속해서 괜찮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몸이 좀체 말을 듣지 않았다. 경수의 입으로 긴 숨이 뱉어졌다. 계절도 잊고 하얀 입김의 궤적이 그려지는 것 같아 경수는 눈을 감았다. 네가 이렇게 놀랄 필요가 없다고 놀란 심장에 대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누군지 확인할 새도 없이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아들었다. 

“뭐 하냐.”

세훈일까, 하고 생각했으나 태연하게 뱉어진 목소리는 백현의 것이었다. 뭘 기대한 거야.. 경수의 입에서 탄식처럼 한숨이 터졌다.

“물어볼 거 있어서. 내일 스터디 학원 수업 끝나고 할 거 같은데 시간 괜찮아?”

입을 열어보려 하지만 소리가 꽉 막혀 나오지 않았다. 침묵을 상황에 대한 의문으로 알았던지, 백현은 민혁이가 낮엔 안 된다고 하던데.. 하고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아마 곤란한 듯 아랫입술을 물고 애꿎은 관자놀이나 뒷머리 따위를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경수는 다시 한 번 숨을 길게 토해냈다. 목소리가 왜.. 나오질 않는 걸까. 길게 심호흡하며 경수가 인상을 구겼다.

“여차하면 민혁이 빼고 시작 전에 할까?”

백현이 질문을 선회해 다시금 물었다. 그러나 경수의 입술에서 터지는 것은 긴 숨뿐이었다. 그 숨소리가 백현의 수화기에서도 가늘게 흩어졌다. 통화음질이 나쁜가. 짧게 혀를 한 번 찬 백현이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안 들려?”
“…….”
“안 들리면 끊을까?”
“…….”
“경수야.”

내내 숨을 고르며 목소리를 내보려 하던 경수가 다시 울컥하고 만 것은 그 이름 석 자의 울림이었다. 이럴 때 제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깨달음이 주는 안온함에 속이 찡하게 울렸다. 갑작스러운 파동이었다. 누구나에게 흔한 일이겠지만 경수에게는 지금의 위로가 중했다. 내내 인상만 찡그리고 있던 경수의 입에서 간신히 대답이 흘러나왔다.

“어…….”

한 음절뿐인 대답은 엉망으로 뱉어졌다. 잔뜩 떠는 목소리에 울음으로 찬 습기가 묻었다. 그 대답에 백현은 귀와 어깨 사이에 댔던 핸드폰을 손으로 옮겨 잡았다. 의아한 듯 인상을 약간 구긴 백현이 곧장 물어왔다.

“도경수.”
“…응.”
“너 무슨 일 있어?” 

처음보다는 많이 진정시킨 대답이라 생각했는데, 백현은 곧장 의문을 품었다. 경수는 쉬이 대답하지 못 했다. 입을 열면 또 덜덜 떠는 목소리가 나올까봐서. 침묵은 누구나에게 불안을 가져올 수 있었다. 백현은 깨물었던 아랫입술을 놓으며, 전보다 조급하게 물어왔다.

“어디냐?”
“어?”
“너 어디냐고.”







지갑 하나만 들고 냅다 택시를 타긴 했는데,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경수의 집이 학교 근처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 개중 다행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백현은 인상을 잔뜩 구기고 다시금 전화를 걸었다. 정확히 어디냐고 묻기는 영 폼이 구겨져서 별로였지만 별 수 없었다. 어디야? 하고 날아가는 것은 역시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백현이 핸드폰을 들었을 때였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왔네.”

뒤에서 들려온 것은 경수의 조용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얼떨떨해진 것은 백현이었다. 

“뭐야. 너.”
“내가 오라고 한 거 아니다. 니가 멋대로 끊었잖아.”

잘은 몰라도 삽질을 하고 만 것이라는 직감에 백현이 흐리게 내뱉었다.

“아씨…….”
“밥은 먹었어?”
“시간이 몇 신데. 먹었지, 당연히.”

백현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경수의 얼굴은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무표정했고, 태도 역시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경수가 앞장서며 말했다. 

“그럼 뭐 좀 마시러 가자. 덥다.”
“너 여긴 어떻게 찾았냐?”
“보통 이쯤 내리잖아. 안으로 들어오자면 멀고.”
“그래. 너 잘났다.”

허탈하게 내뱉은 백현이 경수의 걸음을 따랐다. 경수는 자취촌 바깥으로 걸어 나가 인근 아파트 상가로 들어섰다. 학교 근처에서만 놀고 돌았지, 여기까지 온 건 처음이라 백현은 반걸음쯤 떨어져 잠자코 경수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규모가 크지 않은 카페에 들어선 경수가 묻지도 않고 알아서 주문을 했다. 바쁘지 않은 가게라 음료가 금세 나왔다. 경수가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았고, 백현은 수순처럼 음료를 골랐다. 집어들자마자 스트로우를 물고 쭉쭉 빨아 당겼다. 입 안이 시원해짐과 동시에 잔이 금세 얼음만 남기고 바닥을 보였다. 가게 안이 꽤나 시원해 몸이 금세 식었다. 백현은 흘긋 눈을 돌렸다. 경수의 잔은 아직 반도 못 비운 채였다. 그럼에도 백현은 카페 안에서 흘러나오는 간지러운 음악과 몇몇 여자들의 수다소리를 견딜 수 없다는 듯 굴었다. 시선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경수는 스트로우를 물었다 놓으며 백현에게 물었다.

“나갈래?”
“어.”
“그래. 그럼.”

허락과도 같은 말에 백현이 미련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가 마신 빈 잔과 트레이까지 픽업대에 가져다놓고는 곧장 문을 밀었다. 경수는 덜 마신 잔을 챙겨들고 느리게 백현을 뒤따랐다.

걸었던 길을 따라 되돌아왔다. 두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은 학교 근처의 놀이터였다. 놀이가 필요한 나이는 진즉 지났는데도 어느 대학가에나 놀이터는 있었다. 꽁초와 술병이 굴러다니고 그네 줄이 엉켜있는 것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백현은 개중 깨끗해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경수가 거의 다 마신 음료잔을 내려놓고 앉았을 때, 백현이 경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울었냐?”
“누가 울어.”
“너지, 당연히. 내가 울었겠냐.”
“안 울었어.” 

경수가 짧게 부정했다. 말하진 않겠지만 사실은 울 뻔 했다. 수화기 너머로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가 이상스럽게 다정하게 들려서.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경수가 피식 웃었다. 

“무슨 일 있지, 너.”

백현이 눈썹을 뉘며 심문처럼 물어왔다. 경수는 컵 뚜껑을 열고 얼음을 물었다. 작은 크기의 얼음은 금세 녹아 없어졌다. 백현의 얼굴을 보면 또 이유 없이 울컥하게 될까봐, 경수는 앞만 보고 있었다. 모래 위에 소주병 맥주병 가리지 않고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세훈이가,”

타인의 이름이 경수의 입을 탔다. 그 이름에 백현은 밀랍처럼 새하얀 얼굴을 떠올렸다. 종인의 친구이자 경수의 사촌. 그리고.. 길고 깊은 눈을 사납게 치켜뜨던 그 순간도 동시에 백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좋은 일은 아니겠구나, 하고 예감하며 백현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었거든. 좀 된 일인데.”
“어.”
“그냥, 잘 됐나봐.”

말은 예상 이상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경수의 전달은 그것으로 끝났다. 잘 됐지. 응. 경수는 다짐이나 확신처럼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다. 백현은 잠시 아연해졌다. 

복잡한 심정이었다. 경수에게 있어 세훈은 한참이나 품어온 비밀이었다. 시간에 대해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경수와 같은 타입이 사람을 마음에 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는 대강이나마 넘겨볼 수 있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해줄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머리 굴리는 데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백현은 그간 제가 해온 연애가 다 시간낭비였다고 짤막하게 자조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백현이 입술만 달싹이다가 곧, 경수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접촉에 놀란 경수가 눈을 크게 떴다. 야.. 경수의 입에서 당혹감이 표출될 때쯤 백현이 띄엄띄엄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안 따뜻하지.”

경수의 어깨에 가는 턱을 기댄 탓에 목소리는 귓가에서 흩어졌다. 제가 생각해도 간지럽고 남이 보면 꽤나 우스울 테지만 경수는 안긴 채로 백현의 말을 들었다. 백현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진지하게 울렸다.

“나도 그래. 이렇게 꽉 안으면 되게 따뜻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때늦은 어둠에서 체온보다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된다고, 경수는 생각했다. 백현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은 경수의 동그란 머리통에 닿았고,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서툰 손길이었다. 경수는 그 감촉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침착한 체 해도 멎을 줄 모르고 날뛰던 심장이 평온한 고동을 되찾아갔다. 

“좀 더 예쁨 받고 살아, 너. 그랬으면 좋겠다.”

백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투박하지만 진심으로 닿아오는 말에 경수가 눈을 내리 감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입술로만 말했다. 고마워, 하고.







경수가 그렇게 나가버린 뒤, 세훈과 종인은 머쓱하게 닿았던 몸을 떨어뜨렸다.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종인은 가슴께까지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끌어내리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손으로 빗어 내렸다. 세훈은 몸을 일으켜 앉은 뒤로 내내 말이 없었다.

걱정과 불안이 묻은 얼굴로, 종인이 물었다.

“안 나가봐도 돼?”

그제야 시선을 튼 세훈이 아주 천천히 표정을 바꿨다. 옅게 웃어 보인 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종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었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세훈의 표정도 미묘하게 굳어있었다. 종인은 굳이 지적하지 않고 세훈을 바라만 보았다. 

반면, 세훈은 굳었던 생각을 천천히 회전시켜나갔다. 경수에게 종인의 이름을 입에 올렸던 적은 있었지만 마음이 닿은 사실까지는 알리지 않았다. 그간 제가 담은 많은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던 대상이 경수였음을 떠올린 세훈은 뒤늦게야 깨닫고 있었다. 그간 경수에게 소홀했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사실 세훈은, 경수뿐만 아니라 종인을 제외한 모든 것에 소홀해지고 있었다. 







준면은 소파에 길게 누워있었다. 제습으로 맞춰놓은 에어컨 바람이 적당히 시원하게 돌았다. 부모님은 부부 동반 모임에 간다며 집을 비웠고, 종인은 아마 외박을 할 것이다. 옅은 잠에 빠져있던 준면을 깨운 것은 핸드폰의 요란한 진동이었다. 미간을 약하게 구긴 준면이 팔을 길게 뻗었다. 쳐다보지도 않고 테이블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급한 전화가 아니면 받지 않을 참이었다. 반도 못 뜬 눈으로 액정을 확인한 준면의 몸이 빠르게 반응했다. 몸을 벌떡 일으킨 준면의 눈이 잔뜩 구겨진 채로 깜빡였다. 찬열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잠긴 목소리로 급히 운을 뗐다. 앞뒤 잴 것 없이 터진 말이었다.

“야, 너..” 

아. 준면은 아직 혼곤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꼬박 2주가 넘도록 연락이 없던 찬열이었다. 내내 머릿속이 타들어가도록 전화를 기다린 준면이었지만, 전후 상황을 생각하면 제가 몰아붙이고 탓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준면은 후,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놀란 속을 다스리며 흥분을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너 어디야.”

잔뜩 애쓰며 뱉어낸 말이 무색하게 찬열은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집이요. 무슨 전화를 이렇게 무섭게 받아요.”

그리고는 낮은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정말, 찬열이 맞았다. 준면은 애를 태우며 연락을 기다리고, 핸드폰에 불이 나도록 전화를 걸었던 최근의 날들을 생각하며 다시금 숨을 몰아쉬었다. 찬열의 태연한 목소리에 원인 모를 부아가 치밀었다. 안도보다 화가 앞섰다. 제가 화를 낼 입장이 아닌데도 그랬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 지 몰라 호흡만 고르는데, 찬열이 물어왔다. 

“가게는 왜 안 와요. 기다렸는데.”

약간의 투정을 섞은 찬열의 말에 준면은 열려던 입술을 다시금 닫았다. 전화를 그렇게 걸면서도 해줄 말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찬열은 제 예상과 다른 전개를 펼치고 있었다. 준면은 어디서부터 물어야할 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요즘 바빠요?”
“…아니.”
“많이 바쁜 거 아니면 내일은 들렀다 가요. 얼굴 좀 보고 싶어요.”

찬열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몇 주 만에 와서는 곧장 저를 끌어당기는 찬열의 목소리에 준면이 힘 빠진 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사실은 끌려가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가. 









24.




앞만 보고 빠르게 움직이는 인파에서 망설이는 것은 준면 하나였다. 찬열이 있는 곳에 가까워질수록 걸음은 느려져갔다.

저를 향해있던 그 맹목적인 감정의 주도권은 사실 찬열에게 있었다는 것. 그 열렬함 앞에 제 역할은 몹시 한정적이었다.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준면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제가 가졌다고 믿고 있는 그 사랑이라는 것은 사실 온전히 찬열의 것이었다. 

그것은 준면을 분하게 했다. 제 것인 줄로만 알았던 형태 없는 감정이, 사실은 제게 영향을 미치지 못 한다고 생각했던 그 어떤 것이 저를 쥐고 흔든다는 것. 있어온 적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조용한 아침의 첫 손님은 준면이었다. 준면이 문을 열었을 때, 찬열은 무료하게 카운터에 기대어있었다. 일부러 할 일을 다 뒤로 미뤄둔 채로 준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올 시간이 다 됐는데.. 찬열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도어벨 소리와 함께 준면이 들어섰고, 소리와 기척은 다소 멍하게 기다림만을 놓고 있던 찬열을 깨웠다. 형. 찬열이 반가움을 담아 준면을 불렀으나 곧 눈빛에 당혹감이 번졌다. 

문가에 서서 찬열을 빤히 바라보고 선 준면의 얼굴에 녹일 수 없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찬열은 의아한 듯 준면을 보았다. 왜 그러고 있냐고 말하려던 찰나, 준면이 입술을 깨물었다. 햇수로 5년을 알아왔지만 준면의 저런 얼굴은 처음 보는 터라, 찬열이 할 말을 잃고 방황했다. 준면은 뭔가 뺏긴 것처럼.. 분한 어린 애 같은 표정을 하고 찬열을 보고 있었다. 올려 뜬 눈과 뉘어진 눈썹. 입술까지 꾹 깨물고서는. 

“왜 그러고 있어요.”

당황한 기색을 지워내며 찬열이 달래듯 웃었다.

“오다가 뭐, 열 받는 일이라도 있었어요?”

일부러 가라앉은 목소리를 높여도 보았다. 준면은 꿈쩍 않고 억울한 얼굴로 찬열을 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닫혀있던 입술이 움직였다. 

“왜..”
“네?”
“왜 연락 안 했어.”

찬열의 얼굴에 찰나의 의아함이 떠올랐다가 이내 그것은 당혹감으로 변질되었다. 몰랐나. 설마. 찬열의 입술 새로 어.. 하는 중얼거림이 흘러나갔다. 준면은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도 않고 찬열을 노려보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걸까. 준면의 곧은 시선에서 눈을 치워낸 찬열은 말을 골라내기 위해 애써야했다. 저도 모르게 잘 손질된 뒷머리칼에 손이 갔다. 어디부터 말해야 되는 거야. 

아팠던 사실부터 알려야 하는 걸까. 찬열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나갔다. 그럼에도 커다란 그림이 한꺼번에 그려지지 않았다. 사실만 놓고 말하자면, 아팠다. 갑작스럽게 병이 났고 열흘 정도 입원을 했다. 그러는 동안 연락을 못 했다. 저 조차도 정신이 없었으므로. 그래도 어차피 매일 아침 카페에 들르는 걸 알았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장은 나이차가 많지 않은 형이었고, 그가 준면에게 간략한 사실 정도는 전달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준면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제가 없는 동안, 가게에 발을 전혀 들이지 않았던 걸까. 대체 왜. 찬열은 제가 아는 그림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초조함에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일단 오해를 좀 풀자. 찬열은 생각했다. 누구 하나 잡을 것처럼 사람을 노려보고 선 준면은 제 눈에야 귀엽지만, 약간 무섭기도 한 게 사실이었다. 누구에게나 공명정대하고 친절한 얼굴만 보이던 사람이었다. 저렇게 서슬 퍼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 제 눈에야 사탕 뺏긴 어린애나 진배없긴 하지만. 

형. 찬열이 곤란한 얼굴로 웃으며 준면을 불렀다. 그리고 다시금 시선을 맞댔을 때, 찬열은 다시 당황했다. 준면이 울 듯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그래도 끝내 울진 않는다. 새하얀 얼굴은 잔뜩 구겨진 채였다. 힘을 준 눈이 벌겋다. 꾹 다물린 입술 새로 분한 목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너..”

아. 한 마디만 더 하면 울지도 모르겠다. 찬열의 머릿속으로 불안이 스쳤다. 물론 준면이 우는 것은 분명 드문 광경이겠지만 지금 보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일단은 아침이었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상부터 구긴 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찬열은 준면의 말을 빼앗으며 부러 쾌활한 척 웃었다.

“좀 아팠어요. 급성 전정염이라고 들어는 봤어요?”
“…….”
“이름이 하도 살벌해서 죽을 병인줄 알았다니까요.”

찬열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도 준면은 힘 준 눈으로 찬열을 올려보고만 있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어떻게든 터져버릴 것처럼. 찬열은 그런 준면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아,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는 카운터를 돌아 나와 천천히 준면의 앞에 다가가 섰다. 준면은 꾹꾹 눌러 참은 울음을 삼키는 듯한 표정으로 찬열을 올려다본다. 그 시선에 찬열의 오감이 긴장했다. 처음 준면을 마음에 들였던 것처럼,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아. 어쩌면 이 사람은,

“……걱정했잖아.”

나를..







다시 오지 않을 시간에 있어 한 사람만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 아직은 먼 날을 넘겨보면 가혹할 수 있는 일이었다. 후회할까. 세훈은 종인이 잠들고도 한참을 생각했다. 파란 새벽이 찾아들 때까지도 세훈은 몸을 뒤집으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열 오른 종인의 몸을 더듬고 있을 때, 경수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이 떠올랐다. 놀랐겠지. 알고는 있었으나 경수를 따라나가는 것보다 종인을 안심시키는 편을 택했다. 감정의 경중을 매긴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독이 될 수 있었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시작부터 알고 있었다. 깨지지 않는 견고함과 지켜왔던 평정을 원했다면 시작부터 말았어야 했다. 스스로가 정한 일이었다. 규정 이후에 남는 과정은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는 것이었다. 저답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역시 종인이 좋았다. 어렵게 닿은 마음이었다. 

세훈은 가능한 깊게, 그리고 오래 종인에게 녹아들고 싶었다. 마음의 끝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현재로써 미래에 대한 기원은 그 하나였다. 후회하지 말자. 세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든 종인의 뺨을 쓸어내리고 눈을 감았다.

“아까 저 여자 봤어?”
“아니?”

종인이 웃음을 듬뿍 섞어 꺼낸 말에 세훈이 빠르게 두 번쯤 눈을 깜빡였다. 입술의 반응은 빨랐지만, 회상에서 방금 막 깨어난 눈은 느리게 움직였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빨간 줄 생겼어. 베개 잘못 베고 잤나.”

손가락으로 이마에서 뺨까지 길게 가리켜 보인 종인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 못 봤는데. 세훈이 다소 굼뜨게 중얼거렸다. 종인은 세훈의 얼굴을 흘긋 들여다보았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모양새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세훈은 좀처럼 타인을 보는 일이 없었다. 세훈이 지난 밤의 기억을 더듬고 있던 것을 알 리 없는 종인이 타박하듯 웃었다. 

“너 대체 뭘 보고 다녀?”

정신 좀 차리라는 듯한 어투에 세훈이 눈만 멍하니 깜빡이다가 이내 슬핏 웃어보였다. 

“너.”

대답을 바라지 않은 질문에 간지러운 답을 내어놓으면서도, 세훈은 얼굴조차 붉히지 않았다. 순도 100%짜리 진심이었는데, 듣는 종인의 얼굴만 홧홧하게 달았다. 민망하고 창피해진 종인이 아, 진짜.. 하고는 혼자 걸음을 빨리했다. 세훈은 멀뚱히 서서 종인의 빠른 걸음을 눈으로만 쫓고 있었다. 저만치 앞서 간 종인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민망해죽겠다는 듯 인상을 한 번 찡그렸다 펴면서 중얼거렸다.

“바보냐, 진짜.”

간지러운 말을 못 참겠다는 듯한 그 반응에 세훈이 눈을 휘어 웃었다. 역시, 종인의 웃음이 저를 향하는 순간이 좋았다. 후회하지 말자, 지금에. 세훈의 다짐은 확고했다. 세훈은 종인의 앞선 걸음을 따라잡았다. 걸음을 멈추고 기다린 종인이 손을 뻗어 세훈의 뒷머리칼을 가볍게 헤집었다. 기분 좋게 웃어 보인 세훈이 이어폰 한 쪽을 건넸다. 같이 듣자. 세훈의 말에 종인이 피식 웃으며 건네받은 이어폰 한 쪽을 귀에 꽂았다. 







낮 시간 내내 준면은 애꿎은 관자놀이만 꾹꾹 누르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터질 것 같은 고민이 머릿속에 꽉 눌러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알고 있었다. 제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 타인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이, 반드시 풍덩 빠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준면은 저도 모르는 새에 오랜 시간동안 천천히 물들어갔다. 이제와 제가 길들여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울 수 있었다. 준면은 스스로를 판단과 그에 따른 선택이 빠른 사람이라고 믿었다. 확신이 깨지는 것은 두려움과 직결되었다. 사실이야 어쨌건, 그간 얼마나 조급하고 애가 탔던가. 마음의 행방은 정해진 터였다. 다만 발을 들인 적 없는 세계로의 한 걸음이 어려웠다. 

퇴근 후에 발을 들인 넓지 않은 밥집 한 구석에 찬열이 앉아있었다. 씨근거리는 저를 달래듯, 이따 천천히 얘기하자던 찬열이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더니, 재미있을 것도 없는 평일 저녁 프로그램을 보느라 긴 다리를 쭉 뻗고 고개까지 꺾었다. 커다란 눈이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준면은 신발을 벗고 올라서 찬열의 맞은편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단정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제야 준면이 온 것을 확인한 찬열이 자세를 바꿔 앉으며 웃었다.

“왔어요?”

헤실거리며 웃는 얼굴이 기분이 좋아 보여, 준면도 옅게 따라 웃었다. 사실은 약간 억울한 기분마저 들어 부러 오늘은 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심 없이 웃는 얼굴 앞에는 또 무너지고 만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준면은 제 앞에 놓인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고, 찬열은 그런 준면에게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 

“맘대로 시켰는데 괜찮아요?”
“응.”

대답과 동시에 벽에 걸린 메뉴판을 쓱 훑었다. 뭘 시켰는지 알 법한 단촐한 메뉴 구성에 준면이 눈을 돌렸다.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찬열은 항상 웃는 얼굴이긴 하지만, 유난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준면이 내내 지끈거리는 머리와 감정을 두고 사투를 벌일 때, 찬열은 얻어낸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꺾일 줄만 알던 기대와는 달랐다. 찬열의 결론을, 준면이 당장 말하지 않더라도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찬열이 미리 주문해두었던 낙지볶음이 상에 놓였다. 준면이 찬열의 앞에 수저를 놔주다가 눈을 들어 찬열을 보았다. 기분 좋은 기색을 좀체 감추질 못하는 얼굴에 준면이 약간 뚱하게 물었다. 

“왜 웃어?”
“좋아서요.”

찬열이 씩 웃었다. 눈매가 선하게 접히는 모양에 그래, 웃어라하고 불퉁하게 속으로만 말해보았다. 이제 와서 왜 잠수를 탔고, 전화는 왜 안 받았느냐는 추궁을 해봤자 지치는 건 제 쪽임이 자명했다. 죽은 게 아니었으니 됐다. 얼굴을 보고 나니 거짓말처럼 진정이 됐지만 앙금은 남아 있었다. 혼자 가볍게 투덜댄 준면이 젓가락을 들었다. 먹자. 식는다. 그렇게 말하며 준면이 젓가락으로 시뻘건 낙지볶음을 뒤적였다. 허연 김이 뽀얗게 올라왔다. 준면이 밥 한 술을 막 떠 넣었을 때, 준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찬열이 말했다. 얼굴 가득 만연한 웃음을 띄우고.

“형은 언젠가 날 좋아하게 될 거예요.”

입안을 가득 메운 밥알을 우물거리던 준면이 눈을 들어 찬열을 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시럽에 푹 적신 듯한 표정이었다. 저를 바로 보며 눈을 휘는 찬열의 시선에 약간 민망함을 느낀 준면이 눈길을 급히 돌렸다. 무슨 자신감이야 그거. 준면은 괜스레 물수건을 옆으로 치워내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대답을 바란 말이 아니었는지, 찬열은 슬핏 웃는 얼굴로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내가 좋아하니까.”

그리고는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깐 찬열이 천천히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맛있어요? 처음 와봐서 나도 잘 모르는데. 찬열이 젓가락을 놀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답이 없자 다시금 눈을 들었다. 시야에 들어찬 것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당황스러워하는 준면의 모습이었다. 정작 부끄러워야 할 건 찬열인데, 준면의 얼굴이 달아있었다. 찬열이 눈을 활짝 접었다.

“어? 얼굴 빨개졌다.”

놀리듯 웃는 찬열의 말에 준면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 듣는 고백도 아닌데, 주체 못하게 멍청할 제 얼굴을 보여주기가 창피해서였다. 







긴 낮이 지나고 어둠이 찾아들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들었다. 경수는 제 부름에 공원까지 끌려나온 백현에게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혼자 오기는 좀 그래서.”

백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은 아주 시원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맞을 만 했다. 여름밤답게 주변은 사람으로 들끓었다. 열대야를 견디기 위해 사방이 트인 곳을 찾는 것은 모두의 본능과 같았다. 강물에 낚싯대를 놓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산책을 나온 사람도 있었고 그저 온통 사람이었다. 생각만큼 한적한 광경은 아니라, 확실히 혼자 오긴 좀 그렇겠다고 백현은 대강 수긍했다. 

정작 저를 불러낸 경수는 굳이 이 곳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던지, 그나마 사람이 적은 안쪽까지 걸어들어 가서야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경수의 걸음에 맞춰 걸으면서 백현은 길게 펼쳐진 강을 바라보았다. 수면 위로 주황색 불빛이 번졌다. 낮에는 그저 더러울 뿐인 강물도 어둠에 잠기니 쓸 만했다.

앉고 나서도 한참이나 말이 없는 경수를 향해, 백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좀 괜찮아?”

무덤덤한 말에 경수가 시선을 틀어 백현을 바라보았다. 백현의 뭉뚱그린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세훈에게 연락이 온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제가 먼저 닿을 노력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경수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백현이 마른 입가를 쓸며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백현은 여자를 사귀면서도 알지 못했던 모종의 배려나 관심을 배워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그 사실을 경수가 알길 바랐다.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은 아무래도 좀 공허하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백현이 약간 민망해져 괜히 휘파람을 불었다. 바람 새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어둠과 불빛에 잠긴 강을 가만히 바라보던 경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백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너 나 좋아해?”

차분한 목소리에 백현이 흘긋 눈을 돌렸다. 까맣고 큰 눈동자에 백현이 가득 담겼다. 백현은 경수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
“다르게 물어봐야 되는 건가. 이성적으로 생각해?”

경수의 어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진중했다. 조금은 가벼워도 좋으련만. 백현은 가는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러면서도 경수의 단정한 얼굴에서는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한참이나 생각하던 백현이 짧은 결론을 내놓았다.

“아니. 아직은.”
“그래.”

그걸로 됐다는 듯, 경수가 씩 웃으며 시선을 거뒀다. 다시금 펼쳐진 강을 들여다보았다. 딱히 의미가 있어서 둔 시선은 아니었지만, 낮과 밤이 유독 달랐다. 검은 밤과 이지러지는 불빛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곤 했다. 경수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백현은 초조함 없이 정적을 견디고 있었다. 가는 숨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의 잡음은 그들을 현실로 데려다 놓았다. 

붙들고 있던 시간을 놓으며, 경수가 입을 열었다.

“전에 했던 말, 아직이야?”
“뭐가.”
“너로 하라며.”

갑작스러운 말에 백현이 눈을 크게 떴다. 감출 새도 없이 변하는 표정에, 경수가 입술 끝을 당겨올리며 말했다.

“안 늦었으면 너로 할게.”

백현의 얼떨떨한 시선에도 경수는 여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잘 부탁해.”

그리고는 질리지도 않는 지, 다시금 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현이 놀라 벌어진 입술을 수습하듯 깨물고는 허, 하고 웃었다. 

경수는 잠잠한 수면 위로 지난 날을 그렸다. 지금의 결정이 이기적인가도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조금은 편안해질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이겼다. 확률 없는 마음은 깊이 묻어두어도 좋겠다고, 혼자는 어렵겠지만 같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경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25.




개강을 앞두고 며칠간 내도록 비가 내렸다. 

“자고 가.”

세훈의 무덤덤한 말에 종인이 실소하듯 웃었다. 
너나 섹시하게 해, 그런 말. 

그러면서도 종인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세훈이네 있어. 비 많이 와서. 응. 자고 갈게요. 띄엄띄엄 이어지는 말은 낮고 느렸다. 종인이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동안, 세훈은 옆으로 누운 종인을 끌어안고 허리 부근을 매만지고 있었다. 규칙적인 손길로 어두운 피부를 쓸어내리던 중이었다. 세훈에게 등을 내맡긴 종인이 옅은 웃음을 섞어 말했다. 귀찮게 하는 거 아니야. 금방 가요. 듣지 않아도 오가는 말이 훤히 읽혔다. 종인의 대답에 세훈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곧이어 내내 차분한 손이 종인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아. 맞닿은 종인의 몸이 움찔 떨렸다. 흡, 하고 숨을 몰아쉰 종인은 끊을게요, 하고는 급히 통화를 종료해야 했다.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는 엄지와 검지로 제 유두를 비틀고 누르는 세훈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와 심술이 묻어있었다. 

“금방 갈 거야?”
“아이씨.. 말이 그렇다는 거지.”

종인의 말은 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손끝으로 유륜을 덧그려 매만지던 세훈이 입술 끝을 슬쩍 당겼다. 그리고는 종인의 몸 위로 올랐다. 닫혀있던 입술을 가르고 깊이 파고들었다. 세훈의 혀는 능숙하게 자리를 알고 움직였다. 연애도 안 해봤다면서 키스는 어디서 배웠는지. 종인은 때로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며 종인이 세훈의 마른 등을 쓸어내렸다. 천천히 타고 내려온 세훈의 손이 종인의 허벅지 안쪽을 더듬었다. 체온 높은 부드러운 살결을 매만지던 손은 때때로 속옷 위로 불룩 솟은 종인의 성기로 향했다. 집요한 손길에 종인이 목 안으로 우는 소리를 냈다. 

“비 오니까.. 좋네.”

입술을 떨어뜨린 세훈이 가벼운 흥분으로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종인은 가늘게 뜬 눈으로 세훈을 올려보았다. 세훈의 발간 혀가 윗입술을 날름 핥았다. 평소엔 얼어붙을 듯 찬 눈빛인데 이럴 때는 포식자의 눈 마냥 열기를 띠곤 했다. 떼었던 세훈의 긴 손이 이번에는 종인의 속옷 안으로 들어갔다. 부풀어 오르는 성기를 문지르며 세훈이 말했다. 

“금방 간다느니, 그런 말 내 앞에서 하지 마.”
“그냥, 말만 그러는 거.. 윽.. 알잖아.”
“그래도.”

세훈의 애무는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 큰 손 안에서 종인의 성기가 아플 정도로 부풀었다. 사실 닿아오는 손길만큼이나 신경 쓰이는 것은 세훈의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바깥이 어두웠지만 안은 훤히 밝았다. 훤히 드러난 맨몸은 새삼스럽게 종인을 부끄럽게 했다. 

“불 좀 끄고 와..”

평소보다 톤이 높게 뱉어진 달뜬 목소리에 세훈이 즐거운 듯 웃었다. 

“신경 쓰여?” 

종인이 세훈의 곧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인은 뜨겁게 열 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걸친 것이 없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다. 세훈 역시도 하얗고 단단한 몸을 드러낸 채였다. 그러나 세훈은 훤한 조명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찰나의 방해도 허락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예뻐. 괜찮아.” 

짤막한 말만 남기고 다시금 입 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그러니까 뭐가 괜찮다는 거야. 종인이 인상을 구겼지만 세훈은 개의치 않고 혀를 움직였다. 종인의 탄탄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세훈이 부러 아래를 밀착해가며 허리를 움직였다. 비벼지는 아래가 노골적이었다. 이미 부풀어 오른 종인의 성기가 계속되는 자극에 경도를 더했다. 목 안으로 우는 시간이 늘어가자 세훈의 잘생긴 눈썹이 뉘여졌다. 남는 베개를 끌어다 종인의 허리에 받쳐준 세훈이 젤을 흠뻑 짜냈다. 길을 내는 손길은 조급함을 억누르고 있었다. 긴 손가락으로 예민한 점막이 달라붙었다.

“넣을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지만 세훈은 팽팽하게 당겨진 허리를 신호로 알았다. 양손으로 종인의 허리를 잡은 세훈이 처음부터 꽤 깊게 삽입했다. 몰아쉬는 숨소리가 높아졌다. 아무리 한 대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이물감에 종인이 깊게 인상을 찡그렸다. 흠뻑 젖어 있는 탓에 아픔은 덜했지만 그래도 빡빡하게 느껴졌다.  

종인의 답답함을 알고 있다는 듯, 발그랗게 달아오른 눈가에 세훈이 입술을 맞댔다.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자 종인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안에서부터 조여드는 감각에 세훈이 몸을 잘게 떨었다. 하얗게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좀 더.. 더 조여봐. 세훈이 반쯤 이성을 잃고 중얼거렸다. 씹어댄 입술이 붉었다. 종인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세훈의 요구에 부응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좁은 입구 너머의 끝까지 삽입하고서야 세훈이 몸을 낮춰 키스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입맞춤 속에 종인이 목 안으로 신음했다. 아… 으응……. 거센 허리짓에도 세훈의 키스는 상냥하고 정중했다. 

“아, 흐윽… 흐으…”

한참이나 말없이 이어진 허리짓에 종인의 입술을 비집고 거의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억눌린 신음과 낯 뜨겁게 끈적이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세훈은 종인의 단단한 성기를 쥐고 흔드는 속도를 높였다. 비벼지는 속도와 열기에 종인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래에 힘을 세게 주는 순간, 세훈의 꾹 다물린 입술에서도 신음이 샜다. 단단한 몸은 물론, 내리감은 눈, 긴 속눈썹까지도 가늘게 경련했다. 완전히 가는 세훈의 얼굴은 꽤나 근사했다. 찡그린 미간과 벌어진 입술이 사정의 쾌감과 여운까지 전했다. 세훈과 거의 동시에 종인 역시 사정했다. 배 위로 희뿌연 정액이 뿌려졌다. 종인은 부끄러움도 잊고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끝까지 사정했다. 끝까지 기다린 세훈이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뒤가 열리고 점막까지 딸려나가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은 종인의 입술 새로 들뜬 신음이 비집고 나왔다.







“창문 열면 안돼?”
“왜.”
“빗소리 듣고 싶어서.”

더운 거 잘 참지도 못 하면서. 세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도 일어섰다. 벗은 상박에 옅은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종인이 낸 흔적이었다. 세훈은 버티컬을 걷고 창문을 한 뼘쯤 열었다. 시원하게 때리는 빗소리와 함께 물 냄새가 훅 끼쳤다. 창틀에 걸터앉아있던 고양이가 훌쩍 뛰어내려왔다. 고양이가 물을 싫어한댔나. 누워있던 종인이 몸을 뒤집었다. 벗은 몸 위로 덮여있던 얇은 이불이 구겨졌다. 엎드려 팔에 얼굴을 묻고 누운 종인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좋다.”

돌아와 종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세훈이 슬핏 웃었다. 그리고는 종인의 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을 스쳤다. 

“이제 진짜 방학도 끝이네.”
“시간이 너무 빨라.”
“그러게.”

종인의 말처럼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흘러다녔다. 벌써 개강이었다. 

비만 쏟아지던 날들이 무색하게 날이 훤히 갰다. 다시금 뜨거워진 해가 지반을 달궜다. 방 안에만 갇혀 있어 괜히 바깥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방학 때와 달리 꽉 찬 학교도 약간은 어색했다. 햇빛은 여전히 쨍하고 날짜만 바뀐 여름도 여전하지만 세훈이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종인이었다. 그늘에 바짝 붙어 걸으며 종인이 중얼거렸다.

“가기 싫다.”
“멀어서?”
“응.”

학교와 집을 오가려면 꼬박 한 시간 동안 전철을 타야했다. 기숙사 신청을 깜빡한 종인은 꼼짝없이 통학을 하게 되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 갇혀있으면 꼭 잠이 들었다. 고개를 떨구고 자다 깨고 또 잠드는 것을 반복하는 것도 한 두 번이었다. 가기 싫다는 말이 헛투정은 아니었다. 종인의 쭉 내민 아랫입술을 보던 세훈이 제 입술도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 쭉 내밀었다.

“좀 섭섭하네.”

세훈의 얇은 입술이 삐죽였다.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한 종인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뭐가?”
“이럴 땐 간지러운 말도 좀 해봐.”

A to Z로 말하진 않았지만, 제 말이 민망했던지 세훈이 눈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자주하라곤 안 하잖아.”

변명이랍시고 붙인 말까지도 민망한지 세훈이 아, 하고 괜히 목을 썼다. 그리고는 미치겠다.. 하고 중얼거리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도무지 가만있질 못했다. 새하얗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떠오른 것이 더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안 종인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속을 읽었다는 듯 차분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너랑 있고 싶어.”

더없이 진지한 어조로 흘러나온 말에 세훈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종인은 곧장 혀를 차고는 덧붙였다.

“이런 거? 징그럽게.”
“뒷말까진 하지 말지.”

세훈이 인상을 한 번 찡그렸다가 이내 입술을 당겼다. 종인은 대답 대신 장난처럼 웃어보였다. 사실, 진심을 담은 말이었으나 꺼내놓고 나니 심장 언저리까지 간지러웠다. 그래서 농담으로 덮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종인은 괜히 입술 근처를 쓸어내렸다. 벌써 긴 여름 해마저도 떨어져있었다. 시간을 한 번 확인한 종인이 입술을 핥았다. 시간 진짜 빠르네.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역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옆에서의 걸음이 어쩐지 느려진다 싶었는데, 세훈이 걸음을 멈췄다.

“같이 살래?”

갑작스럽게 떨어진 말에 종인이 곧장 세훈을 바라보았다. 세훈은 제가 하는 말이 민망해죽겠는지, 입술 근처를 쓸어내렸다. 좀 전의 종인과 같은 동작이었다. 세훈은 바로 와 닿는 종인의 눈을 애써 피하면서 변명처럼 덧붙였다.

“너 집도 멀고, 통학 귀찮잖아. 그러니까..”

미치겠네. 세훈이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던 손을 꺼내 잘 정리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마른 입술을 핥고, 한참이나 바닥만 쳐다본 세훈이 다시금 눈을 들었다. 그리고는 종인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초조한 표정. 안달하는 얼굴이 귀여워서 좀 더 놀려볼까도 했지만, 종인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무르기 없기다.”







요즘 들어 준면은, 찬열이 하는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에 조금씩 의미부여를 하곤 했다. 일상적으로 해오던 자잘한 배려 같은 것에 준면은 일일이 놀랐다. 그리고 혼자 생각하고 앓고.. 속된 말로 하면 삽질이었다. 그것은 꼭 준면다운 행동으로 보였다. 스스로는 꼭꼭 숨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사실 찬열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그게 귀엽지. 찬열은 제법 여유 있게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게 될 거야. 준면에게도 한 적이 있는 말이다. 분명 허투로 한 말이 아니었다. 찬열은 확신했다. 수 년 간의 불안을 상쇄시킨 것은 다름 아닌 준면이었다. 견고한 장벽을 허물고 나니 남는 것은 서툴기만 한 준면의 말랑한 이면이었다. 참.. 느린 사람이었다. 사실 지금이라도 당장 확신을 얻고 싶었지만, 이제와 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저쪽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준면의 모습이 보였다. 그 때의 기억이 꽤나 충격인지, 준면은 찬열이 기다리는 어떤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제 이름 석 자에 미안함을 새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전전긍긍하는 것이 귀여워, 조금은 더 두고 보기로 한 찬열이었다. 길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은 저도 이런 정도의 사소한 배려에도 심장이 뛰는 정도였다. 닿을락 말락할 때쯤 여유를 가장하는 것은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찬열이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준면이 무심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왔네. 준면은 짧게 끊어 말했다. 담배를 피우려던 참인지, 손에 담뱃갑을 꺼내들고 있었다.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가자.”

다행히도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찬열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 냄새만 맡아도 기침을 할 것 같은 얼굴이지만 알고 보면 준면은 하루에도 꽤 많은 양을 피웠다. 시간을 길게 끌 것 없이 담배를 물었고, 찬열은 그런 준면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준면이 웃을락 말락한 얼굴로 입술을 슬쩍 당겼다. 찬열의 순서는 나중이었다. 허연 연기를 길게 내뱉은 준면이 약하게 인상을 구겼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던 준면이 고개를 들었다. 찬열을 올려보는 준면은 여전히 햇빛이 눈부신 듯 인상을 약간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준면이 의구심을 담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너 말이야.”

신중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준면은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내 어디가 좋은 건데.”

찬열의 시선이 낮춰졌다. 준면은 떨어질 듯한 재를 털어냈다. 더운 바람이 단정한 머리칼을 흩어놓고 지나갔다. 찬열의 입술이 위로 당겨졌다. 그걸 이제 궁금해 하다니. 그러고 보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기는 했다. 찬열이 습관적으로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대답했다.

“예쁘잖아요.”

속삭이듯 낮게 흘러나온 말에 준면이 인상을 깊게 구겼다. 그리고는 말을 말자는 듯 들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벌건 담뱃불을 야무지게 발로 밟아 끄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저만치 걸어가버린다. 찬열이 뒤에서 소리 내어 웃었다. 표정까지 훤히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찬열도 들고 있던 담배를 대충 비벼 껐다. 그리고는 준면의 뒤를 따라갔다. 행동이 민첩하거나 걸음이 빠른 편이 못 되는 탓에 멀리도 못 갔다. 찬열은 등 뒤에서 준면을 끌어안았다. 준면의 몸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찬열은 갈수록 대담해졌고, 준면은 갈수록 초조해했다. 전세역전이네. 경직된 동작이 귀여워, 찬열은 준면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진한 향기가 코 끝에 닿았다. 찬열의 얼굴은 조금 더 아래로 낮춰졌다. 준면의 하얀 목덜미에 찬열의 얼굴이 닿았다. 찬열이 깊이 마신 숨 때문에 그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준면이 무안한 듯 말했다. 

“뭐해.” 

찬열은 눈까지 감고 한참이나 자세를 지키고 있었다. 준면이 몸까지 슬쩍 틀고 나자 아쉬운 듯 떨어져나갔다. 준면은 제 목덜미를 스쳤던 감각을 떠올리며 목 부근을 쓸었다. 숨이 닿아 몹시 간지러웠다. 너머의 다른 감각까지 끌어들일 것 같은. 찬열이 눈을 휘며 웃었다.

“냄새 좋아서요.”
“방금 담배 피웠는데.”

조금은 무뚝뚝한 어조로, 무안한 듯 덧붙인 말이었다. 찬열은 물러나지 않고 자리를 지킨 채로 말했다. 

“형 냄새 나요.” 

옅은 향수 냄새와 방금 피운 담배, 스쳐간 바람 냄새.. 뒷말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찬열이 기억하는 가장 달콤하고 진한 향기였다. 찬열이 몸을 낮추고 준면의 어깨 위로 턱을 놓았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찬열이 기쁜 듯 입술을 당겼다.

“진짜 좋아해요.”
“야.”

준면이 곤란한 듯 눈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찬열은 완전히  빠진 눈을 하고 있었다. 준면은 제게 향하는 시선 한 줄기 없이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귓가에 바람이라도 불 듯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얼굴을 뜨겁게 달궜다.

“알수록 좋아지는 거지, 처음부터 백퍼센트인 게 어딨어요.”

찬열은, 사실 처음부터 120%였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다. 

“의심하지 마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낮고 편안했다. 준면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만 하고 서 있었다. 그 손짓에 준면이 민망해하고 있음을 안 찬열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부러 준면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떨궈낼 확률을 생각지 않은 것이 아닌데, 준면은 의외로 순순히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찬열은 준면이 저를 좋아하게 될 ‘언젠가’가 멀지 않았음을 느꼈다. 사실은 벌써 왔는지도 몰랐다. 







관계의 재정립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천천히, 가는 봄비에 젖어들듯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은 변하고 있었다. 백현과 경수, 두 사람 모두 지금이 싫지 않았다. 변화 없이 끝나는 관계가 될 지라도 경수는 후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오지 않은 미래를 앞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다행인지 백현은 경수를 재촉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이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절차를 밟아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백현과 함께 걸어가는 길이었다. 다음 수업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때 경수의 눈이 커졌다. 저쪽에서 걸어오는 길쭉한 인영은 세훈과 종인이었다. 

그 날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얼굴들이었다. 경수는 입 안이 말라옴을 느꼈다. 연락 한 통 없었다. 안 만날 사람이 아닌데도 그랬다. 시간을 좀 더 두고 싶었으니까. 어쨌거나 두 사람은 수순처럼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종인의 얼굴에 약간의 불편한 기색이 어렸으나 거기까지 읽지 못 한 백현은 종인을 눈에 띄게 반가워했다.

“개강하고 처음 본다?”
“그러게요. 형 좀 탔어요? 어디 좋은데 갔나보다.”

종인이 품었을 시선에의 충격을 알고 있는 경수는 예상외의 넉살에 놀라고 있었다. 백현은 그을린 팔을 한 번 내려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경수를 흘긋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이 시원했다. 백현이 연이어 물었다.

“방학은 잘 보냈고? 기숙사 몇 호 쓰냐?”
“형. 저 기숙사 안 써요. 신청기간 놓쳐서.”
“뭐야. 그럼 통학해? 집도 좀 멀지 않냐.”
“저 그래서 얘랑 살아요.”

그 말에 경수가 종인을 흘금 올려보았다. 불편한 기색도 거의 휘발되고 나름 신이 나보이는 얼굴이 세훈보다야 훨씬 그 나이다웠다. 세훈은 제 앞에서 항상 고요함만을 내비쳤다. 사실은 제가 알았다고 생각했던 세훈은 일부일지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잘한 거겠지. 경수의 시선은 세훈을 향해있었고, 제게 닿는 눈을 감지한 세훈 역시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는 애써 입술을 끌어올려 웃어보였다. 그러자 세훈도 꽤 편안한 얼굴로 눈을 휘었다. 

“경수야. 우리 몇 시 수업이지?”

제게 돌려진 질문에 시계를 확인한 경수가 대답했다.

“5분 남았네.”
“아씨. 가야겠네. 담에 연락 한 번 해. 밥이라도 먹자.”

경수는 세훈을 다시금 빤히 쳐다보았다. 반듯한 시선에 세훈의 눈도 경수를 향해있었다. 시선이 길게 늘어졌다. 두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발을 옮기면서도 시선을 맞대고 있었다. 경수는 세훈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천천히 손을 옮겼다. 백현의 가는 손이 슬쩍슬쩍 닿았다. 경수는 그 손을 맞잡았다. 꽉 맞물리는 손에 백현이 놀라 저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경수는 세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세훈이야 모를 마음이지만, 이제는 다 괜찮다고 보내는 신호와 같았다. 세훈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전의 편안한 얼굴로 돌아갔다. 경수가 옅게 웃었다. 그 웃음에 세훈도 눈을 가늘게 휘었다. 웃음이 선했다. 경수의 고개가 다시금 돌려졌다. 

백현이 맞잡은 손을 힘주어 들어 올리더니 물었다.

“이 손 뭐야. 사람이 안 하던 일을 하면 죽을 때가 온 거라는데.”
“싫으면 떼고.”
“얘가 이렇게 밀당을 몰라요.”

쯧쯧, 가볍게 혀를 차며 백현이 웃었다. 경수는 그 말간 얼굴을 보며 따라 웃었다. 이 마음이 조금 더 부풀면, 그 때는 먼저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언젠가는.. 네가 좋겠지.







백현과 경수가 저만치 멀어지고, 세훈은 피식 웃었다.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사람에 힘들어하던 경수도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반듯하게 놓였다. 그러니까, 전에도 보았던 얼굴. 종인의 평가가 박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좋은 사람일 테다. 보증에 기반한 믿음이 굳었다. 세훈은 잠시 생각했다. 제게도 자리가 있다면 그것이 종인의 옆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로 옆에서 샌 웃음소리에 종인이 물었다.

“왜 웃어?”

무심한 목소리에 스쳐 지날만한 의문. 세훈은 종인을 바라보았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돌려진 시선. 그 새까만 눈동자에 제가 담겨있었다. 사소한 발견이 때때로 저를 감동시켰다. 세훈의 긴 눈이 만족으로 활짝 휘었다. 

“좋아서.”

선한 웃음에 종인의 입가에도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종인이 슬쩍 세훈의 손을 잡았다. 가볍게 손을 쥐자 세훈이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맞닿은 손바닥으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종인은 생각했다. 우리는 이 온기를 위해 달려왔는지도 모른다고.







fin.






-

리네이밍, 수정 금지
개인소장 및 공유, 배포 가능


출처 : http://exosehun.dothome.co.kr/


출처에 써있는 그대로 가져온것...!


제가 편하게 보려고 가져온거니까ㅠㅅㅠ

리네이밍, 수정만 안 하시면 될듯...(은 이거 보러 들어오는 사람도 없겠지

'개의 취향 > KAI BOTTO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수 캐해석  (0) 2015.10.23
[슈종] 형 친구  (0) 2015.09.02
월간찬카 / 일일찬카 주제  (0) 2014.06.27
일일찬카 월간찬카 Day3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0) 2014.06.19
First  (0) 2014.04.06

WRITTEN BY
.ㅅ.
카이 종인 팬 블로그 프리뷰 저장 호모 좋아합니다

,

First

2014. 4. 6. 16:28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